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약혼식 (1)
(146/197)
146화. 약혼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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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약혼식 (1)
2022.10.24.
서연이 선뜻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거절할 모양이었다.
서연이 거절한다면 시녀 일을 부탁할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기운이 쭉 빠졌다.
“제가 너무 부담을 드렸다면 죄송해요.”
거의 포기했기에 한 말이었지만 서연의 대답은 의외였다.
“할게요.”
“네?”
“제가 하겠다고요.”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네. 대신 부탁이 있어요. 제가 잘못해도 조금 이해해주세요.”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 방방 뛰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당연하죠. 어차피 서연 님이 아니면 부탁할 사람도 없었거든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저를 필요로 해 주시니 제가 더 고맙죠.”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요.”
“실은 저도 그래요. 그리고……”
서연을 말을 하다 수줍게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작부인의 말씀처럼 쌍둥이들에게 인정받고 더 가까워지려면 궁에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서연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헤르시아 님이 장사를 시작하게 되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았는데 서연 님과 매일 함께할 수 있다니 단짝 친구라도 얻은 기분이에요.”
“단짝이요?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저야 너무 고맙죠.”
서연은 감동 어린 눈으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헤르시아와 로엔이 옆에서 우리를 흘겨보았다. 특히 로엔은 섭섭하다는 얼굴이었다.
“이거 정말 서운한걸요? 꼭 곁에 있어야 단짝은 아니라고요. 저는 대신전에서 항상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할 거란 말이에요.”
헤르시아도 공감한다는 듯 서운한 표정이었다.
“저도 그 단짝 모임에 끼워줘요. 먹고 사느라 자주 못 보겠지만, 여러분들을 잊고 살고 싶지는 않다구요.”
그래서 갑자기 서연과 나, 헤르시아, 로엔으로 이루어진 단짝 모임이 만들어졌다.
“우리 떨어져 지내도 항상 서로 잊지 말기로 해요.”
“물론이에요!”
“저도 곧 대신전으로 가야 하니 가서 뵐게요. 로엔 님.”
로엔은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를 만나뵈러 가야하거든요.”
로엔은 기대된다는 듯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기다릴게요. 공작부인.”
“저도 대신전에 기도를 드리러 갈게요.”
헤르시아의 말에 서연도 동참했다.
“저도 갈게요 로엔 님.”
로엔이 대신전으로 가고 나면 정말 많이 그리워질 것 같았지만, 아쉬워도 헤어져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로엔은 무언가 떠오른 듯 내게 귓말로 속삭였다.
“참, 헤르시아 님께 길리언의 이야기를 전해 드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제야 나도 길리언의 문제가 떠올랐다. 그를 폐궁이 아닌, 재건축한 궁에 유폐하는 일을 헤르시아는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어차피 알게 될 얘기니 지금 하는 게 좋겠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엔은 헤르시아에게 길리언이 재건되는 폐궁에서 이전처럼 지내게 될 것이라는 걸 말해주었다.
당연히 헤르시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왜…… 왜 그렇게 처리가 되는 거죠?”
궁금해하긴 서연도 마찬가지였다.
“공작님 성격에 길리언을 처형하지 않고 살려주는 것도 모자라 궁을 재건시켜서 유폐한다고요?”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 무슨 이유가 있겠죠.”
로엔은 시카르가 이유 없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헤르시아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기에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헤르시아 님, 많이 놀라셨죠…….”
헤르시아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춥다는 듯 자신의 양어깨를 끌어안았다.
“조금…… 조금 무섭긴 해요.”
평생을 길리언에게 압박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나중에 길리언을 한번 만나보시겠어요? 헤르시아 님께서도 한 번 속 시원히 따지고 나면 괜찮아질지도 모르니까.”
헤르시아는 낮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직 길리언이 무서워요.”
“헤르시아…… 이해해요.”
우리는 모두 서로 합을 맞춘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헤르시아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앞에서 남자들이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우리는 분위기를 금방 환기시킬 수가 있었다.
들어보니, 레이독스가 제르미에게 구빈원에 기부를 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이 돈은 안 돼!”
“신전에서 사는 녀석이 돈 쓸 일이 뭐가 있다고 안 된단 말이야.”
“이 돈은 베로니아 공주님을 설산까지 데려다준 대가로 받은 돈이라고.”
시카르에게 받은 돈을 말하는 거군.
“이번에 공작부인께서는 하례물로 받은 모든 물품을 기증하신다고 하셨는데, 너도 뭐 하나는 해야지.”
“그래도 이 돈은 안 돼. 이 돈은 마정수를 사는 데 써야 한다고.”
두 사람이 계속 실랑이를 벌이자 시카르는 시끄럽다는 듯 두 사람을 쫓아내려 했다. 그래서 키안이 이 일을 한마디로 해결했다.
“그럼 절반만 기부해요.”
제르미는 그 절반도 아까워했지만, 모두 기부금을 거두는 중이라 계속 안 된다고 우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증서에 서명을 하면서도 호락호락 서명하진 않았다.
“레이독스 너도 재산의 절반을 기부해! 난 이게 전 재산이라고!”
로엔은 시카르에게서 받은 돈을 이미 모두 대신전에 기부했다고 했다.
물욕이라고는 없는 신관인 로엔과 물욕이 득실한 마법사가 만나 어떻게 이렇게 잘 지낼 수 있는 건지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끌벅적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작별을 해야 했다.
“제르미 님, 곧 다시 만나요!”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아마 다시는 수도에 오는 일은 없겠지만 레카도르의 영원한 평안과 안녕을 위해 항상 기도해드리죠.”
글쎄. 신관도 아닌 마법사가 기도한다는 말이 크게 위안이 되진 않는데.
아쉬운 작별인사를 끝내고 모두들 각자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타고 돌아갔고, 시카르는 키안을 데려다주고 온다고 했다.
모두 돌아가고 나니 궁 안이 허전한 게 갑자기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하녀들에게는 숄을, 하인들에게는 망토를 나누어 주었다.
메이리는 특히나 더욱 기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메이리.”
“마님! 부탁이라뇨! 제가 앞으로 마님을 잘 보필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걸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마님.”
“안드레아도 잘 부탁해.”
안드레아는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낮게 숙였다.
“잘 입겠습니다. 마님.”
와중에 듀리온이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듀리온, 왜 그래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괘, 괜찮습니다. 마님.”
듀리온이 머쓱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자 메이리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와서 속삭였다.
“아까, 듀리온 님께서 집사님에게 ‘너도 심심하면 나와 결혼이나 하지.’라고 하셔서 한 대 맞으셨어요.”
“그게 정말이야?”
“네.”
세상에, 맞을 만했네. 비카의 손톱에 긁히지 않고 듀리온의 얼굴이 멀쩡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니면 적어도 급소를 한방 맞았을 텐데. 아, 어쩌면 지금 듀리온이 급소를 제대로 맞아서 저렇게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
“저, 그리고 마님.”
“어서 말해봐. 궁금하니까.”
메이리는 입이 근질근질했다는 듯 오늘 궁에서 일어난 여러 일을 내게 전해주었다. 소식통은 하녀들이 가장 빠르다니까.
그중 가장 재미있는 소식은 무엇보다 키안의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전하께서 루시에게 직접 신발을 신겨주었다는 얘기지?”
“네! 그러셨대요. 언제 그렇게 장성하셨는지. 이제 남자가 다 되셨어요.”
아직 열 살이라고. 루시를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 키안의 숙명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
키안이 잘 대처한 덕분에 앞으로 루시의 험담을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
일주일 뒤, 헤르시아에게서 감사의 편지가 날라왔다.
[친애하는 공작부인께.
공작부인!
보내주신 드레스는 정말 잘 받았어요. 갑작스러운 선물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덕분에 개업 준비도 막바지랍니다. 장사 시작하고 나면 한번 찾아뵐게요!]
하지만 편지 어디를 봐도 결혼식을 언제 한다는 말은 없었다.
집안의 반대 때문에 결혼식을 못 하는 건지 다른 사정이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도 헤르시아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바로 키안의 약혼자가 결정되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각료회의를 통해서 최종 약혼자는 루시로 결정되었다.
우리는 모두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었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아니, 사실 얼마 전부터 이미 루시가 결정됐다고 생각하고 약혼식 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주인공인데 화려하게 해야지.”
시카르의 말에 레이독스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여주인공이요?”
시카르는 아차 싶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레카도르의 왕비면, 레카도르의 여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겠지.”
“싱거우십니다.”
“사돈 될 사이인데 말조심하지.”
레이독스는 놀란 듯 말을 얼버무렸다.
“예에?”
“맞잖아. 사돈.”
시카르의 입에서 사돈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레이독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게 다 내가 레이독스를 만나기 전 교육을 시킨 덕분이었다.
“오늘은 후작님께 실수하면 안 돼. 앞으로 후작님은 우리의 사돈이 되실 분이라는 걸 명심해야 해.”
물론 시카르는 레이독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내가 노려보자 한숨을 쉬며 그러겠노라 약속한 상태였다.
그래서 시카르는 레이독스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자꾸만, 자기 잘했냐는 듯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줘야 했다.
서연은 레이독스의 귀에 들리지 않게 내게 낮게 속삭였다.
“공작부인께서는 전하의 약혼식을 어떻게 진행하실 생각이에요?”
물론 원작대로 하면 좋겠지. 하지만 나는 키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게 더 중요한 문제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솔직한 내 생각을 알렸다.
“전하의 결혼식은 왕궁에서밖에 할 수 없겠죠. 하지만, 약혼식만큼은 설산에서 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저는 설산에서 했으면 해요. 공주님께서 아드님의 약혼식을 보셨으면 하거든요.”
예상한 대로 레이독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불가합니다. 유례에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