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사라지는 사람들 (3)
(151/197)
151화. 사라지는 사람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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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사라지는 사람들 (3)
2022.11.10.
레이독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저는 도저히 공작님의 종잡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서연 님이 갑자기 사라지신다니요?”
시카르는 길리언에게 들은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레이독스에게 전해주었다.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고, 계속 여기 있을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사라진다니. 납득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은 말이었다.
레이독스의 눈동자가 진동하듯 흔들렸다.
“대체 왜…….”
시카르 역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짐작하건대, 그들이 이곳으로 오게 되는 어떤 조건이 성립되듯 이곳을 떠나게 되는 조건이 자신이 소망하던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인 것이다. 길리언의 말에 의하면 아주 간절히 원하는 그 무언가가 포인트라는군. 그건 나도 공감하는 바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녀들의 목적이 달성하지 못하게 해야겠지. 그렇게 해야 이 사태를 막을 수가 있겠지.”
레이독스의 동공은 그저 멍하니 앞을 향해 시선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멍해지고 싶은 것은 시카르도 마찬가지였다.
“서연이 사라지게 하지 않으려면 무슨 짓이든 동원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을 찾아라. 찾아서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도록 해라. 나도 그렇게라도 해서 유라의 증발을 막을 테니까.”
“정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지금으로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
레이독스는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레이독스를 보내고 시카르는 침실로 들어와 잠든 유라를 바라보았다.
유라는 비카가 불러낸 잠의 정령들 덕분에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내가 너 없이 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한 번 가족을 잃은 고통을 평생 동안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견뎌내야 했었다. 두 번은 가족을 잃을 수가 없었다.
또한 키안에게서 친모보다 더 깊은 정을 느끼는 유라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
시카르는 잠든 유라를 끌어안았다. 자신은 저주를 풀지 못하더라도 결코 유라만은 떠나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잠든 유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이상하리만큼 어제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마치 예전에 길리언의 결혼식 때 비카가 잠의 정령으로 억지로 재웠을 때와 유사한 느낌이랄까. 수면 마취당할 때처럼 갑자기 필름이 끊겨 버렸다.
어제 설산까지 다녀오느라 많이 고단했던지 너무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일어나니 시카르는 이미 어각료 회의에 참석하고 없었다.
비카도 듀리온도 모두 일을 나가고 이곳에는 나와 사용인들뿐이었다.
모두 일을 나간 한적하고 조용한 이 시각은 온통 내 세상이었다.
세상 팔자 좋은 돈 많은 백수 신세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렇게 좋은 팔자에도 약간의 리스크가 있긴 했는데 그것은 따분함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서연이 내 시녀가 된 이후로는 따분함이 덜했다. 하지만 오늘은 서연의 휴무일이었기에 나는 키안이 심어준 장미꽃에 물을 주고 있다가 서연이 도착했다는 말에 냉큼 뛰어나갔다.
“서연 님이 오셨다고?!”
내가 경쾌한 걸음으로 몇 걸음 뛰어가자 안드레아는 누가 보면 큰일 난다는 듯 난색을 표했다.
“마님…… 이곳은 공작저가 아니라 궁이라 뛰어다니시면…….”
아차차. 내 정신.
모름지기 키안의 어머니인데,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실수하였다.”
“네. 마님.”
“그래. 서연 님은 어디 계시지?”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저…….”
안드레아는 말을 하다말고 심각한 얼굴로 응접실을 향해 눈치를 살폈다.
“왜 무슨 일인데 표정이 그래.”
“표정이 매우 안 좋아 보이셨습니다.”
“그래? 알았다. 차는 나중에 들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님.”
무슨 일이길래 표정이 안 좋지. 루시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응접실로 들어가니 안드레아의 말처럼 마치 울었던 듯 서연의 두 눈이 빨개져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놀란 눈을 뜨며 서연의 앞으로 가서 앉았다.
“서연 님. 무슨 일이에요. 왜 우신 거예요.”
“공작부인. 이렇게 눈물을 보여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요. 그것보다 왜 이렇게 우시는 거예요.”
서연은 볼 가득 흘러 내려온 눈물을 채 닦지도 못하고 아이처럼 꺽꺽거리며 말했다.
“흑…… 후작님께서…… 흑…….”
레이독스 때문에 우는 거라면 레이독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후, 후작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서연은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물을 삼키기 위해 겨우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후작님께서 결혼을 안 하시겠다고 하셨어요…….”
“뭐, 뭐라고요? 결혼은 안 하겠다고 했다고요?”
서연은 서럽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작님께서 우리 결혼은 무효로 하시겠다고 하셨어요. 물론, 안 해도 돼요. 안 해도 되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말 갑자기 이유나 변명하나 없이 갑자기 결혼을 취소하겠다고…… 흐윽…….”
말하던 와중에도 너무 서러운지 서연의 울음이 멈추질 않고 있었다.
루시 때문인가.
나는 어제 루시와 설산에서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려 보았다.
루시는 아직 엄마가 생기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었다. 그래서 레이독스가 루시 때문에 결혼을 보류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혼을 보류한 거면 보류한다고 말을 해야지, 왜 취소를 한 거지.
이렇든 저렇든 서연이 받은 충격은 꽤 커 보였다.
나는 서연이 좀 진정이 될 때까지 토닥여주는 동안 안드레아가 눈치껏 차를 가져다 놓았다.
안드레아가 가져다준 차는 캐모마일이었다. 안드레아가 참 센스가 있단 말이지.
나는 안드레아에게 귓속말로 살짝, 서연이 지금 데이지 궁에 와 있으니 레이독스를 불러오라고 일렀다.
분위기를 파악한 안드레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안드레아가 나간 후 나는 그녀가 가져온 차를 서연에게 건넸다.
“안드레아가 캐모마일 차를 가져왔어요. 서연 님, 차 좀 드세요. 진정이 좀 될 거예요.”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내가 건네준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지만, 그마저도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서럽겠지. 왜 안 그럴까. 나라도 그렇겠다.
시카르가 내게 갑자기 결혼을 무효로 돌리자고 한다면 꽤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그나마 내겐 내게 무한 사랑을 주는 키안이 있어서 위안이라도 되겠지만, 서연은 아직 루시도 온전히 자신의 편이 아니기에 더욱 서러울 것이다.
서연은 조금 진정이 됐는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애들 때문에 취소시킨 건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저도 결혼이 너무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제가 말씀드렸죠. 전 그냥 아이들의 엄마이고 싶은 게 먼저라고요. 후작님의 가족 중 일부가 되는 게 더 중요했거든요.”
“이런, 서연 님…….”
한창 서연을 달래주고 있는데 안드레아가 갑자기 응접실로 들어왔다. 서연이 너무 서럽게 울고 있던 탓에 나는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안드레아. 무슨 일이지?”
“헤르시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헤르시아 님이? 어서 드시라 해.”
“네. 마님.”
헤르시아가 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서연이 울고 있는데 혼자보단 헤르시아와 둘인 게 더 나으니까.
응접실로 들어온 헤르시아 역시도 서연이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서연 님,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자초지종을 들은 헤르시아는 한숨을 푹 쉬고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사실 저도 아론과 헤어졌어요.”
헤르시아가 아론과 헤어졌다는 말에 서연의 울음이 뚝 그쳤다. 나는 당황했지만, 서연은 마치 동지라도 본 눈으로 물었다.
“헤르시아 님은 왜요?”
“집에서 반대를 좀 했는데, 제가 허락 안 받아도 상관없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론이 글쎄 꼭 허락을 받고 결혼이 하고 싶다잖아요. 내가 괜찮다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죠.”
아…….
그랬다면 이건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요즘 보니까 헤르시아가 툭하면 헤어지자고 하고, 아론은 헤르시아가 입버릇처럼 헤어지자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헤르시아가 헤어지자고 말해도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사랑싸움을 한 모양이었다.
서연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또 금세 다시 만날 테니까.
“헤르시아 님. 아론 님과 잘 푸세요. 아론 님은 좋으신 분이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너무 고지식해요. 말이 안 통해요. 글쎄 저더러 뭐라는 줄 아세요? 아이를 다섯을 낳고 싶다는 거예요! 자기가 무슨 왕족인 줄 안다니까요. 공작부인께서 사주신 그 예쁜 드레스를 올여름에는 꼭 입고 싶었는데…….”
“그만큼 헤르시아 님과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단 뜻이겠죠.”
헤르시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실룩거리다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그런데, 공작부인께도 뭐 하나 여쭈어도 되나요?”
“네. 말씀하세요.”
“공작부인께서는 아이를 몇이나 낳고 싶으세요?”
서연도 정말 궁금하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기에 나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국왕이 있으니까…… 하, 한 명? 정도요?”
헤르시아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한 명이요.”
서연도 마찬가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저희 공감대가 좀 통하는데요?”
헤르시아가 활짝 웃으며 화제를 밝게 이어가 준 덕분에 서연도 어느새 눈물을 그치며 웃기 시작했다.
헤르시아는 서연을 위로해주기 위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서연 님께서 어떻게 들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전 결혼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혼식 화려하게 올리고도 이혼하네 마네 못사는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대단한 결혼식이 아니어도 후작님같이 좋으신 분과 산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때다 싶어 헤르시아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말이 꽤 위로가 됐던 모양인지 서연이 낮게 탄식했다.
“휴.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군요. 저도 정말 결혼에 큰 의미를 둔 건 아니었는데. 근데, 막상 결혼을 못 하겠단 소리를 직접 듣게 되니까 서운하긴 했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제 편이 돼주고 위로해주는 두 분이 계셔서 참 위안이 돼요.”
나도 이 따분한 궁 생활에 이들이 놀러와서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위로해준다고 해도 레이독스의 위로가 가장 큰 위안이 되겠지.
레이독스가 언제 오려나 싶던 찰나 안드레아가 레이독스가 찾아왔다고 일렀다.
서연은 짐짓 놀란 얼굴이었지만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후, 후작님께서 오시다니. 무슨 일로.”
나는 안드레아에게 어서 나가보라는 듯 눈을 찡긋거리며 서연에게 말했다.
“서연 님이 걱정돼서 오셨나 봐요. 어서 나가보세요.”
서연은 민망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그럼 실례지만 전 이만 나가 볼게요. 공작부인.”
“네. 가서 후작님과 대화 잘 나누세요. 서연 님.”
“후작님께서는 눈치도 빠르셔서 곧장 서연 님을 찾으러 오셨군요. 정말 부러워요.”
아닌 게 아니라 헤르시아는 정말 부러운 듯 코까지 벌름거렸다.
서연 더욱 수줍게 미소지으며 나갔다.
서연이 완전히 응접실을 떠나자 헤르시아는 허탈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참. 공작부인. 길리언이 궁으로 옮겨갔다고 들었어요.”
“아. 네. 그렇게 됐어요…….”
“제가 길리언을 한번 만나봐도 될까요?”
지금껏 길리언을 한번 만나보길 권해도 그가 두려워 거절하던 헤르시아였다.
그런 헤르시아가 무슨 일로 갑자기 길리언을 보겠다고 하는 것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헤르시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