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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사라지는 사람들 (1) (149/197)


149화. 사라지는 사람들 (1)
2022.11.03.


약혼식이 끝나면 왕궁에 있는 하노스의 제단에서 기도를 드려야 했다.

그래서 레이독스의 가족은 유카나다르로 곧장 가지 못하고 레카도르로 가야 했다.

서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루시의 마음이 조금 궁금하기도 했기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루시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루시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참으로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은근슬쩍 서연을 화두로 말을 꺼냈다.


“루시. 서연 님과 내 눈 색깔이 같아서 놀라진 않았니?”

“아. 공작부인. 네. 사실 처음엔 조금 놀랐어요. 그런데 유모가 공작부인과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해서 납득이 갔지요.”

“그랬구나. 처음엔 검은 눈의 사람을 보고 많이 놀랐겠구나.”

“네. 갈색 눈은 보았지만 검은 눈동자는 처음이었으니까요.”

“고향 사람이라서 그런지 서연 님에게는 정말 친근감이 많이 들더구나. 루시, 네가 보기에 서연 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물어봐도 될까.”

루시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물론이지. 그래 주면 나야 너무 고마운 일인걸.”

루시는 매우 중요한 비밀이라도 흘리듯 내게 속삭였다.


“실은…… 아빠가 곧 유모와 결혼할 것 같아요.”

세상에. 눈치도 빨라라.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뗄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해줄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루시는 후작님이 결혼하시는 게 싫은 거야?”

“전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루이드는 유모를 좋아해서 유모가 엄마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곧잘 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유모가 엄마가 되는 상상을 해보곤 했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유모는 내 진짜 엄마는 아니니까.”

루시가 서연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 말이 내게도 하는 말 같아서 마음이 조금 찌릿했다.


“루시 네 말대로 서연 님은 어떻게 해도 널 낳아준 엄마는 되어주지 못할 거야. 나처럼 말이야.”

루시는 자기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듯 짐짓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제가 공작부인 앞에서 너무 눈치 없는 소리를 한 것 같아요.”

“아니야. 솔직한 건 나쁜 게 아니지. 그리고 난 루시가 내게 한 말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

“제 마음을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공작부인.”

“근데, 루시. 네게 이것만은 꼭 말해주고 싶어.”

루시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듯 두 눈을 말똥거렸다.


“너도 알다시피 나도 키안의 양모란다. 내가 비록 낳지는 않았지만, 국왕을 입양한 후 열 살이 되기 전까지는 매일 함께 잠을 자고 함께했단다. 국왕이 결핍 없이 자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지만, 내 마음이 낳아준 부모 못지않기 때문이라고 난 자부한단다. 서연 님도 나와 같다고 생각하고 말이야.”

말하다 보니 감정이 조금 고조되었다. 내겐 부모가 있어도 부모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를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루시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루시.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사람은 누구와도 친가족이 될 수 있어.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말이지. 루시. 네가 국왕과 약혼했으니 넌 이제 내 가족이란다. 앞으로도 나를 편하게 생각해줬으면 하는구나.”

“공작부인…….”

“그런 의미로 우리 손 잡을까?”

루시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런데 우리 고부 사이 너무 좋은 거 같지 않니?”

루시는 해맑을 정도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공작부인께서 자애로운 분이시니까요. 저 아직도 공작부인께서 주신 숄을 간직하고 있어요.”

엄밀히 따지자면 시어머니에게 받은 첫 선물이란 건데. 아무래도 더 좋은 걸 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예쁜 며느리에게, 그것도 이 세계의 주인공에게 정식으로 선물을 줘야겠지. 어떤 선물을 줘야 좋을지 고민해 봐야겠는데.

하지만 내가 아무리 편하게 해준다고 해도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왕모라고 해도 말이다.


“루시. 언젠가 너도 궁에 들어오겠지. 들어서 아는지 모르겠지만, 궁 생활은 생각보다 더 외로울 수 있단다.”

루시는 어느 정도는 각오는 한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왕후의 숙명이겠죠.”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루시가 너무 기특했지만 조금 서연을 어필해주고 싶었다.


“그럴 땐 친정엄마가 있으면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

루시는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유모가 좋긴 해요.”

서연을 좋아하는구나. 다행이야. 하긴 서연이 아이들에게 지극정성이긴 하겠지.

이 소설을 좋아한 데다 두 주인공을 케어하게 됐으니 얼마나 잘할까.

루시가 절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서연에게 어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기뻐할 그녀를 생각하니 나까지 설레기 시작했다.


“서연 님이 좋긴 하지만 엄마로는 생각 안 해봤다는 거지?”

“네. 아빠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하긴,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기만 할 나이에 부모의 재혼을 생각할 아이는 없겠지.


“후작님께서는 루시의 결정을 존중하고 기다려주실 거야.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네 의견에 따르시겠지. 그러니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마.”

“정말 기다려줄까요?”

“그럼. 그럼. 후작님께는 세상에서 루시와 루이드가 제일 소중하다는 걸 서연 님도 알고 계신걸.”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해서인지 혼란스러워 보이던 루시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감사해요. 공작부인.”

“그나저나 루시가 이렇게까지 성숙해진 줄 몰랐는걸? 이제 숙녀가 다 됐는데?”

루시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공작부인의 과분한 칭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쁘기도 해라.

내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레이독스를 좋아하는 서연의 눈에는 루시가 얼마나 예쁠까.


 

***

아무리 빨리 왔어도 왕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난 후였다.

시각이 아무리 늦었어도 키안과 루시는 제단에 기도를 올리러 가야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제단에 가는 일은 없었겠지만 설산에 다녀오느라 이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늦은 밤중이라 키안이 걱정된 시카르는 비카와 듀리온을 따라 붙였지만, 키안은 불의 정령들을 불러내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이제 안심하세요. 어머니. 아버지.”

루시는 밤길을 아름답게 비추는 불의 정령들을 감탄한 듯 바라보다가 키안과 눈이 마주치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루시는 궁에 들어와도 절대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시카르는 폐궁 재건이 오늘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는 뭐가 급한지 길리언을 곧장 만나러 갔다.

그래도 비카와 듀리온이 곁에 있어서 저녁을 혼자 먹지는 않을 수 있었다.


“듀리온 님. 혹시 길리언과 공작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아시나요?”

허겁지겁 밥을 먹던 듀리온은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급하게 고기를 삼키며 말했다.


“그, 글쎄요?”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비카에 묻기 위해 그녀를 쳐다보는 순간 비카는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마님. 제게 물어도 소용없어요. 알아도 말 못 하니까요. 만약 제가 말하면 공작이 절 가만두겠어요?”

“저한테 말하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일인가요?”

비카는 아차,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민망한 듯 제 턱을 긁적거렸다.


“그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공작 성격에 자기 허락 없이 자신의 일을 말하는 걸 가만두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무슨 일인지 저도 잘 몰라요. 물론 알아도 말 안 하겠지만.”

다들 모르는 것을 보면 별일이 아닌가 싶다가도 폐궁 재건이 끝났단 소리에 이 시간에도 저렇게 길리언을 만나러 간 것을 보면 별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녁을 먹는 내내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 건지. 오늘은 오면 기필코 물어야겠는데.

***

시카르는 길리언을 감옥에서 꺼내 폐궁 앞으로 데려왔다.

폐궁은 길리언과 시카르가 몰아냈던 폐왕이 별궁으로 쓰던 궁이었기도 하고, 그들이 합심해 폐왕을 잡아들였던 궁이기도 했다.

화염에 휩싸여 검게 그을렸던 폐궁이 지금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 빛을 내고 있었다.

길리언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폐궁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리의 거사가 치러졌던 곳을 다시 찾게 되다니 반갑군.”

“실컷 반가워해라. 네가 죽을 무덤이 될지도 모르니까.”

“네놈이 아무리 그렇게 비꼬아도 나는 이곳에서 잘 먹고 잘살 생각이다.”

“그러는 게 좋겠지. 이곳에서 네놈을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게 할 테니까. 앞으로는 이곳이 네놈의 감옥이 될 거라는 말이지.”

길리언은 상관이 없었다. 이미 그는 권력을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다면 잘 먹고 잘살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폐왕을 피해 황무지에서 썩은 풀들을 먹으며 살기 위해 버텼던 나다. 그런 내게 이런 호화스러운 생활은 바라고 바라던 바일 뿐이지.”

“그럼 이제 말해라. 검은 눈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조건이 무언지. 네가 알아낸 것이 무언지. 이제 말할 시간이다.”

길리언은 비릿하게 웃으며 궁 안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검은 눈의 사람들은 말이지.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았나?”

시카르도 길리언을 따라 궁 안을 향해 발길을 옮겨갔다.


“이상하다니?”

“마치 이 세계를 훤히 내다보고 있는 것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냐는 말이지.”

“어떤 면에서?”

길리언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복도를 내부 홀까지 묵묵히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 장식이 예쁘군. 폐궁이라도 여러모로 신경 쓴 흔적들이 보이는군. 마음에 들어.”

“딴소리 말고 하던 얘기나 계속해라.”

하지만 길리언은 계속 딴소리를 해댔다.


“이런 복도를 갖길 원했지. 인간이라면 이렇게 화려한 것들을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벽에 걸린 등잔과 샹들리에도 내가 딱 원하던 거군. 이곳은 별궁치고는 꽤 크단 말이지.”

“길리언.”

시카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딴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말을 하라는 뜻과도 같았다.

길리언은 재미있다는 듯 궁 안을 계속 훑어보았다.


“화려한 궁과 사용인들. 모두 딱 내가 원하는 대로 다 갖추어졌군.”

“그래. 네가 원하는 모두 준비했다. 그러니 어서 말해. 검은 눈의 인간들이 사라지는 조건이 뭐지?”

“바로 이거야. 내가 원하는 거.”

“개소리는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길리언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다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것이 이루어진 이 순간. 나는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즐기고 있지. 하지만 그들은 그런 순간이 오면 사라지더군.”

시카르는 길리언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 목표하는 것을 이루게 되었을 때. 그 순간이 오면 그들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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