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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사라지는 사람들 (4) (152/197)


152화. 사라지는 사람들 (4)
2022.11.14.



“사실 전 길리언을 보고 싶지 않아요. 아직은 두렵기도 하고 밉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왜 길리언을 만나시려는 거예요?”

헤르시아는 뭔가 답답한 듯 대답 전 깊은 한숨부터 내쉬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말은 길리언이 숨겨둔 재산이 있다고 그 돈을 찾아내면 우리 결혼을 허락해주실 거라고 하셨거든요.”

헤르시아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나 서운한 감정 없이 마치 그것이 흔한 일인 듯 아무렇지 않은 일을 얘기하듯 말했다.


“길리언이 쉽게 내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어요.”

헤르시아는 잠시 머뭇거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제가 공작부인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 계셔서,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공작부인께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셨어요. 공작부인께서 길리언을 협박하거나 설득하면 말해줄 거라고요…….”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래서 말인데 공작부인께서 함께 가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물론 못 가줄 이유가 없었던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같이 가요.”

정말 별 기대를 안 했는지 헤르시아는 감격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정말이에요?”

“그럼요. 제가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길리언을 한번 잘 설득해볼게요.”

“공작부인…….”

“아직은 감동하지 말아요. 제가 설득에 실패할 수도 있잖아요.”

“힘든 부탁일 텐데 함께 가주시는 것만도 고마워요.”

사실 그렇게 힘든 부탁은 아니었다. 예전에야 길리언이 무서웠지.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무서울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내 곁에서 말동무가 되어준 헤르시아였기 때문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

길리언의 거처를 폐쇄궁이라고 한다고 한다. 경비가 삼엄하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했다.

오는 길에 세 번이나 검문을 받아야 했다.

세 번째 검문을 받았을 땐 내가 아무리 공작부인이라도 공작의 명령 없이는 폐쇄궁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공작 각하의 엄명이 계셨습니다.”

“그 누구도가 공작부인이라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단 말인가?”

내가 되묻자, 수문장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떼지 못하다가 확신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공작부인을 언급하진 않으셨지만, 분명 ‘누구도’라는 말에는 공작부인도 포함되리라 생각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폐쇄궁에 있는 폐군은 매우 악랄하고 무서운 사람입니다. 공작부인의 안전을 위해서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됩니다.”

나도 그럴 줄 알고 매직 완드를 챙겨온 터였다. 나는 그 매직 완드를 꺼내 들고 보여주었다.


“내게도 무기는 있다. 그리고 매우 잘 다루지.”

나는 히끗 웃으며 수문장의 바로 뒤에 있는 나무를 매직 완드로 맞추었다. 그러자 나무는 번개를 맞은 듯 지지직거리다 둘로 쪼개어졌다. 수문장은 놀란 듯 나무를 보고는 나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이 정도면 증명이 됐는가? 더해야겠는가?”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버티고 서 있자 수문장은 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들여보냈다. 대신 호위를 열 명은 대동하고 나서야 궁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시카르에게 허락을 받거나 그와 같이 올 수도 있었지만, 지금 일하는 그를 불러내서 공작부인 치마폭에 휘둘려 산다는 말을 듣게 하기는 싫었다. 차라리 내가 조금 완강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편이 낫겠지.

폐쇄궁은 그 이름만으로만 본다면, 유폐된 폐군이 폐허가 된 궁에서 외롭고 쓸쓸히 지낼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멀끔했다.

폐궁은 모든 보수를 끝내놓은 신축 건물 같기만 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전체적으로 새 단장을 완벽하게 해둔 상태였다.

헤르시아도 그 점이 못내 씁쓸했는지 조금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길리언은 아주 잘 지내고 있나 보군요.”

이렇게까지 해준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린 데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공작님이시라면 분명 그러시겠죠?”

“그럼요. 그럼 이제 들어가 볼까요?”

“네. 공작부인.”

궁 안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이 우리는 정원에서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던 길리언과 맞닥뜨렸다.

우리를 발견한 길리언은 진귀한 풍경이라도 본다는 듯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누구지? 공작부인과 헤르시아군. 헤르시아. 네 혼자 힘으로 이곳까지 오지 못했겠지. 공작부인과 친하다더니 아주 요긴하게 이용하는군. 공작부인께 이곳에 데려가 달라고 징징거리기라도 한 건가?”

길리언은 비릿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헤르시아는 모욕을 느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뒤에 서 있던 수문장은 앞으로 나서며 길리언을 위협했다.


“폐군! 감히 공작부인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다니! 그 입 닥쳐라!”

길리언이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다고는 해도 수문장의 협박 따위에 눈 하나 깜짝할 인물은 아니었다.


“졸병 따위가 감히 누구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이냐. 공작이 네놈들에게 손 하나 대지 말라고 당부한 게 아니었다면 네놈의 목은 이미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길리언이 회까닥 돌아서 정말 제 목을 댕강 잘라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던 모양인지 수문장은 더는 그를 겁박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문장으로서의 체면은 지켜야 했던 그는 그대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공작부인께 예의를 갖추어라.”

길리언도 더는 수문장에게 뭐라 그러진 않았다. 그는 나를 보며 예의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무엄했다면 죄송하군요. 공작부인.”

나는 당장이라도 매직 완드를 꺼내 들어 길리언의 머리카락을 몽땅 태워 그를 대머리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미소지었다.


“폐군의 말이 맞다. 헤르시아가 네게 부탁할 청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같이 동행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 헤르시아의 청에 더욱 협조했으면 좋겠군.”

길리언은 재미있다는 듯 껄껄거리며 웃었다.


“내 눈도 못 마주치던 공작부인의 위세가 아주 대단해지셨군. 하긴 국왕을 양자로 두고, 왕국의 권세를 쥐고 있다는 공작을 남편으로 두고 있으니 세상 무서울 게 없긴 하겠지. 낄낄낄.”

길리언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낄낄낄 거리며 웃다가 나를 보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리를 꼬았다.


“근데 그렇게 권세 높으신 분을 친구로 둔 헤르시아가 내게 무슨 볼일이지? 무슨 일이 있다면 공작부인께 말해도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 같은데 말이지.”

헤르시아는 내 눈치를 보고 머뭇거리다가 확신한 듯 길리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 어머니께서 오라버니를 찾아뵈라고 보내셨어요…….”

길리언은 겨우 그 말만 듣고도 뭐가 그렇게 웃긴지 낄낄거리며 웃다가 콧방귀를 끼며 손에 든 책을 옆 벤치에 내려놓았다.


“네 어머니는 정말 여전하시군. 내 숨겨둔 재산이라도 찾아오라고 하던가? 아니지. 찾아오라고 했겠지. 아니면 아무 빼먹을 거 없는 내게 널 보낼 이유가 없을 테니까. 안 그래?”

헤르시아는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보다가 내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모으고 있던 두 손을 내려놓으며 조금은 더 대담하게 다가갔다.


“네. 어머니께서는 오라버니께서 숨겨둔 재산이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돌아가신 대공비님께서 주신 재산이 남아 있을 거라고 하셨거든요.”

길리언은 입술을 위로 실룩거리며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맞아. 재산이 있긴 하지. 하지만 그걸 찾는다 한들 나라에서 뺏어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국왕이 그 재산이 이모에게 가도록 내버려 둘까?”

“그 이후의 문제는 재판을 통해서 해결하면 되는 일이라고 하셨어요.”

“재판보다는 곁에 있는 공작부인을 믿고 있는 게 아니고? 공작부인이 모른 척해주면 재판까지 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

헤르시아는 나를 보며 절대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공작부인, 오해 마세요. 그런 것까지 비밀로 해달라고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어차피 우리 재산이 갑자기 불어나면 당연히 감사가 들어올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그런 문제는 재판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하셨거든요.”

헤르시아 성격에 그런 걸 부탁하진 않을 거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어요. 헤르시아. 걱정말아요.”

헤르시아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길리언을 노려보았다.


“오라버니. 공작부인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 주세요.”

“부탁하러 온 주제에 건방지게 요구하는 게 많은 것 같군. 그런 태도라면 나도 네게 아무것도 협조해줄 수가 없다.”

“오라버니!”

“넌 마치 내가 네게 협조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 그런데 생각해봐. 내가 네가 협조해줄 의무가 있는지 말이야. 넌 내게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고, 나도 네게 무엇도 해 줄 의무가 없지.”

헤르시아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말 제게 아무런 도의적 책임도 느끼지 못하시는 건가요?”

“그래.”

“오라버니께서는 저를 하멜 집사에게 팔아넘기려고 하셨어요! 샤린을 이용해 저를 죽이려 하셨고요!”

길리언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 역시도, 왕족의 혈연으로 살아야 하는 네 운명일 뿐이었다.”

헤르시아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그래서 나는 그런 헤르시아를 조심스럽게 부축해주었다.


“헤르시아. 폐군이 뭐라고 하던 신경 쓰지 말아요. 지금 폐군은 헤르시아를 심심풀이로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공작부인이 모르는 소리를 하는 군. 요즘 내 심심풀이 상대는 바로 공작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길리언?”

길리언은 또다시 낄낄거리며 얼굴 한쪽으로 길게 내려오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궁금한가?”

“무슨 소리인지 말해!”

“사실 지금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단 말이지.”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무 속 편하게 지내는 공작부인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리는군.”

“이미 심성이 뒤틀려서 누가 무얼 해도 심사가 뒤틀리지 않겠어?”

“진유라. 넌 공작이 내게 왜 이런 궁을 지어줬다고 생각해?”

물론 나도 그 점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의 일과 관련된 문제라 묻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길리언을 향해 최대한 냉소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관심 없다.”

길리언은 히죽거리듯 웃었다.


“그게 너와 관련된 일이라고 해도 과연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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