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프러포즈하세요 (1) (144/197)


144화. 프러포즈하세요 (1)
2022.10.17.


마차에 있는 옷들은 모두 최상품들이었기에 메이리는 물론이고 사용인들에게 아주 비싼 숄을 선물할 수 있게 되었다.

메이리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숄을 넙죽 받았지만 안드레아는 옅은 미소만 지었다.

표현력이 그럴 뿐 안드레아가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역시나 선물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헤르시아 몰래 웨딩드레스도 하나 주문했다. 드레스는 아론의 편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드레스를 선물해준다면 그도 눈치가 있으니 프러포즈를 하겠지. 서연의 웨딩드레스는 섬세한 레이독스가 직접 주문해 놓을 테니. 서연의 것은 뺐다.


“이건 비카 님께 정말 잘 어울리겠는데요?”

헤르시아가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새빨간 드레스였다.


“비카 님이 드레스를 입은 걸 본적은 없지만 정말 잘 어울리겠는데요?”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비카는 거의 항상 가죽 재킷과 가죽 베스트를 입고 있었던 것 같았다.

헤르시아는 아쉬운 듯 코끝을 찡긋거렸다.


“정말이요? 비카 님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드레스를 한 번도 안 입어 보셨다니 놀랍네요.”

아마도 비카에게 드레스를 입기를 권장한다면, ‘이런 거추장스러운 걸 왜 입는지 모르겠군.’이라고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 저 빨강 드레스는 비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소화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만큼 비카의 거무잡잡한 피부와 잘 어울리는 강렬한 붉은 색이었다.

마치 비카를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그 빨간 드레스에 우리는 모두 묘하게 매료되었다.


“헤르시아 님의 말씀대로 비카 님께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으니 선물이라도 한번 해드려 볼까요?”

헤르시아는 마치 자신이 드레스를 선물 받을 것처럼 기뻐했다.


“우리 중에 비카 님께 감히 드레스를 선물할 사람이 있다면, 공작부인밖에 없겠죠!”

서연도 궁금하다는 표정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심쩍은 듯 물었다.


“그런데 드레스를 선물한다고 해서, 과연 비카 님이 입으실까요?”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부인께서 선물한 옷인데 입으시지 않을까요?”

로엔은 정말 그럴까 하는 얼굴로 제 볼을 긁적거렸다.


“하긴 비카 님이 누구 눈치 볼 사람은 아니죠. 공작님의 눈치도 안 보시는 분이니까.”

모두 내 생각을 묻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비카 님께 강제로 드레스를 입게 할 마음은 없어요. 비카 님이 싫으시면 안 입으셔도 괜찮아요. 그분의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에요.”

헤르시아는 민망한 듯 입을 꽉 물었다.


“어머, 전 제가 보고 싶은 것만 생각했지 비카 님이 싫으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제가 너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서 민망하군요.”

“헤르시아 님께서 드레스를 좋아하시니 당연히 비카 님도 좋아하실 거라고 판단해서였겠죠. 나쁜 의도가 아니니 너무 부끄러워 마세요.”

“역시 공작부인께서는 제 마음을 알아 주시는 군요. 감사해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걸요. 그럼 전, 비카 님께 한 번 다녀와 볼게요.”

“비카 님께서 드레스를 입기 싫어하셔도 전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저도요!”

헤르시아와 서연이 다짐 하듯 말했지만 표정을 보니 실망할 것 같았다.

사실 나도 비카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시카르에게 부탁하면 비카에게 어떤 협박을 가해서라도 입게 만들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그건 옳은 일이 아니지. 아니고 말고.

비카는 듀리온과 앉아서 브라우니를 먹고 있었다. 달기만 하고 맛없다더니 비카가 제일 잘 먹는구나.


“비카 님.”

비카는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직원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직원 둘이서 드레스를 잡고 양옆으로 활짝 펼쳤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너무 예쁘다고 고함을 지르고도 남을 만큼 예쁜 빨간 드레스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비카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이게 뭔가요?”

“비카 님께 드리는 제 마음이자, 선물이에요!”

정작 선물을 받는 비카는 관심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그 곁에 있는 듀리온은 감탄한 듯 드레스를 보며 일어섰다.


“와! 마님! 이건 드레스가 아니에요?! 비카에게 이런 아름다운 드레스를 선물하신다고요?! 저 성격에 드레스를 찢어 먹지만 않으면 다행일 텐데요.”

“괜찮아요. 어떻게 입으시든 그건 자유니까요. 전 그저 비카 님께 드레스를 한 벌 선물하고 싶었을 뿐인걸요.”

비카는 여전히 관심없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선물이라고 하시니 감사히 받을게요. 마님. 옷은 내 방에 올려주세요.”

그러자 듀리온이 으름장을 놓듯 비카의 팔을 잡아당겼다.


“야. 이 녀석아. 마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당장 입어봐야지! 네가 이렇게 마님께 무례하게 구는 걸 공작님이 아시게 된다면 널 가만히 안 둘걸.”

듣고 보니 아차 싶었던지. 비카는 피곤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주시는 거니 일단은 입어 보도록 할게요.”

내가 시카르라는 카드를 꺼낸 것은 아니었지만, 듀리온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나는 직원에게 말해 드레스를 들고 나를 따라 방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몇 분 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자 비카가 방에서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왔다.

드레스를 입고 있는 비카의 모습은 정형화된 미의 기준을 깨는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비카 본인은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듀리온은 이게 누구신가 하는 얼굴로 비카를 바라보았다.


“누구?”

이내 날아오는 비카의 대답은 그녀의 성격과 썩 어울렸다.


“꺼져.”

듀리온은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비카에게 어이가 없다는 박수를 보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저렇게나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밖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비카를 훔쳐보고 있던 헤르시아를 비롯한 세 사람은 얼른 들어오라는 내 손짓에 감탄한 듯 안으로 들어왔다.


“세상에 비카 님! 너무 아름다워요!”

“새빨간 드레스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헤르시아와 서연은 각자의 감탄사를 뱉어내고 있었고, 로엔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살짝 쳐주고 있었다.

비카는 여전히 관심 없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감사해요. 마님. 이제 옷 갈아 입어도 되죠?”

벌써? 아쉬운데. 이 모습을 우리만 보고 끝이라니.

도움을 요청하듯 듀리온을 힐끗 쳐다보자, 그는 조금 얼빠진 눈으로 비카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비카. 마님께서 선물해주신 귀한 옷인데 오늘 하루정도는 입고 있는 게 예의지. 그리고 이런 옷을 입으면 한 바퀴 돌아주는 것도 매너라고.”

“매너?”

듀리온은 비카를 강제로 한 바퀴 돌렸다.


“그렇지. 이렇게 한 바퀴는 돌아줘야지.”

“그만해, 이제!”

관자놀이에 핏줄이 바짝 솟아오른 비카가 듀리온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그 순간에 제르미가 급히 들어왔다.


“공작부인. 공작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내게 말을 전하기 위해 들어왔던 제르미도 비카의 모습을 보고 입이 안 다물어진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누가 봐도 아름답긴 하지.


“전 공작님께 좀 다녀올게요. 쉬고 계세요.”

“같이 가시죠. 공작부인. 아, 그리고 헤르시아 님도 함께 오시죠.”

무슨 일이길래 우리를 같이 부르는 거지?

그땐 몰랐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따라가는 나와 헤르시아를 보며 서연과 로엔이 킥킥거리며 웃었던 이유를.

***

제르미가 알려준 곳에 도착하자, 온통 내 눈앞으로 보이는 것은 풍선과 촛불과 꽃들이었다.

가만, 이런 건 보통 프러포즈할 때나 이벤트를 할 때 꾸미는 소품들 같은데.

깜짝 이벤트라도 하려는 건가 싶은 찰나, 정원의 예쁘게 깎여진 나무 뒤에서 시카르가 나타났다.

역시 이건…….

시카르는 자신있고 당당하게 내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연습 좀 했어.”

“연습?”

“이렇게 걸어 나오는 연습 말이야.”

그런 연습을 왜 한 걸까. 정말 프러포즈라도 할 생각인 걸까.

왠지 묻는 게 실례일 것만 같아서 입을 달싹이고만 있는데, 시카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네게 정식으로 프러포즈할게.”

역시 프러포즈였구나.

설마 했지만, 정말로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말을 하니 심장이 고장난 듯 뛰었다.

시카르의 성격에 이런 근사한 프러포즈를 준비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동안 내게 갖가지 선물을 사주긴 했지만, 이런 이벤트를 꾸민다거나 하는 섬세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처음이었다.

시카르는 나를 향해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우린 이미 결혼했으니까 결혼하자고는 안 할게. 다만.”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도 되었기에 나는 집중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가 내게 더 친절해졌으면 좋겠어.”

전에도 내게 친절을 부탁했던 게 떠올랐다. 내가 가끔 뭐라고 해서 그러는 걸까.


“그래서 네게 잘 보이고 싶어서 준비했어. 네가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는데.”

시카르는 나를 향해 예쁜 반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핑크다이아 반지였다.

알도 엄청 큰 핑크다이아 반지!


“이, 이건 핑크다이아 반지잖아?!”

“맞아. 매우 희귀한 품종의 다이아지. 이 세계에서 매우 특별한 너와 닮은 것 같아서 이 반지를 준비했어.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다마다. 아까 핑크다이아 때문에 얼마나 속이 쓰렸는데. 당연히 마음에 들었다.


“너무 예뻐!”

내 몸도 내 마음을 대변하듯 저절로 반지를 끼워달라는 듯 손가락이 펴졌다.

시카르는 웃으며 내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너와 참 잘 어울리는 반지군.”

세공도 너무 예쁘게 돼 있는 반지였다.


“사실 아까 하멜 백작이 핑크다이아를 줬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그런 거짓말은 왜 한 거야?”

“네가 핑크다이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거든.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고 말이지.”

내 반응을 보려고 없는 말을 한 거구나.


“다행이었다. 네가 매우 아까워하는 것 같아서.”

난 분명히 아깝지 않은 척 연기를 했던 것 같지만, 모두 티가 났던 모양이다.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있다 보니 코끝이 찡하며 조금 울컥거렸다.


“내게 이렇게 귀한 걸 줘서 고마워. 정말 감동이야.”

“내게 넌 그보다 더 귀한 사람이니까.”

시카르는 나를 감싸 안듯 꼭 끌어 안아주었다.


“사실 난 프러포즈라는 걸 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나도 그럴 줄 알고 바라지도 않고 있었지.


“그럼 난 이제 구박 탈출인가?”

“구박 탈출?”

“레이독스의 말로는 내가 네게 프러포즈를 제대로 안 해서 구박을 받고 있다던데.”

사실 구박을 했다기보단 기가 센 시카르에게 순순히 잡혀 살지 않겠다는 의지와도 같은 것이었지만 레이독스가 보기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팔짱을 끼고 조금 더 거만하게 말했다.


“너 하는 거 봐서.”

시카르는 내가 순순히 알겠다고 할 줄 알았던 모양인지 조금 실망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걸 구하긴 쉽지 않았는데 더 지켜보겠다니. 역시 넌 내게만 유독 가혹한 것 같군.”

기센 남편을 둔 여인의 운명과도 같은 거지. 자기 방어기제 같은 것이랄까.


“그렇다고 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시카르는 뭔가 떠오른 듯 내 허리를 꽉 붙들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서운한 게 하나 더 있다. 너도 아직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