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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사라지는 사람들 (6) (154/197)


154화. 사라지는 사람들 (6)
2022.11.21.


나는 좌절한 듯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는 길리언을 향해 비웃음을 한 번 날려준 후 호위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 나왔다.

수문장은 걱정되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공작부인.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다. 이만 이곳을 나가야겠으니 마차를 대령해라.”

“알겠습니다. 공작부인.”

매우 걱정이 된다는 듯 나를 보고 있는 헤르시아에게 길리언에게서 받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폐군이 제 재산을 매몰해둔 곳이라는군요.”

“가, 감사해요. 그런데 공작부인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서 걱정이에요.”

“전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사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표정을 아무리 바꾸려 해도 길리언에게서 들은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이 얘기를 서연에게도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었다. 길리언의 말처럼 아는 순간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할 테니까.

그동안 시카르가 내게 자꾸만 사라지지 말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간절했던 마음이 다가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두려움에만 빠지기보단, 이제부터는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되는 조건과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헤르시아는 돌아가면서도 내 표정이 좋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다.


“공작부인 길리언이 뭐라고 심한 말을 한 건 아니죠?”

“별말 아니었어요. 갑자기 배가 좀 아파서 그런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아요. 헤르시아.”

“저 때문에 그런 거죠? 저 때문에 배가 아프신 거 아니에요?”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헤르시아를 보며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헤르시아가 아니었다면 길리언을 찾아갈 일도 없었을 테고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시카르 혼자만 힘들어하게 둬야 했겠지.

그녀가 새삼 고마웠다. 늘 도움이 되는 친구. 헤르시아.


“헤르시아. 꼭 그 돈 찾고 이제 아론과 그만 싸워요. 그리고 결혼식 올리도록 하고요. 사랑하기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잖아요. 제가 볼 때 두 분은 없으면 서로 죽고 못 살 사이에요.”

실제로 그런 사이지. 그래서 더 열정적으로 싸우는 것 같지만.

아론과 헤어졌다고 말하면서도 아론과 결혼하기 위해 길리언을 찾아가는 헤르시아만 봐도 그녀가 아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헤르시아는 울 것 같은 눈망울로 내 손을 꽉 쥐었다.


“정말 길리언이 뭐라고 해서 그런 거 아니죠?”

“글쎄. 아니라니까요. 폐군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제가 그걸 듣고만 있겠어요? 이 매직 완드로 머리카락을 다 태워버렸겠죠.”

그제야 헤르시아는 헤헤 웃으며 눈가에 슬쩍 고여 있는 눈물을 닦았다.


“그럼 됐어요. 정말 걱정했거든요.”

“걱정할 거 하나도 없으니 이만 가봐요. 그리고 다음엔 꼭 청첩장을 들고 와요. 알았죠?”

헤르시아는 슬며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안한지 가면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

데이지 궁에 도착하니 서연이 궁 안에 와 있었다.

서연은 내게 미안한 듯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대화 도중에 너무 갑자기 자리를 비운 것 같아서 죄송해요. 공작부인.”

“그럴 수도 있죠. 그런 걸로 미안해하지 마세요.”

나는 문득 서연도 우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서연 님.”

“네. 공작부인.”

“서연 님은 혹시 이곳에 어쩌다 오신 거예요?”

서연은 푸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곳에 왔을 때, 전 조금 억울했어요.”

“왜인지 물어도 될까요?”

“전, 사실 고아였거든요. 평생소원이 부모님을 찾는 거였어요. 그날 부모님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평생 소원을 이루었구나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저런, 어떡해요. 많이 속상하셨겠어요…….”

서연은 아쉽다는 푸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살고 싶지가 않았죠.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거든요. 부끄럽지만, 그래서 수면제를 입안에 털어 넣었어요. 그리고 이곳으로 온 거죠. 그리고 여기서 공작부인도 만나고, 레이독스 님도 만났고요. 그래서 제 삶은 그걸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해요.”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 조건이 일맥상통했다.

자신의 삶이 가장 비참하다고 느낄 때 이곳으로 오게 되고, 원하던 목적을 이루었을 때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이곳의 이치인 것인가.

그래서 레이독스가 갑자기 결혼식을 취소한 거구나. 서연이 사라질까 봐.

하지만, 내가 알기론 서연은 루시에게 엄마 소리를 더 듣고 싶어했었다.

하지만 그건 내게 한 말일 뿐. 어쩌면 레이독스와의 결혼식을 정말 원했을지도 모르지. 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건 이대로 접어둬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작부인. 그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서연 님은 혹시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가 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서연을 보니 그녀는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서연은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내 삶이 너무 힘들다고 느낄 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우리가 가장 힘들다고 느낀 순간에 이곳에 오게 된 것 같아요.”

“공작부인께서도 이곳에 오기 전에 힘든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나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연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손뼉을 쳤다.


“공작부인의 말씀이 맞을 거 같아요! 저도 그때 정말 힘들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가 이곳을 떠나게 되는 조건도 있지 않을까 해요.”

“떠나게 되는 조건이요?”

“네. 예컨대,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을 때라던가요.”

서연은 그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게 이루어졌을 때 이곳을 떠나게 된다는 말인가요?”

“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해요.”

서연은 에이 설마, 하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래. 말을 해도 레이독스가 말하는 게 맞는 거야. 더는 그녀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참, 후작님께서 제게 사과하셨어요. 사정이 있으셨다고 곧 말해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하시면서요.”

역시 레이독스가 곧 말할 예정이었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말할 이유가 없겠지.

나는 그저 잘됐다는 듯 피식 웃어줄 뿐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후작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요. 정말 잘 됐어요.”

서연은 쑥스럽다는 듯 수줍게 웃었다.


“오늘은 후작님과 할 얘기가 많으실 것 같으니 어서 들어가 보세요.”

서연은 민망해 하면서도 마음이 조급하긴 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일 뵐게요. 공작부인.”

서연이 가고 난 후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방을 오가며 생각에 빠졌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무엇이지?

사실 이곳에 와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만큼 나쁘게 흘러가는 일이 없었다.

길리언을 왕좌에서 밀어내는 것도 어차피 순리대로 될 일이었고, 키안이 있으니 시카르의 저주가 풀리는 것도 순리대로 될 일이었다.

이곳에서 나를 사라지게 할 정도로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쩜 그것은 시카르의 저주가 풀리길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나저나 시카르가 오면 내 기억을 보게 될 텐데 뭐라고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요즘 대부분 귀가 시간이 늦긴 했었지만, 오늘은 유독 늦었기에 그를 기다리다 피곤한 나는 잠들고 말았다.

***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게 인기척에 눈을 떴을 땐,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는 시카르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매우 화가 나 보이는 모습에 나는 번뜩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왔어?”

“길리언이 네게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했군.”

화가 잔뜩 나 있는 얼굴을 보니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들고 길리언에게 갈 기세였다.


“시카르. 진정해. 지금은 내가 그걸 알게 됐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없다.”

“아니야. 이유를 찾아야지. 길리언의 말이 맞다면 분명히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을 때 나는 이곳에서 증발할 거야.”

시카르는 이미 누가 날 데리고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를 바드득 갈았다.


“결코,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알아. 아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길리언의 처벌은 원인부터 찾고 생각해.”

화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리던 시카르는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보더니 이내 나를 끌어안았다.


“절대 안 보낼 거야. 걱정하지 마.”

“걱정은 네가 더 하는 거 같은데?”

시카르는 내가 어디로 사라질까 봐 무서운 듯 나를 꼭 끌어안았다.


“한편으로는 그럴 일 없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 네가 진짜 사라지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에 가끔은 잠도 안 와.”

나는 두려워하는 시카르를 조금은 진정시켜주기 위해 일부러 말을 돌렸다.


“참, 레이독스에게는 이미 말한 것 같던데. 맞아?”

예상대로 시카르는 금방 내 말에 반응하듯 내게서 몸을 떼어냈다.


“맞아. 그래서 결혼을 취소한 거지.”

“근데 서연 님이 진짜 원하는 건 결혼이 아니었어. 후작님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시지?”

“서연이 원하는 게 결혼이 아니라고? 그럼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이지?”

“서연은 여주인공 루시에게 진짜 엄마로 인정받길 원하고 있었어.”

시카르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군. 그 성격에 서연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 당분간은 안심해도 되겠어. 내일 레이독스에게 그 얘기를 해줘야겠군.”

루시가 서연을 쉽게 엄마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얼마 전 루시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아직 루시는 서연이 제 엄마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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