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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사라지는 사람들 (2) (150/197)


150화. 사라지는 사람들 (2)
2022.11.07.


시카르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다시!”

길리언은 피곤한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가서 좀 앉지. 한동안 지하 감옥의 그 좁은 공간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군. 너희들은 너무 비인간적이었어. 내게 산책도 한 번 시켜주지 않았지. 그 좁은 공간에 있다 보면 사람이 딱 돌 거 같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돌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네가 해 준 약속 때문이었지.”

길리언은 홀에 있는 푹신한 소파에 앉으며 등을 기대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똑바로 말하라.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사라진다는 말이 뭔지 똑바로 말하란 말이야!”

“내가 원하던 왕좌를 차지했을 때 말이야. 내 원을 이뤘을 때. 그 희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 근데 그들은 사라지더란 말이지. 정말 웃기지 않은가.”

“근거는?”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했지. 옷차림이 이상했고 말도 이상하게 했지. 그리고 내가 누군지도 알고 있더란 말이지. 나는 내 눈에 띈 검은 눈의 인간들은 모두 잡아들여 그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 내가 갇혀 있던 곳보다도 어둡고 탁하고,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감옥에 가두었지. 알다시피 사람은 최악의 조건에서는 희망도 낮아지는 법이지. 그들의 공통적인 희망은 아주 간단했다. 바로 그곳을 나가는 것이었지. 그들이 원하는 건 딱 그거 하나였단 말이지.”

“그걸 보려고 가둔 건가?”

“처음엔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가두었지. 생긴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의심스러우니까. 처음 잡아들인 인간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내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더군. 결국엔 이곳을 너무 나가고 싶었던지 키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곳에 키안은 없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레이독스 놈을 예의주시하라고 하더군. 하지만 그놈도 뭐가 없었지. 그러다 네가 결혼한다고 했더군? 그때까지만 해도 네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네가 검은 눈의 여인과 결혼할지 몰랐으니까.”

시카르는 피로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논점 흐리지 말고 검은 눈의 사람들이 사라진 이유나 말해.”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군. 어쨌든 처음 잡아들인 인간은 늘 말했지. 자기를 풀어달라고 말이야. 하지만 쉽게 풀어줄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꽤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가 풀어주었지. 그런데 풀어 주자마자 사라졌다. 마치 순간 이동하듯이.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 하지만, 두 번째 잡아들인 인간도 놓아줬을 때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줬을 때 사라진다고. 그래서 세 번째 인간을 잡아들였을 때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사를 제공 했었지. 그랬더니 제대로 된 식사 한 끼를 제공 받는 게 소원이라고 해서 줬더니 사라지더군.”

길리언은 웃으며 말을 했지만 시카르는 웃을 수가 없었다. 길리언의 기억을 볼 수가 없으니 그것이 사실인지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

“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으면 너도 해봐. 네 아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면 되잖아?”

내 아내가 원하는 것…….

시카르는 유라가 원하는 것을 곰곰이 떠올렸다. 유라는…….

시카르가 막 유라가 소망하는 것을 떠올리려던 찰나, 길리언의 마치 시카르의 생각을 읽어내듯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저주겠지. 네 아내가 널 정말 사랑하고 있다면 네 저주가 풀리는 것을 소망하고 있겠지. 키안도 찾았으니 네 저주부터 풀어봐. 네 아내가 사라지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후훗. 그거 정말 재미있는데?”

길리언은 이를 빠드득 가는 시카르를 보며 통쾌하다는 듯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 몰골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입이 어찌나 근질거리던지. 하지만, 이 궁을 먼저 완성 시켜야 했기에 꾹 참았지. 오늘이라도 그런 표정을 보니 꾹 참은 보람이 있군. 푸하하하. 저주는 풀지 않으면 언젠간 네가 죽고, 네 저주를 풀게 되면 네 아내는 사라지겠지. 네놈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아주 기대가 되는군.”

“닥쳐라.”

이미 길리언의 귓가에 시카르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제 배를 잡고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낄낄. 내가 아는 너는 가족이라면 꼼짝도 못 하는 놈이지. 넌 아마 죽음을 택하고 네 아내를 붙들고 있겠지. 네가 입양한 키안을 위해서라도 그런 방법을 택하고도 남을 놈이니까. 낄낄. 네가 죽고 나면 혼자된 네 아내가 얼마나 잘 사는지 내가 지켜봐 주지. 나는 이곳에서 그날이 오길 기다리며 살고 있겠다. 내 인생 최고의 구경거리가 될 것 같거든.”

시카르의 귓가에도 길리언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저주를 풀게 되면 유라가 사라진다…….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길리언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려고 해도, 그럼 그동안 그가 봤다던 검은 눈의 사람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는 증명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또, 길리언은 야비한 놈이긴 해도 헛소리를 하는 놈은 아니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사실을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카르는 아직도 낄낄거리고 있는 길리언을 향해 낮게 말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이곳을 정말 네 감옥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어둡고 비좁고 숨 막히는 감옥으로 말이다.”

길리언은 낄낄거리던 웃음을 뚝 멈추었다.


 

***

시카르가 데이지 궁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유라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라가 자신에게 길리언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볼 게 훤했던 시카르는 당장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몰라 비카를 시켜 유라를 잠재웠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심각해?”

“네가 알 바 아니다. 비카.”

“나도 뭐 공작의 일에 크게 관심 없어. 나한테 피해 주는 것만 아니면 내 알 바 아니니까.”

“네놈이 좋은 놈인 이유가 날 귀찮게 하지 않아서지.”

“그딴 칭찬 필요 없고 맹약을 언제 해지할지나 말해.”

맹약을 해지하지 않으면 비카는 죽는다. 맹약을 맺은 순간부터 두 사람의 운명을 같이 하기 때문에 이대로 있다간 비카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어차피 맹약을 해지해줄 생각이긴 했지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그러지. 이제 그만 파기하도록 하지.”

투덜거리며 구시렁거리던 비카의 눈이 커졌다. 시카르를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맹약을 해지해달라고 말하던 비카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입버릇처럼 말했을 뿐이었는데 시카르로부터 곧장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비카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흘겼다.


“파기라고? 그럼 저주가 풀리기 전에 계약을 소멸시켜 주겠다는 소리야? 그렇게 순순히 대답하니까 더 의심스럽잖아. 내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 아니야?”

“아니다. 정말 파기해주도록 하지.”

“갑자기 왜?”

“내가 언제까지고 너를 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말은 바로 해. 네가 날 달고 다니는 게 아니라 네가 날 끌고 다닌 거지.”

“파기가 싫으면 내 저주가 풀릴 때까지 기다려줘도 나로서는 나쁘지 않겠지.”

의심스러운 얼굴로 코를 찡그리고 보던 비카는 시카르가 다시 말을 돌리려 하자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 아니야. 파기해줘. 당장!”

“대신 키안이 장성할 때까지는 키안을 지켜라. 그것이 네 자유에 대한 대가다.”

“…… 그걸 자유라고 할 수 있어? 맹약만 파기했다 뿐이지 이전과 다를 게 없는 삶이잖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계약파기는 없던 걸로 하지.”

“아, 아니야. 네 말대로 할게.”

“그럼 키안에게 맹세의 서약을 한 후에 계약은 파기해주도록 하겠다.”

“주도면밀한 놈.”

“너처럼 야비한 사람들이 넘치는 시대에는 주도면밀해야 살아남으니까.”

“계약파기하고 나면 앞으로 나를 네 수족처럼 부려 먹을 생각 마! 알았어?!”

“그러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너의 맹약주니 내 말을 따르도록 해라. 가서 키안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레이독스가 돌아갔는지 아직 있는지도 알아보고 보고하도록.”

보통 때라면 또 자신을 부려 먹는다고 귀찮다고 지겹다고 투덜거렸을 비카였지만, 오늘은 기분이 가뿐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아.”

“레이독스가 아직 궁에 있다면 데이지 궁 정원으로 오라고 일러라.”

“알겠어.”

숲에서는 웬만한 말보다도 빠른 비카는 곧장 숲을 향해 내달렸다.

잠시 후 돌아온 비카는 레이독스가 아직 그의 집무실에 있다고 일렀고 시카르는 외투를 걸치고 정원으로 나갔다.

시카르가 나가 있는 그 자리는 얼마 전 그가 유라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자리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했던 사람. 시카르는 유라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기어코 저를 하대하던 그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저를 무서워하면서도 지지 않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올려다보던 그 모습이 지금 떠올려 보니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 있을 무렵, 레이독스가 걸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길리언에게 들은 이야기는 반드시 레이독스도 알아야 하는 이야기였기에 그를 불러내긴 했지만, 이런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로서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시카르는 먼저 그가 서연을 어디까지, 얼마만큼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런 말 하면 좀 웃기겠다 생각하겠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안 물을 수가 없겠군. 서연을 어떻게 생각하나?”

예상대로 레이독스는 조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정신을 차린 듯 몇 번 눈을 껌뻑이곤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연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거야…… 제 아내로 맞이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반대한다면 그러지 않겠지만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녀가 없어도 괜찮겠느냐?”

“조금 당황스럽군요. 공작님께서는 지금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만큼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니 솔직하라 말하라. 서연이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레이독스는 당황하면서도 시카르의 질문에 고개를 떨구며 진중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이 있으니 살기야 살겠지요. 하지만 그녀가 없다면 전 무척 외로울 것입니다. 매우 슬프기도 할 테고요. 이제는 말씀해 주십시오. 왜 제게 이런 걸 물으시는 겁니까.”

“네 하기에 따라 그녀가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네?”

“앞으로 서연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그녀는 사라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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