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약혼식 (2)
(147/197)
147화. 약혼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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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약혼식 (2)
2022.10.27.
레이독스의 우려도 이해가 됐다. 내가 이곳 레카도르의 역사를 잘 모른다고 해도 지금까지 약혼식을 궁 밖에서 진행한 왕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시카르 마저도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 내가 꽤 파격적인 발언을 한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는 내 기분이 상하는 게 신경 쓰였는지 조심스럽게 나를 달래듯 말했다.
“부인. 이 문제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키안에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거든.”
레이독스도 시카르의 말에 찬성했다.
“제 생각도 공작님과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한낱 필부와는 다른 존재이십니다. 약혼식을 설산에서 올리는 게 귀족들에게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일인지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어떨까요.”
“네?”
“왕이 돌아가신 친부를 그리워하며 친부가 묻힌 곳에서 약혼식을 올리게 된다면 귀족들은 왕이 공사를 구분 못 한다고 하겠죠. 하지만 백성들은 왕의 효심을 보겠죠. 왕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을 받을 수도 있고요.”
물론 그런 이유로 약혼식을 설산에서 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키안의 마음속에 늘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발리제 때문이었다.
키안은 평생을 발리제를 그리워할뿐더러 자신의 결혼식을 보지 못하는 제 아버지를 뼈가 사무치듯 그리워했었다. 이번 루시와 키안의 약혼식에도 그럴 것이다.
약혼식은 키안에게 매우 경사스럽고 기쁜 날이다. 그만큼 키안에게는 뼈가 사무치게 발리제가 그립고 아픈 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약혼식만이라도 발리제가 있는 곳에서 한다면 이들의 아픔을 조금은 달래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베로니아 공주를 자연스럽게 키안의 약혼식에 초대할 수 있으니 더 좋을 테고 말이다.
서연은 그런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었다.
“공작부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재상이라는 직책에 어깨가 무거운 레이독스는 백성보다도 귀족들에게 보일 키안의 모습이 더 신경 쓰이는 듯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귀족 중에는 발리제 타히곤 님의 죽음에 관련된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길리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엮인 자들이지만 분명 저들을 저격하고 있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래 그럴 수 있겠지.
“그 문제는 레이독스 님이 직접 해결해주세요.”
“네? 제가 어떻게…….”
“그들에게 확고히 말하고 충성맹세를 받아내세요. 그리고 앞으로 전하를 지켜줄 것을 확답해주세요. 레이독스 님께서 확신을 주신다면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시카르의 말은 믿지 않을 테지만, 강직한 레이독스의 말은 무조건 믿을 것이다. 시카르가 레이독스를 재상의 자리에 앉힌 것도 모두 그의 이런 강직함 때문이었다.
귀족들이 시카르를 따르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라면, 레이독스를 따르는 이유는 신뢰 때문이었으니까. 그래서 이 일은 레이독스의 힘이 필요했다.
레이독스는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내 말을 따랐다.
“알겠습니다. 공작부인.”
난 이곳에 와서 왕모로서 한 번도 내 목소리를 낸 일이 없었다.
왕이 왕모의 치마폭에 있다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단 한 번도 개입한 적이 없었지만 키안을 위하는 이런 일에서만큼은 나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시카르의 말처럼 이 레카도르에서 가장 막대한 권력을 지닌 자가 있다면, 지금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한 번만은 나의 그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키안의 약혼식을 설산에서 치르게 하고 싶었다.
내가 이번 일에 매우 확고한 모습을 보이자, 시카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번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각료회의에서 의견을 모으도록 하지. 설산에서 약혼식을 치를 수 있게 말이지.”
“먼저 전하께 여쭙고 결정하겠습니다.”
예상대로 키안은 내 의견을 전적으로 따라주었을 뿐 아니라, 내 판단에 매우 감동해서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내 볼에 입을 맞추어왔다.
“어머니께서 제 약혼식을 설산에서 진행하자고 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어요. 감사해요. 어머니.”
그리고 며칠 후, 결국 각료회의에서 약혼식은 설산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
한여름이 다가왔지만, 우리는 설산에 가기 위해 두터운 외투를 챙겨야 했다.
미리 이 소식을 베로니아 공주에게 전했지만, 공주님께서는 반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고 한다.
공주는 키안이 효심이 깊은 왕보다는 조금 더 냉정한 군주가 되길 바라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설산에 가는 것이라 그런지 키안의 표정이 오늘따라 유독 밝아 보였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맞은 편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시카르는 키안을 향해 입꼬리 한쪽을 올리고 있었다.
“좋겠지. 오늘이 약혼식이니까.”
키안은 버럭 하듯 몸을 들었다가 나를 한 번 보고는 차분하게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버지.”
시카르는 안 믿는 눈치였지만, 키안은 그가 안 믿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정말이에요. 어머니. 전 그저 오랜만에 설산에 가는 게 좋을 뿐이에요.”
내게 마음을 들키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구나. 어쨌든 겸사겸사 좋은 거겠지.
“저도 오랜만에 설산에 가게 돼서 좋아요. 베로니아 공주님이 잘 지내시는지도 궁금하고요.”
베로니아 공주의 말이 나오자 키안의 안색이 다시 굳어졌다.
그때 풀긴 했어도 그렇게 한 번에 다 풀 수 있는 건 아니니, 아직은 많이 어색해서 그런 거겠지.
나는 내 손을 붙잡고 있는 키안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키안은 왜 그러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전하. 만에 하나. 아니, 공주님께서 여전히 무뚝뚝하셔도 전하께서 이해해주세요.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공주님께서는 왕실에서 외롭게 자라서 전하와는 생각이 많이 다를 수가 있다고요. 전하께서 공주님을 이해해 줘야 해요. 전하마저 공주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공주님은 정말 외로우실 거예요.”
뾰로통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키안은 그러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한 약속이니 지킬 것이다.
설산으로 가까워져 갈수록 점점 마차 안의 온도도 식어 내려갔다.
키안은 그동안 시카르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기에 시카르와 나는 서로 쉬쉬거리며 키안의 몸 위로 외투를 덮어 주었다.
키안이 와도 베로니아가 반겨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성격상 키안이 유약한 왕이 되는 걸 싫어할 테니 더욱 냉대할지도 모른다.
내가 한숨을 깊게 내리쉬자 시카르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미리 너무 걱정 하지 마.”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성격이라 설산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 걱정이었다.
***
설산에는 이미 먼저 온 작업자들이 약혼식 준비를 모두 끝난 상태였다.
예상한 대로 베로니아는 두툼한 외투를 걸쳐 입고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아니, 맞이했다기보다는 ‘우리 집에 왜 왔니’라고 말하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왔다.
“공주 저하를 뵙습니다.”
베로니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분명 설산에서 약혼식을 치르는 것을 윤허하지 않았는데도 기어이 이곳에서 하는구나. 안 그래 보이더니 고집이 세군.”
윤허를 안 했나? 시카르가 말하지 않아서 나는 몰랐다.
힐끗 시카르를 쳐다보니 모른 척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카르도 키안을 위해서 이곳에서 약혼식을 치르게 할 작정이었군. 엉큼하게도 내게는 말도 안 하고 말이지.
나는 베로니아를 향해 나직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저하.”
“되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할 수 없지. 그래도 발리제는 좋아하겠군.”
발리제가 좋아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은 베로니아가 완전히 싫어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었기에 나는 시카르를 보며 됐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키안도 시카르도 모두 나를 따라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새, 곧이어 마차 안에서 오늘의 여주인공 루시가 내렸다. 두툼한 외투를 차려입고 걸어오는 루시는 겨울 요정처럼 사랑스러웠다.
“루시.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 아니에요. 전 아주 편안히 왔답니다. 공작부인.”
루시가 지금은 차분하게 말을 하고 있어도 얼마나 왈가닥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루시가 더욱 귀여워 보였다.
뒤를 따라온 서연은 나를 향해 모든 게 순조로웠다는 듯 손을 동그랗게 말아서 사인을 보내주었다.
대륙에서 가장 춥다고 하는 설산의 야외에서 열리는 약혼식이었기에 너무 추우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웬걸. 모두 두툼한 외투를 입고 진행하는 약혼식이라 그런지 나름의 이색적인 풍경이 인상적이어서 추위도 잊게 되었다.
케이크가 꽁꽁 얼어버리는 탓에 약혼식에서 흔하게 하는 케이크 자르기는 엄두도 낼 수가 없었고, 시원한 음료는커녕 모두 손에 뜨거운 뱅쇼(뜨거운 포도주)를 들고 있었다.
속이 뜨끈뜨끈해지는 뱅쇼를 마시며 약혼식을 보는 묘미가 매우 색달랐다. 격식에 얽매이면서도 얽매이지 않는 듯 자유분방한 느낌이었다.
약혼식의 진행은 듀리온이 맡았고 축사는 따로 없었다.
키안과 루시는 케이크 자르기를 따로 하진 않았지만, 장갑을 벗고 서로의 손에 약혼반지를 끼워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시카르는 손에 든 뱅쇼를 한 번에 들이키며 말했다.
“키안은 좋겠군.”
“응? 뭐가?”
“열 살에 제 짝을 만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나도 열 살에 너를 만났더라면 네가 그런 악몽을 꾸지 않았을 텐데.”
“음…… 근데 시카르. 내가 열 살이었을 때 넌 다섯 살이었어.”
너무 정곡을 찌른 걸까. 시카르는 입을 쩍 벌리며 나를 보다가 말했다.
“내가 다섯 살이어도 널 지킬 힘은 있었겠지.”
진지하게 말하는 시카르가 귀여워서 나는 조금 웃었다.
이제 루시의 머리 위로 티아라를 올리는 일만 남았다. 각료회의에서 모두 내가 해야 한다고 외쳤다고 했지만, 이는 아마 시카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한 소리일 것이다.
나는 이미 그 일을 서신을 통해 베로니아에게 부탁한 상태였다.
곧 베로니아가 루시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루시의 경직된 자세를 보니 베로니아의 위엄에 꽤 많이 긴장한 듯 보였다.
목청이 큰 듀리온은 사회를 이어나갔다.
“마지막으로 왕실의 안주인이 되실 유카나다르 루시 영애님께 공주 저하께서 티아라를 씌워 주시겠습니다.”
루시가 머리를 아래로 살짝 숙이자 베로니아 공주가 루시의 머리 위로 티아라를 씌워 주었다.
티아라를 머리에 쓴 루시가 하객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모두 새 왕비의 탄생을 축하하듯 한뜻으로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드디어 루시가 키안의 약혼자가 되었구나.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분위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눈물이 조금 흘러 내렸다. 서연을 보자 그녀도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시카르는 말없이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이제 키안이 약혼자도 맞이했으니 우리 이제 키안을 다 키운 것 같아. 그동안 수고했어. 부인.”
“그렇게 말하니까 키안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 같잖아.”
“이제 보내줘야지. 약혼식도 치렀으니까.”
나는 그 말이 더 슬퍼서 더 눈물이 났고 시카르는 당황해서 외투로 나를 감싸 안았다.
아무도 내가 우는 것을 볼 수 없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