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약혼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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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약혼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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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약혼식 (3)
2022.10.31.
약혼식을 흔히들 야외에서 한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이색적인 약혼식이 있을 수 있을까.
식이 끝난 후 식사를 하기 위해 앉은 테이블 아래는 눈으로 가득한 눈밭이었다.
난민처럼 장갑을 끼고 두터운 고기를 포크로 집어 먹고 있으니 겨울 캠프라도 온 기분에 날은 추워서 코끝이 시려도 마음은 안온했다.
나뿐 아니라 키안과 쌍둥이들도 이색적이라고 느꼈는지 밝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루시는 이런 와중에도 우아하게 고기를 포크로 집어 먹고 있었고 키안도 차분히 식사 중이었다. 두 주인공의 품위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반면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고기를 집어 먹고 있는 루이드의 모습은 너무나 귀여웠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우아한 건 베로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뱅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볼이 살짝 붉어진 베로니아는 뱅쇼를 한 모음 마시고 내려놓으며 루시를 향해 말했다.
“루시 소후작. 국왕과 나이가 같다고?”
“네. 그러합니다, 저하.”
“너무 이른 나이에 약혼을 하게 돼서 많이 혼란스럽겠군.”
“아닙니다. 저하. 국혼은 신의 뜻이기에 저는 그저 신의 뜻을 따라갈 뿐이옵니다. 그래서 전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루시는 베로니아 앞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 또박또박 대답하고 있었지만, 나는 보았다. 긴장한 루시가 손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는 것을.
“소후작을 빈으로 결정할 때 각료들이 모두 만장일치 하였다더니, 과연 영민하구나.”
“송구합니다. 저하.”
베로니아는 루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가 저렇게 피식 웃었다는 것은 루시는 완전히 합격이라는 뜻이었다.
루시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키안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루시가 베로니아에게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은지 은근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면 루이드는 그런 루시가 가증스럽다는 듯 입을 쩍 벌리다가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거렸다.
루시와 몇 번 얘기를 더 주고받은 베로니아는 내게 대화를 요청해와서 나는 그녀와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키안의 친모이기도 하고 유일한 공주이기도 해서 그녀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역시나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저하.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베로니아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상자 하나를 꺼내 놓았다.
상자 속 내용이 궁금했지만, 감히 공주가 꺼내 놓은 상자를 함부로 열어볼 수가 없었기에 나는 이게 무엇이냐는 듯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공주는 곧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것은 키안이 아기 때 쓰던 속싸개다.”
키안이 아기 때 쓰던 속싸개라니…….
베로니아는 너무나 애틋하다는 눈빛으로 상자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만든 것은 아니고 발리제가 만든 것이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 남편은 손재주가 제법 좋았다.”
“그러셨군요.”
“소실된 줄 알았는데 남편이 잘 보관해놨더군.”
“다행입니다. 저하.”
“이것을 네게 주겠다. 앞으로는 네가 잘 보관했다가 훗날 국왕이 아버지가 되거든 그때 전해주거라.”
나는 베로니아의 마음에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저하. 무슨 연유로 이것을 제게 주시는 것입니까.”
“무슨 연유긴. 네가 국왕의 어미니 주는 것이지. 잔말 말고 받거라.”
키안이 어릴 때 했다던 싸개가 너무 궁금했지만, 내가 냉큼 받아서 될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제게 내리는 선물로는 너무나 황공한 물건이라 감히 제가 받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건 저하께서 직접 주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키안의 약혼식을 이곳에서 치르자고 한 게 너였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넌 우리 모자를 위해 크게 마음을 썼더구나. 그래서 나도 너와 국왕 모자를 위해 마음을 한 번 쓰는 것이니 받아라. 반드시 잘 간직했다가 네가 주어라. 알겠느냐?”
“하, 하지만 이 귀한 물건을…….”
“너니까 받을 자격이 있다. 또 거절하는 것은 무례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공주께서 내리는 선물을 계속 거절한다면 그것도 거만이기에 베로니아의 말대로 나는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제게는 너무 과분한 선물이지만 저하의 뜻이니 그럼 마다않고 받겠습니다.”
“국왕이 아주 기뻐하겠구나.”
“저하. 송구하지만, 한 가지 청이 있는데 감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청은 항상 국왕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이번엔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것이냐.”
“전하의 결혼식 날 대신전에 축복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혹여 그날 같이 가주실 수 있으실까 합니다.”
베로니아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그런 부탁을 할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송구합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 청을 들어줄 마음도 이미 있다는 거겠지.”
“저하…….”
너무나 감격스러운 말이었기에 너무 기뻐서 목구멍까지 뜨거워질 만큼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감격하는 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대신전까지는 베로니아가 같이 갈 필요가 없었다. 그것도 의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베로니아가 키안과 조금 더 시간을 같이 보냈으면 했다. 내가 아무리 잘해준다고 해도 친모에게서 느끼는 감정의 풍요는 또 다를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빌미만 생기면 베로니아가 키안과 함께할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기에 대신전도 함께 가달라고 청을 넣으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미 베로니아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내가 두 사람 사이를 더 가깝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주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감동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감사드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리 감격해. 왕모가 그렇게 심성이 여려서 어디다 쓰겠느냐. 하긴, 그랬으니 국왕을 입양해서 키웠겠지만.”
“제가 아니었어도 누구라도 전하를 뵈었다면 자식 삼고 싶었을 거예요. 국왕께서는 그 신분을 감추고 보더라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분이시니까요.”
베로니아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내게 동의를 구하는 말인 것 같군. 내게서도 국왕이 사랑스럽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냐.”
이쯤 되니 내가 귀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베로니아는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왕 속을 들킨 거 더 숨길 필요는 없겠지.
나는 베로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실직고하겠습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저하.”
“내가 낳은 자식을 내 입으로 칭찬해주길 바란다니. 왕모가 날 웃기는군.”
그냥 웃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나는 베로니아가 키안을 사랑스럽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이렇게 조금씩 키안에 대해 말하다 보면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친부를 잃은 부재를 친모에게서 느끼게 된다면 키안이 더욱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무례인 줄 알지만, 조금 조르듯 베로니아에게 말했다.
“저하께서 전하를 사랑스러워하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베로니아는 귀찮다는 얼굴로 툭 던지듯 내뱉었다.
“국왕에게 사랑스럽다는 말은 좀 그렇고. 현명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무뚝뚝하게 던진 말이었지만, 그래도 속에서 키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와서 슬며시 미소지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저하.”
욕심 같아서는 베로니아가 키안과 더욱 함께 해 주길 바라고 싶었지만, 적당히 선을 지켜야 했기에 약간의 대화를 더 나눈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장관이 따로 없었다. 키안이 사람들의 추위를 녹여주기 위해 불 정령을 이끌어 이 설산의 눈 위에서 불을 피워내고 있었다.
온통 하얀 눈이 깔린 설산 위에 나무도 없이 활활 타오르는 커다란 불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몸을 녹이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시카르도 거기에 끼어서 같이 몸을 녹이며 코까지 훌쩍이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슬쩍 베로니아를 쳐다보니 그녀는 슬픈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왜 그러지?
“저하……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발리제도 이 하얀 설산에서 불길을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었지.”
베로니아는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침울했다. 발리제가 떠올라서 울컥한 모양이었다.
하긴, 나는 이런 걸 처음 보지만 공주는 숱하게 봤겠지.
내가 베로니아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죽은 남편을 붙들고 살고 있을 정도이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애타고 아련할지는 약간은 짐작이 갔다.
우리는 키안이 불러낸 불덩이 앞에서 몸을 조금 녹인 후 약혼식을 마치고 하산을 준비했다.
키안도 역시 아직은 서먹한 얼굴로 베로니아를 향해 인사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서먹하긴 베로니아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을 기약하지.”
나는 혹시나 베로니아가 키안을 보듬어 줄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를 하며 가슴을 졸이며 보고 있었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시선을 떨어트리려니 시카르가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저건 네가 기대하던 장면인 것 같군.”
응?
고개를 들어보니 베로니아가 키안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뭐지.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려는 건가.
나는 침까지 꼴깍 삼키며 조마조마한 눈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시카르는 나를 진정시키듯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네가 더 긴장한 것 같군.”
나는 시카르에게 말대답을 할 시간도 없었다.
제발 베로니아의 손길이 키안의 몸에 닿기를 바라며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베로니아의 손길은 키안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키안도 놀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베로니아가 손을 올린 제 어깨를 쳐다보았다.
“얼마 전에 푸른 해가 떴더군.”
키안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리고 내 동공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푸른 해가 떴을 때 베로니아도 봤을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도 봤구나. 그녀도 봤어!
나는 감동한 눈으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카르도 만족스럽다는 듯 날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전설이 되는 것을 본 베로니아는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하지만 별 표현이 없는 그녀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난 네가 더욱 훌륭한 왕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백성들은 나보다 더욱 큰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다.”
키안도 울컥했는지 눈물을 참는 듯 기침을 한 번 하고 대답했다.
“크흠. 예상하고 있습니다.”
“푸른 해가 떴다고 자만하지 말거라. 그 때문에 국왕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는 더욱 클 것이니라.”
“그 또한 짐작하는 바입니다.”
“네가…….”
베로니아는 한 번 헛기침을 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자랑스럽구나.”
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얼핏 키안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슬쩍 고인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