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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사라지는 사람들 (7) (155/197)


155화. 사라지는 사람들 (7)
2022.11.24.


그날 밤.

비카가 잠든 시각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고 눈이 뒤집혀진 시카르는 그 길로 길리언이 있는 폐쇄궁을 그 이름처럼 완전히 폐쇄시켜버렸다.

이전에 있던 사용인들도 모두 물리쳤고 그 큰, 폐쇄궁에는 길리언 혼자만 남겨졌다.

창이란 창은 모두 못질을 해서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궁에 있는 모든 책과 가구들을 수거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궁에서 식사라고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양만 제공되었다.


“평생을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공허 속에서 살다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시카르는 길리언에게 진짜 두려운 일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알려주었다.

길리언은 자신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하루아침에 평온을 잃었다. 그가 나를 비웃었듯 그의 삶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그리고 다음 날, 시카르는 레이독스에게 서연이 진정 원하는 것이 루시에게 인정받는 것이라고 전해주었다.

레이독스는 감동했지만 조심할 것이 많아지자 크게 낙담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루시가 서연을 엄마로 인정하게 된다고 해도 그걸 내가 막을 수 있을지…….”

그의 말대로 누구라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원작에서 본 루시의 성격 때문에 우리는 쉽지 않은 일이라 믿었다.


“네가 서연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루시가 구태여 서연을 엄마로 부를 일이 없겠지. 결혼을 취소한 건 여러모로 잘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이 정도 관계만 잘 유지한다면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레이독스는 그래도 찜찜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가지만 조심하면 괜찮다. 지금까지 유라와 서연이 우리 곁에 있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는 일이지.”

시카르가 레이독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는 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레이독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공작님께서 저를 위로해주는 일이 다 있으니 말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은연 중에 위로를 하고 민망한지 시카르는 머쓱한 듯 괜시리 헛기침을 했다.


“위로는 무슨. 그냥 경고였을 뿐이다.”

경고치고는 너무나 따뜻한 말이었지만 시카르는 혼자 경고라고 우기고 있었다.

레이독스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경고라…… 그렇다면 공작님에게서 들은 경고 중 가장 따뜻한 경고가 되겠군요.”

레이독스가 너무 기운 없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며칠 전부터 그의 표정이 어둡다 했는데, 언제든 서연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 저렇게 된 것이었다.

그에 반해 시카르는 그나마 냉정한 편이었다.

하지만, 시카르도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는 레이독스가 안쓰러웠는지 툭 던지듯 말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매사에 조심하고 살지. 아내가 삐지지 않게 하려면 말조심도 해야 하고, 불이 나지 않게 하려면 불조심도 해야 하고. 그냥 우리가 살면서 조심해야 하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마음의 부담이 덜할 것이다.”

시카르는 레이독스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지만 그에게는 그게 그 무엇보다 위로가 됐던 모양인지 레이독스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께서 그런 마음으로 버티고 계셨군요.”

같은 입장이니 시카르가 하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는 않겠지.

레이독스의 말대로 시카르가 그런 생각으로 버텼다 생각하니 나도 왠지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는 듯 조용히 시카르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후로도 우리는 이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서연이 출근을 하고 나는 그녀와 수다를 떨고, 루이드는 궁에서 기사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루시는 매일 궁으로 와서 왕실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서연은 매일 입궁하는 루이드와 루시를 챙겨주는 등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 루시과 서연이 많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

그날은 루이드가 활쏘기 시범을 보이는 날로 우리 부부와 루시와 키안이 함께 참관하는 날이었다.

한여름의 더위에도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만 느껴지는 볕이 좋은 날이었다.

루이드는 기사들 중에서도 단연 활을 잘 쏘았다. 왕실의 궁병들이 몽땅 구경을 나올 만큼 어린 나이에도 놀라운 활 솜씨를 갖고 있었다.

활쏘기 시범을 보인 날도 떨어지는 원반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저격함으로써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루이드의 실력이야 알고 있는 바이니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연과 나는 나란히 앉아서 루이드를 보며 속삭였다.


“글로만 봤지. 실제로 보니 더욱 대단한 거 같지 않아요?”

물론 서연의 기분이 좋으라고 한 말이긴 했지만,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뻐하는 눈치였다.

루이드가 서연을 좋아하고 잘 따르니 이뻐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하지만, 그녀는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조금은 차분한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썼다.


“공작부인의 말씀대로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이었던 같긴 해요.”

겸손을 보이고 있어도 그녀가 얼마나 기뻐하는지는 이미 표정에서 다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옆에 있는 시카르에게도 넌지시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시카르는 그저 시큰둥한 눈으로 무심하게 볼 뿐이었다.


“그래봤자 애들 놀이지. 나 때는 말이야…….”

또 자기 어렸을 때는 그보다 더 잘했다는 말을 늘어놓으려 하는군.

나는 시카르가 더 말을 늘어놓기 전에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저 그렇게 평온하고 한가한 그런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이 시간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즐겁고 평안한 시간들을.

그때 루이드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그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

루이드의 활쏘기 시범이 끝난 후에 바로 다음 차례는 검술 시범경기가 있었다. 그중엔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내는 것도 포함이었다.

보통은 상대의 신체를 겨냥해 화살을 쏘지는 않는 게 시범 경기의 룰이었다.

흔한 경기였고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경기도 아니었다.

당연히 별일 없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경기를 관람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루이드의 상대는 얼마 전 연회 때 루시의 흉을 보다가 루이드와 한바탕을 했던 그 아이의 형이였다.

아이는 시범 화살을 쏘기 전 루이드에게 말했다.


“부탁이야. 내 동생을 원래대로 돌려놔 줘.”

루이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 동생이 누군데?”

“그때, 루시 영애를 흉봤던 아이가 내 동생이야. 그날 이후로 모두 내 동생을 피하고 있어. 너와 내 동생 사이가 나쁘다는 걸 이유로 아무도 내 동생과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아.”

아이는 간절했지만, 루이드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말일 뿐이었다.


“너도 형제가 미움을 받으니 속상하겠지. 나 역시도 마찬가지야. 네 동생은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

루이드는 아이가 보란 듯 검으로 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꼴좋다.’

루이드의 행동은 아이를 더 발끈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자기 말을 안 들어 주면 이판사판인 아이였다.

아이의 진짜 목적은 동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생이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저도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기에 저 자신을 구제하는 게 목적이었다.

루이드가 이 일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는 압박을 느꼈다.

그래서, 정말 루이드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정말 화가 나서 자신의 화를 표출하기 위해서 루이드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당연히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별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화가 난 감정을 드러낸 것 뿐. 그것이 다였을 뿐이었다.

루이드는 놀리기라도 하듯 아이의 화살을 피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렇게 피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화살은 그대로 루이드와 같은 동선에 있던 루시를 향해 날아갔고, 마침 루시에게 음료를 건네고 있던 서연이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고 말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비웃고 있던 루이드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나버린 탓에 그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나라 재상의 딸이자, 장차 왕의 아내가 될 사람. 세자빈도 아닌, 왕비.

왕비를 향해 화살이 날아간 것이었다.


 
만약 루시가 화살에 맞았다면 당연한 룰을 어기고 화살을 날린 아이와 그것을 피한 루이드. 둘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 중대사안이었다.

키안은 가장 먼저 루시의 상태를 확인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영애.”

루시는 그 작은 손으로 화살이 더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서연의 가슴 위에 꽃혀 있는 화살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전 괜찮으니 어서, 유모를 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키안이 서연을 살피려는 때, 레이독스가 힐링 포션을 가져와 서연의 입술에 떨어트리려 했다. 그러자 키안이 그것을 치워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깟 포션 따위가 위력이 좋다 한들 신성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레이독스는 금세 수긍하며 키안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도 믿고 있었다.


“어떡해. 유모가 나를 대신해서 화살을 맞았으니 어떡하면 좋아.”

루시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레이독스의 마음은 아팠지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의사도 연금술사도 아니었으니까.

키안이 임시로 치료를 하긴 했지만,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못했다.


“경기를 중단한다.”

왕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모든 경기는 중단되었다. 루시는 눈이 붉어지도록 눈물을 흘렸다.


“괜찮아?! 어떡하면 좋아…… 나 때문에…….”

눈물이 범벅이 된 루시는 레이독스를 따라 끝까지 천막 안으로 옮겨진 서연을 따라 이동했다.

보고 있기기 안쓰러웠던 나는 뒤로 성큼 물러나 있었다.

시카르는 그동안 화살을 날린 아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아이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었다.

루시를 향해 화살이 날아간 것은 맞지만, 화살에 맞은 사람이 루시는 아니었다. 아이의 화살에 맞은 것은 그저 시녀일 뿐.

설사 그 시녀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사고일 뿐이었기에 귀족의 아이에게 큰 벌을 내릴 수는 없었다.

절망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이는 루이드의 동공이 죽은 생선의 눈처럼 초점을 잃고 있었다.

놀랐겠지.

그 순간, 천막 안에서 루시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꺅!!!”

우리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서연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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