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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평화로운 일상 (4) (143/197)


143화. 평화로운 일상 (4)
2022.10.13.


루시뿐 아니라, 도망가던 아이들을 비롯해 거기 있는 모두가 미동 한 번 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아무리 왕비 후보라 해도, 왕의 면상에 책을 던졌으니 분명히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린 귀족자제들은 이런 무서운 상황을 납득하는 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물론 놀라기로는 루시가 가장 놀랐고, 루이드는 당황해서 콧구멍만 벌리다가 정신을 차리며 키안에게 가서 사과했다.


“제 동생의 불찰을 용서해주세요. 전하.”

루시도 얼른 일어나가서 키안에게 사과했다.


“아니에요. 제가 해선 안 될 실수를 했어요. 엄벌에 처하셔도 제가 지은 죗값을 달게 받을게요.”

키안은 조용히 바닥으로 떨어진 책을 주웠다.

방 한구석 미술관. 키안은 루시가 책이라면 질색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림이라는 것도 루이드의 얼굴을 낙서할 때라면 모를까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책이 싫다고 아무 데나 던질 성격은 아니란 것도 키안은 알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이대로 덮어두었을 테지만, 지금은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이 아이들 앞에서 이 일을 해소시키지 않으면 루시에 대한 소문이 안 좋게 퍼질 수도 있었다.

따져 물어서 이 일을 지금 해결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루시. 무슨 일로 이 책을 던진 거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루이드가 남자애 셋을 쫓고 있어서 책을 던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루시는 루이드를 잘 알았다.


“저 세 아이가 루이드를 피해 도망 다니고 있었거든요. 루이드가 쫓아다닌 거라면 저 아이들이 분명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한 아이는 봐서 누군지 알겠지만, 도망간 두 아이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두 아이는 앞으로 나와라.”

하지만, 아이들은 눈치만 볼 뿐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를 빠득 갈면서 보던 루이드는 아이들을 한 명씩 지목했다.


“너, 너! 나와. 너희들 도망가는 거 여기 아이들이 다 봤어.”

아이들은 할 수 없다는 듯 키안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때 키안은 각 아이들 앞에 떨어져 있는 구두를 발견했다. 그 다음 키안의 시선이 향한 곳은 루시의 발이었다. 맨발이었다.

키안은 속으로 ‘아이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겉으로는 덤덤한 얼굴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키안은 걸어나가 루시의 구두를 하나씩 주워왔다. 그 모습에 아이들도 모두 놀랐지만, 루시는 더욱 놀랐고 또, 창피했다.

키안은 얼굴이 벌게져 있는 루시의 앞에 앉아 구두를 신겨주었다.


 
이 때문에 불려 나온 세 아이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루시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루시를 험담했던 자신들을 왕이 결코 용서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키안은 이미 정의롭다고 소문이 자자한 왕이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향해 눈짓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루시의 험담을 한 일은 결코 없었던 것으로 말이다.

모두가 부러워 했지만, 구두를 신는 루시는 창피해서 딱 죽을 맛이었다. 키안의 마빡을 향해 책을 던졌을 때보다 더 민망한 상황이었으니까.

루시는 어쨌든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 있었다.


“이제 말해봐라. 어떻게 된 일인지.”

루이드는 당당하게 아이들을 향해 너희들은 이제 죽었다는 듯 노려보며 말했다.


“저 아이들이 루시가 교양이 없다는 둥, 아버지 덕분에 유력한 약혼자 후보가 됐다는 둥, 루시를 험담하고 있었어요!”

아이들은 루이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우리는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요!”

“맞아요! 진짜예요!”

“유카나다르 소후작이 갑자기 와서 우리를 괴롭혔어요!”

키안이 보기에 루시를 두고 험담을 한 아이들은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처럼 보였다.


“영식들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여, 여덟 살입니다. 전하.”

“저, 저는 일곱 살입니다. 전하.”

“저…… 저도 일곱 살이입니다. 전하.”

생각처럼 너무나 어린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아무리 교양을 배운다고 해도 스스로 사리판단할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이였다.

키안은 아이들을 보며 두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여기, 마법사님과 신관님이 계셔. 너희가 거짓말을 한다면 두 분께 부탁해서 당장 알아낼 수가 있어. 정말 소후작이 아무 이유도 없이 너희를 괴롭히기 위해 뒤쫓았어?”

마법사, 신관. 낯설기도 하지만 살다 보면 한 번씩은 만날 수밖에 없는 인물들로 그들의 존재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금세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듯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곧 눈물을 터트리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게 아니고, 전하…… 으엉…… 흑, 살려주세요!”

“싸,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교양이 부족한 줄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전하…….”

키안은 루시뿐 아니라, 자신의 약혼자 후보 명단에 이름이 오른 귀족 영애들이 모두 구설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친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번 참에 확실히 말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키안은 모여 있는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잘 들어라. 그리고 집에 가거든 네 부모들에게도 단단히 말해주어라. 앞으로 여기 있는 소후작 루시뿐 아니라, 약혼자 후보 명단에 오른 그 누구의 이름도 구설에 올리는 자가 있다면 엄벌에 처할 것이다. 그것이 너희 같은 어린 귀족의 자제들이라도 가차 없이 벌을 내릴 것이다. 알았느냐?”

지엄한 어린 왕의 명에 불복하는 이는 없었다. 제법 성장한 귀족자제들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왕의 하명에 고개를 숙였다.

이 일도 삽시간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키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누구도 함부로 루시를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라는 걸.

***



“장미꽃 하나라도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해라.”

“가, 감사합니다. 각하!”

시카르는 정원에 서서 아치형 웨딩문에 장미꽃을 일일이 달고 있었다. 레이독스도 이들을 도와 열심히 풍선을 달고 있었다.


“하인들 시키면 될 것을.”

“그건 성의 없다고 싫어해요.”

“까다롭군.”

얼마 전, 레이독스는 아론을 데려와 연회 때 프러포즈를 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시카르에게 부탁했다.


“그러니까, 제르미가 프러포즈를 하는데 레이독스 네놈과 아론 네놈이 도와주었으니, 이번엔 제르미가 아론을 도와야 한단 말이냐?”

아론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간절히 빌고 있었다.


“네. 공작님. 전 이번에 프러포즈 못 하면 헤르시아에게 이별을 당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놈이 프러포즈하는데 내 정원을 빌려달라?”

“네. 공작님.”

“레이독스 네놈 집은 어쩌고?”

레이독스는 제르미에게 물으라는 듯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제르미가 얼굴을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번에 제가 후작저에서 프러포즈를 했는데, 거기까지 가게 했다고 화를 더 많이 내서…….”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먼 곳보다는 가까운 데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레이독스 네놈은 프러포즈도 안 하는데 왜 이 일에 끼어 있는 거지?”

레이독스는 수줍은 듯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제 프러포즈 때도 이들이 도와줬습니다.”

“그냥 내가 확인하겠다.”

마치 더러운 물건이라도 잡는다는 얼굴로 레이독스의 손을 맞잡은 시카르는 꽤 충격을 받았다.

레이독스도, 제르미도 모두 프러포즈라는 것을 한 상태였다.

아름답게 꾸민 정원에서 화려한 이벤트를 열고, 감동적인 노래를 틀어주고, 여인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행복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원래 이런 걸 다 하나?”

당황한 시카르의 질문에 레이독스는 당연한 질문을 한다는 듯 보며 말했다.


“네.”

“이런 걸 안 하면 어떻게 되지?”

“평생 원망을 듣겠죠.”

“평생 원망이라…….”

시카르는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아론은 시카르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의아했다.


“공작님께서는 프러포즈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시카르는 대답 대신 아론의 목을 향해 칼을 꺼내 겨누었다. 놀란 아론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고, 공작님?”

“이렇게?”

시카르의 대답에 아론과 레이독스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못된 프러포즈입니다. 공작님, 가끔 구박 들으시죠?”

시카르는 그 말에 매우 공감했다.


“자주 듣지. 요즘은 거의 일상이 된 것 같군.”

레이독스는 이해할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프러포즈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찾다니. 안타까운 마음에 욕설이 절로 나왔다.


“젠장.”

“괜찮습니다. 이번에 배우시죠.”

“그럼 내가 프러포즈할 때 네놈들이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공작님께는 듀리온과 비카라는 든든한 양팔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안 도와줄 건가?”

레이독스는 웃음이 나왔다. 그 자존심 센 블레이크 공작이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가?

레이독스는 확인하고 싶어졌다.


“지금 공작님께서 제게 프러포즈를 도와달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시카르가 도움을 요청하는 가장 간절한 부탁이라는 것을 레이독스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웃음을 걷고 진지하게 말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대신 공작님께서도 아론을 잘 도와주셔야 할 것입니다.”

시카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같이하지.”

“네?”

“네 놈이 프러포즈하는 걸 내 부인이 본다면 헤르시아를 부러워하게 되겠지. 내 부인이 헤르시아를 부러워하는 꼴을 내가 볼 것 같으냐.”

그리하여 두 사람이 동시 프러포즈를 준비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다 같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이독스는 옆에서 시카르에게 하나씩 조언을 던지고 있었다.


“프러포즈의 기본은 꽃과 반지입니다.”

“반지라면 이미 수십 개는 주었다. 반지만 줬을까. 목걸이와 귀걸이도 주었지.”

“그냥 주는 것과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주는 것은 다릅니다.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장소가 중요하듯이요.”

그 말에는 시카르도 동의했기에 이미 반지를 준비한 터였다.


“그래서 반지는 준비했지.”

“참 잘하셨습니다. 공작부인께서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그런데 무슨 반지를 준비했는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보게 될 테니 나중에 보도록 하지.”

공작이 반지를 준비했다면 분명히 꽤나 값비싼 것일게 분명했다.

아론과 비교되지 않을지 레이독스는 조금 아론이 걱정되었지만, 헤르시아가 그런 일로 마음이 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정원에는 장미꽃으로 만든 아치형의 웨딩 문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뿌려진 꽃들과 반짝이는 촛불들이 길을 만들고 있었고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풍선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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