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사라지는 사람들 (5) (153/197)


153화. 사라지는 사람들 (5)
2022.11.17.


나와 관련이 있는 얘기라고? 길리언과 내가 관련될 일이 뭐가 있다는 거지?


“똑바로 말해. 그게 무슨 소리야!”

길리언은 헤르시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듣는 귀가 있어서 당장은 힘들겠는데. 헤르시아를 물리면 말해주지.”

“아니, 됐다. 그래봤자 헛소리일 뿐이겠지. 네놈이 뱀 같은 혀를 잘 놀린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안 통해!”

길리언은 그것참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내가 너무 서운한데. 이왕 여기까지 발걸음한 마당에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구경하고 싶으니까.”

길리언은 방정맞게 또 낄낄거리며 웃었다. 시카르에게 당한 괴롭힘을 날 놀리는 데 쓰려고 작정한 듯이.

하지만 나도 시카르와 살면서 정신적으로 맷집이 꽤 세진 편이었다. 겨우 저런 이죽거림에 흔들릴 내가 아니었다.


“네가 계속 그렇게 이죽거린다면 공작님께 일러 이 궁을 부숴버리라고도 할 수 있다.”

길리언이 흠칫하며 곤란한 표정으로 코를 긁적이는 것만 봐도 역시나 시카르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얘기를 듣고 함구해준다고 약속한다면 나도 헤르시아에게 내 숨겨진 재산을 말해주지.”

“입이 아주 근질거리는 모양이군?”

“보다시피 이곳을 나가는 건 불가능하고, 누구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라 어차피 그 돈은 내가 찾아 쓸 수가 없는 돈이 됐지. 하지만 내가 못 쓴다고 해도 아무 보상 없이 남에게 주기는 아까운 돈이기도 하거든.”

“그런 돈을 단순히 입이 근질거려서 주겠다?”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하게 있는 공작부인을 보니 도저히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나를 배신한 공작의 아내가 행복하면 안 되잖아? 낄낄낄."

내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건가? 뭐가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거지?

지금까지는 조소를 띄고 있던 나는 급작스럽게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헤르시아도 뭐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고, 공작부인. 아, 아무래도 이만 가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저 때문에 이런 곤란을 겪게 해드려서 너무 죄송해요. 애초에 제가 이곳에 함께 와달라고 청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죄송해요. 부인.”

“아니. 됐어요. 헤르시아. 전 폐군과 나눌 얘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하, 하지만 길리언이 또 무슨 무례를 범할지도 모르고…… 제가 사람을 불러올까요?”

“아니, 됐어요. 저기 서 있는 호위병들 곁으로 물러나 계세요.”

내 딱딱한 표정을 보고 헤르시아도 범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더는 묻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갔다.

헤르시아가 완전히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길리언은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이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가?”

“진지하게 어디까지 헛소리를 하는지 듣고 싶은 것이지. 먼저 기사로서 맹세하라. 내가 네 놈의 얘기를 들어주면 헤르시아에게 네 숨겨진 재산을 주겠다고 말이야.”

“너도 약속해. 내 얘기를 공작에게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공작부인의 명예를 걸고.”

어차피 내가 말하지 않아도 시카르가 자동으로 알게 될 일이었다. 그건 내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는 일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시카르가 내게 무언가를 숨겨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뭘 숨기고 있는 건지 알려면 길리언의 입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말 안 하겠다고 약속하지. 대신 재산이 있는 곳을 먼저 알려라.”

길리언은 책 뒷장을 뜯어 무언가를 쓰고는 내게 건네주었다.


“재산이 매몰돼 있는 곳은 거기 써두었다. 이제 너도 이곳에 서명하지.”

나는 길리언이 내민 종이를 살펴보았다. 내가 그와 나눈 얘기를 누군가에게 할 경우 국왕의 왕모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각서였다.

나는 주저않고 서명을 해서 종이를 넘겼다. 길리언은 흡족한 듯 종이를 받고는 책 속에 끼워 넣었다.

길리언은 나를 골려주게 돼서 아주 즐겁다는 듯 본격적으로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 꼴을 계속 보고 있기가 역겨웠던 나는 길리언의 정강이라도 걷어 차주고 싶었지만, 어차피 정강이를 걷어찬다고 해도 그가 지닌 신성력으로 보호할 게 뻔해서 그냥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제 본론에 들어가.”

길리언은 배를 잡고 웃다가 눈물까지 닦으며 진정하듯 심호흡을 했다.


“흐음. 난 분명히 경고를 했다. 내 얘기를 들으면 네가 불행해질 거라고 말이지.”

“궁금해서 못 견딜 거라고 던진 말을 경고라고 우긴다면 그렇게 들어주지. 왜 내가 불행해진다는 건지 이제 말해.”

길리언은 내 표정을 남김없이 두루 살피며 구경하겠다는 듯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앞으로 너의 평온한 삶은 산산이 부서지고 두려움에 빠져서 살게 될 테니까. 후후.”

“두려움에 빠져서 살게 돼?”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으로 네 삶은 그렇게 바뀔 것이다.”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알아듣게 설명해.”

“너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바로 네가 간절히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겠지.”

이 자식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하는 걸 보니 나를 놀려 먹으려 작정한 것 같았다.

나중에 시카르가 내 기억을 보고 나면 저를 가만 안 둘 거라는 것을 안다면 저러지 못하겠지.


“나를 놀려 먹는 게 재미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입을 가볍게 놀려대다간 정말 피눈물을 쏟게 될 것이다.”

“피눈물을 과연 누가 쏟게 될지 기대가 되는군. 네가 사라지면 국왕과 공작이 피눈물을 흘리려나?”

“네놈이 자꾸 내가 사라진다는 얼토당토않는 말을 하는데…….”

그 순간, 나는 요즘 시카르가 나만 보면 사라지지 말라고 하는 말이 떠올랐다.

단순히 내가 너무 좋아져 버려서 사라지지 말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건가?

그리고 그 이유엔 길리언이 있고?


“내가 사라진다니? 자세히 설명해.”

길리언은 기다렸다는 듯 벤치에 앉으며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흘겼다.


“이제 좀 관심이 생겼나?”

“말해보라. 내가 왜 사라진다는 거지?”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들을 준비가 됐나?”

“시간 끌지 말고 어서 말해.”

“긴 얘기를 하다 보면 목이 탈 것 같으니 차를 대령해줘.”

길리언이 거만을 떨며 작정하고 나를 부려먹으려 들었다. 나도 놈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칠 준비가 돼 있었기에 그의 건방진 행동을 받아주었다.

호위에게 가서 차를 가져오라고 시킨 후 그들을 대기 시켜놓고 다시 돌아왔다.


“이제 말해.”

“아직 차가 도착하지 않았잖아.”

“가지가지 하는군.”

“이렇게 재미있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쉬워서 그러지.”

나는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를 보며 자꾸만 히죽거리는 길리언이 신경 쓰였다.

호위병이 차를 가져다주고 가자 길리언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따라.”

나는 조용히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그가, 내가 건넨 찻잔을 손으로 받아들려는 그 순간.

그의 머리 위로 천천히 차를 부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앞을 쳐다보고 있는 길리언의 얼굴 위로 찻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행동은 감히 생각지도 못 했을 것이다. 좋은 남편을 둔 덕분에 이런 거친 행동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


“이제 수분 충전을 다 한 것 같으니 그만 말해. 내가 사라진다는 게 무슨 뜻이지?”

길리언은 화가 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자신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불행을 겪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 말해주지. 넌 곧 사라질 것이다. 아니, 언젠간 사라질 것이다.”

“사라진다는 말만 하지 말고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내가 왜 사라진다는 건지!”

“들을 각오가 단단히 돼 있는 것 같으니 말하지.”

그리고 길리언은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봤다고 주장하는 검은 눈동자의 사람들은 내가 아는 한국 사람들이 맞았다. 그가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부분도 처음엔 쉽게 믿을 수가 없었지만, 점점 납득할 수가 있었다.


“이제 알겠나? 네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이곳에서 속 편하게 지냈기 때문이라는 걸. 만약 너도 감옥에 갇혀 지냈다면 오직 탈출만을 꿈꾸었을 테니 진작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후작가의 그 검은 눈의 여인도 마찬가지겠지만.”

생각해보면 이곳에 나만 왔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누구라도 어떤 조건이 성립되면 올 수 있는 곳이고, 어떤 조건이 성립되면 나갈 수도 있는 곳이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더듬어 보았다.

나는 내 삶이 끝장나기를 바라며 살았었다. 그날 차에 치이는 아이는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던 빌미를 제공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서연과 나와 같은 이유일까. 그녀의 생각을 알아봐야 했다.

내 표정이 심각하다고 느꼈는지 길리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앞으로 불안과 고통 속에서 평안해지길. 낄낄.”

길리언이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얼굴이 밉지 않아 보였다. 아니, 그가 가련해 보였다.

이제 곧 시카르가 이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나는 이제 이쯤에서 길리언이 모르는 사실 하나를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그는 이 자유를 모두 잃게 될 테니, 어디서 남발할 데도 없겠지.

나는 지금껏 그가 나를 보고 비릿하게 웃은 것처럼 그를 향해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길리언. 네놈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내가 뭘 알든 모르든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아니, 네놈이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야. 나도 앞으로 네놈이 불안과 고통 속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는군.”

길리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을 깨고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건가?”

“검은 눈의 사람들이 네게 공작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은 것 같구나. 그러니 네가 나와 이런 약속을 했겠지. 너와 공작이 한 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공작으로 부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네가 말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공작에게는 남다른 재주가 하나 있지. 그건 바로 타인의 기억을 보는 능력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을 하든 안 하든 공작은 내 기억을 보게 될 것이고, 네가 내게 했던 말들을 모두 다 알게 될 것이라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긴장한 듯 길리언의 볼이 실룩거렸다.


“무슨 소리야!”

“공작이 곧 내 기억을 통해 네가 그 사실을 발설했다는 걸 알게 될 거란 말이지. 공작이 내게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 같으니, 네가 조금 전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겠다. 이제 네 평온한 삶은 산산이 부서지고 두려움에 빠져서 살게 될 것이다.”

길리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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