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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프러포즈하세요 (2) (145/197)


145화. 프러포즈하세요 (2)
2022.10.20.


시카르는 유라의 허리가 꺾어지도록 안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좋아한다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그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설마 날 좋아만 하고 사랑하지는 않는 건가.”

유라가 대답 않고 웃고만 있자 그의 눈빛이 점점 심각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평정을 찾은 듯 다시 온화해졌다.


“어차피 무엇이건 상관없다. 내가 널 많이 사랑하니까. 내가 널 죽을 때까지 사랑할 거니까.”

시카르는 유라의 입술에 곧장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은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갈증과도 같았다.

노을이 저물고 밤하늘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초저녁 정원에는 바람에도 지지 않는 예쁜 촛불이 반짝였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키스를 나누는 동안 반대편 정원에서는 아론이 헤르시아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있었다.

비록 1부짜리 다이아였지만, 아론의 형편으로서는 세공비를 포함해서 꽤 비싼 값을 지불해야만 했던 프러포즈 반지였다.

아론은 헤르시아에게 반지를 내밀며 무릎을 꿇었다.


“결혼하자!”

헤르시아는 반지를 잡으려다 이렇게 쉽게 프러포즈를 받아주기에는 괘씸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당장 결혼하기에는 돈이 없어서 못 하겠다며.”

“그, 그땐 그랬는데 계속 미루면 네가 헤어지자고 할 것 같아서…….”

“뭐?!”

“아, 아니, 이제 우리 장사도 할 테니까 결혼해도 될 것 같아서…….”

“그걸 말이라고 해?!”

헤르시아는 도저히 반지를 받아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론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던 아론도 이제는 조금 화가 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결혼하자고 하잖아. 근데 왜 화가 난 거야. 난 도저히 널 이해를 못 하겠어.”

헤르시아도 마찬가지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너를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아론은 또 저런다는 듯 한숨을 깊게 쉬면서도 자신이 준비한 반지가 문제인 것 같아서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것 밖에 못 해줘. 내가 널 고생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은 차마 못 하겠지만 나중에 꼭 호강시켜 주겠다는 약속은 할 수 있어.”

말이라도 나중에 꼭 호강시켜주겠다는 약속이 고마웠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진짜 모르겠어?”

아론은 또 시작이라는 듯 코를 벌렁거리면서도 자신의 뭘 잘못했는가를 열심히 떠올렸다.


“내가 프러포즈를 늦게 해서…….”

“틀렸어.”

“결혼을 자꾸 미뤄서…….”

“그게 그 말이지!”

아론은 도저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대체 또 뭘 잘못한 거야?!”

“그걸 내가 말해줘야 알아?”

요즘은 툭하면 이렇게 싸우고 있었다. 아론은 손에 든 반지 상자 뚜껑을 닫았다.


“그래. 나 진짜 도저히 모르겠어. 내가 이번엔 또 뭘 잘못했길래 프러포즈하는 데까지 이래.”

헤르시아는 참고 있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엉엉 울었고 아론은 항상 그랬듯 한숨을 쉬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우는 건지 그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헤르시아가 울 때면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그는 몰랐다.


“미안해. 미안한데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래. 정말로.”

헤르시아의 그런 행동을 이해 못 하는 건 제르미도 마찬가지였다.

프러포즈를 준비한 사람들은 정원 중앙에 앉아 시카르가 준비한 프러포즈와 아론이 준비한 프러포즈를 구경 중이었다.

공작의 프러포즈는 매끄럽게 잘 진행되었기에 다들 뿌듯함을 느꼈지만, 아론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아론의 말대로 보석이 너무 작아서 그런가?”

레이독스는 거기에 동의하지 못했다.


“헤르시아 님께서는 아론의 재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데도 그와 결혼한다고 하셨잖아. 돈 때문은 아닐 거 같군.”

“그럼 뭐가 문제길래 프러포즈를 받고 우는 거지. 아무리 봐도 감동해서 우는 모습은 아닌데.”

“글쎄…….”

이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지켜보는 서연과 로엔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전 알 것 같아요.”

서연의 말에 두 남자가 주목했다.


“그래요? 헤르시아 님께서 대체 왜 저러시는 거예요? 저도 궁금합니다. 서연님.”

제르미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인데 반해 서연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헤르시아 님께서 몇 번이고 결혼 얘기를 하셨는데 미루셨잖아요. 그러다 프러포즈를 받게 된 건데. 지금 프러포즈가 너무…… 헤르시아 님이 졸라서 어쩔 수 없이 프러포즈를 한다는 식의 그런 뉘앙스랄까.”

제르미와 레이독스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연 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아까 공작님의 프러포즈를 떠올려 보세요. 공작님은 죽을 때까지 사랑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사실 여자들은 비싼 보석 반지도 물론 좋지만, 사랑의 맹세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아론 님은 억지로 프러포즈하는 느낌이랄까.”

로엔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맞아요. 저러면 열 받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러면 헤르시아 님께서 그렇다고 속 시원히 말을 하면 되잖아요?”

제르미의 한 숨소리에 로엔이 얼굴을 붉혔다.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기가 껄끄러우니까 그렇죠. 제르미 님도 너무 뭘 모르신다니까.”

“하지만, 로엔 님께서는 제게 다 말씀하셨잖아요. 얼마 전에 저한테 프러포즈를 빨리 안 하면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린다고 협박하셔서 제가 시간에 쫓겨가며 프러포즈를…….”

로엔은 민망한 듯 서연을 보고 웃으며 검지손가락으로 제르미의 입을 막았다.


“제르미 님. 그 얘긴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하지 마시죠.”

제르미는 이제 또 한동안 자신의 신세가 벼랑 끝에 서 있는 고목 나무 신세가 될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로엔이 민망해하긴 했어도 서연은 잘 지내는 두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그녀는 문득 로엔의 능력이 떠올랐다.


“참, 로엔 님께서는 신관이시잖아요. 헤르시아 님의 속마음을 아론 님에게 들려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어어. 그런데, 전음은 제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잠시 듣거나, 제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정도인데 아직 완벽하게 구사할 수는 없어요. 그건 좀 더 고위 신관님들이 가능하신 거라서요…….”

“아. 그렇군요.”

제르미는 뿌듯하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 거라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아론에게 환청이 들리게 하는 거죠.”

레이독스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네. 오늘 아론을 도와주기로 했으니 확실히 도와줘야지. 제르미 네 능력으로 아론이 성공적으로 프러포즈를 마칠 수 있게 도와줘.”

그래서 제르미는 서연에게 전해 들은 헤르시아의 속마음을 아론에게 들려주었다.

헤르시아와 대치 중이던 아론에게 처음엔 제르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론…….]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지? 하는 생각에 아론이 고개를 들자 다음 소리가 들렸다.


[아차차차…….]

그러곤 다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헤르시아의 것이었다.


[아론…….]

아론은 당황한 눈으로 헤르시아를 바라보았다.


“헤르시아?”

헤르시아는 여전히 눈물을 훌쩍일 뿐 아론에게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았다.

아론에게는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아론. 넌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니. 나는 보석도 필요 없고 집도 필요 없어. 난 그저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너의 맹세를 담은 프러포즈를 원할 뿐이란 말이야.]

헤르시아의 목소리를 흉내 내던 제르미는 인상을 그리며 서연에게 빨리 다음 말을 전해 달라고 일렀다.


[할 수 없어서 억지로 떠밀리듯이 하는 그런 프러포즈는 싫어…….]

아론은 충격받은 얼굴로 헤르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너무 무심하다 싶었다.


“헤르시아…… 미안. 아니, 사랑해.”

눈물을 훌쩍이던 헤르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 뭐라고?”

아론은 이제야 헤르시아가 왜 우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사랑한다고. 사랑해서 결혼하자고 하는 거야. 내가 너 없이는 못살 거 같아서, 죽을 거 같아서. 그래서 네가 너무 소중해서, 소중한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욕심에 결혼을 미룬 거였어. 이 결혼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었어.”

“아론…….”

“억지로 떠밀려서 하는 그런 프러포즈가 아니야. 사랑하는 너를 놓치기 싫어서 하는 프러포즈야. 나 이제 기사직 관둘 거야. 너와 장사하면서 평범하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 살 생각이야. 난 그냥 너와 결혼해서 아이 낳고 그렇게 오손도손 살고 싶어…….”

“아론!!!”

헤르시아는 아론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론도 헤르시아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서연도 눈시울을 붉혔지만 제르미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 로엔과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아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엔은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 본다는 듯 손을 모았다.


“너무 감동적인 프러포즈군요.”

누구보다 서연은 두 사람의 결혼을 제 일처럼 기뻐했다.

두 사람이 원작처럼 불행하지 않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너무 잘 됐어요. 정말.”

 

 

***

합동 아닌 합동 프러포즈가 끝나고 하객들을 모두 보낸 후, 제르미와 로엔과의 작별을 위해 이들은 모두 다이닝룸에 빙 둘러앉았다.

다이닝룸에는 작별인사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위해 남녀가 각각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헤르시아의 프러포즈 소식을 들은 유라는 자신의 손에 있던 반지를 감추었다.


“서연 님께서 잘 해결하셨군요.”

“두 사람이 크게 싸우거나 프러포즈가 엉망이 될까 봐. 정말 조마조마했거든요.”

유라는 서연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블러드 킹을 본 사람이라면 두 사람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암.


“참, 서연 님의 결혼식은 언제인가요?”

서연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다가 레이독스의 곁에서 파스타 면발을 호로록거리고 있는 쌍둥이를 보며 말했다.


“사실 전 후작님과의 결혼을 서두르지는 않고 있어요.”

분명 서연이 레이독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꼈던 유라는 그녀가 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연 님, 왜…….”

“전 사실, 결혼보다는 쌍둥이들에게 먼저 엄마로 인정받고 싶거든요.”

그 말은 꽤 뜻밖의 얘기였기에 유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후작님도 알고 계세요?”

서연은 씁쓸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후작님은 모르세요. 전 그래서 공작부인이 부러웠어요. 전하께서 선뜻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해 주셨잖아요.”

“그때 국왕에게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으니까요…….”

하지만 키안과 루시는 처지가 많이 달랐다. 루시에게는 자신을 늘 지키고 아껴주는 아빠라는 울타리가 있었으니까.

유라도 서연도 그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원작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루시가 분명히 서연 님을 엄마로 의지할 날이 올 거예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이 세계의 여주인공에게 어머니로 인정받는 그런 날이요.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행복하겠죠?”

슬픈 얼굴로 말하는 서연이 유라는 못내 안타까워서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럴 거예요. 그날이 오면 우리 꼭 같이 축배를 들어요.”

“고마워요. 여기서 공작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외로웠을 거 같아요.”

“물론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유라는 눈치를 보며 입안에서 맴돌던 그 말을 꺼내 들었다.


“제가 전에 부탁한 일이요. 제 시녀가 되어달라고 했던 부탁은 좀 생각해 보셨어요?”

서연의 말을 기다리는 유라는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물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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