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이별은 예고 없이 (1)
(156/197)
156화. 이별은 예고 없이 (1)
(156/197)
156화. 이별은 예고 없이 (1)
2022.11.28.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갔을 땐, 이미 서연이 사라지고 없었다.
루시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고, 비명소리에 달려온 레이독스는 망연자실한 듯 주저앉았다.
시카르는 무슨 상황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키안에게 서연이 사라졌다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영민하기에 제 어머니도 사라지는 게 아니냐고 따져 묻고도 남을 국왕이었다.
시카르는 키안에게 시녀 서연이 쓰러져 루시가 많이 놀랐고 그녀의 안정을 위해 먼저 후작저로 보내었다고만 말해주었다.
“나, 유모가 내 엄마였으면 좋겠어. 유모가 모두 다 나으면 내가 엄마라고 불러 줄게. 그러니까 죽으면 안 돼. 알았지? 꼭 살아나야 해. 응? 유모…… 제발…….”
레이독스가 루이드를 달래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서연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루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절묘한 순간에 서연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루시의 기억을 본 시카르는 길리언이 말한 것과 같이 서연이 갑자기 증발해버렸다고 한다.
잘 놀라지 않는 시카르도 충격이 컸던지 연기도 잔영을 남기건만, 서연은 완전히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증발해버렸다는 말을 반복했다.
서연이 정말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시카르는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길리언이 했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연이 사라졌단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루시가 매우 놀랐다는 이유로 경기는 모두 중단되었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람이 사라지는 걸 본 루시는 결국 기절해버렸다.
“루. 루시 영애께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놀란 키안이 기절한 루시를 보며 물었다.
레이독스는 침울한 얼굴로 루시를 안아 들며 말했다.
“돌봐주던 유모가 화살에 맞은 바람에 너무 놀라 그렇습니다. 외람되지만, 루시의 안정을 위해 신은 오늘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키안은 루시가 매우 걱정되는 만큼 레이독스의 처사를 따랐다.
“그렇게 하십시오.”
시카르가 받은 충격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며칠 후 시카르는 혼란 속에서 길리언을 찾았다.
시카르가 길리언을 죽이지 않고 둔 것은 만일에 대비해서라고 했다. 그가 동양인들을 여럿 보았기에 어쩌면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길리언을 찾았지만, 그는 어떤 해답도 내놓지 못했다.
시카르는 실망한 얼굴로 돌아왔다.
“후작님은 좀 어떠셔?”
“아직 출근하지 않고 있다…….”
바로 눈앞에서 서연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루시와 루이드는 서연이 사라진 이유가 저들 때문이라 착각했고 레이독스는 절망했다.
서연이 사라짐으로써 내게는 다시 시녀가 필요해졌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난 당분간 좀 바빠질 것 같다.”
시카르의 표정이 매우 어두웠지만 나는 그가 앞으로 왜 바빠지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무슨 일인데?”
“당분간은 레이독스와 함께 서연이 돌아올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거든. 그놈이 혼자 하게 둘 수도 있지만. 내가 기억을 볼 수 있으니까 정보를 얻기는 더 좋을 것 같아서. 해보려고.”
“내가 살던 세계의 사람들을 찾으려는 거야?”
“검은 눈의 사람들도 찾아보고, 신전에도 가보고, 주술사도 만나보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든 해볼 생각이다.”
레이독스가 물불 안 가리고 찾아다니려 한다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시카르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각료들에게는 뭐라고 하려고?”
“당분간 휴직할 생각이다. 그동안 비카와 듀리온이 일을 돕느라 더 바빠질 테니 네가 이해해줘.”
“아니야. 듀리온 님과 비카 님은 내가 부리는 사람도 아닌걸.”
아직 비카와는 상의가 안 된 모양인지 그녀는 갑자기 서재로 들어와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테이블 위로 두 손을 쾅! 쳐내렸다.
“시카르 블레이크! 이 나쁜 놈아! 맹약을 파기시켜 준대 놓고 나한테 일을 더 떠넘겨?!”
시카르는 귀찮다는 표정도 짓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이 그렇게 됐으니 당분간은 좀 더 고생하도록.”
“어쩐지 너무 순순히 계약을 파기해준다고 하더라니. 네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니, 다 따졌으면 이제 그만 나가봐.”
“그럼 이번 일만 마무리 되면 무조건 파기해준다고 약속해.”
시카르는 씩씩거리고 있는 비카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
“이건 마님 앞에서 한 약속이니까 꼭 지켜!”
비카는 이제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다시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안 그래도 비카와의 맹약은 언제까지인지 묻고 싶었는데. 이제 파기해주기로 했구나.”
“기분 좋게 파기하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시간을 더 끌게 되었다. 시간을 끈 게 무색하지 않게 방법을 잘 찾게 되면 좋을 텐데.”
늘 자신에 차 있던 시카르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풀 죽은 듯 기운이 없었다.
그는 내 볼을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분간은 바쁠 거야. 하지만 반드시 찾아내도록 할게. 서연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찾다 보면 네가 사라지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내 볼을 쓰다듬고 있는 시카르의 손을 매만졌다.
“많이 놀랐지?”
시카르는 허탈한 듯 씁쓸하게 웃었다.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지. 부인도 많이 놀랐겠지? 앞으로 네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게 노력할게.”
매일 보던 사람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안 놀랄 수가 없었긴 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놀란 사람이 시카르라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너무 애쓰지 마.”
“죽을힘을 다해도 부족할 판에 너무 애쓰지 말라니. 당분간 내가 바빠도 이해해줘. 참. 시녀는 구했어?”
“아니…… 아직…….”
시카르는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구해. 시녀라도 다시 구하면 서연의 빈 자리가 조금 덜 느껴질 거야. 다녀올게.”
***
시카르가 방법을 찾기 위해 바쁜 동안, 나는 다시 시녀를 찾기 위해 바빠졌다.
시녀가 되겠다는 귀족들은 너무 많았지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내게 잘 보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이라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헤르시아가 나를 찾아왔다.
“공작부인. 소식 들었어요. 서연 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시녀직을 관두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면서요?”
서연의 부재를 누구라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린 상태였다.
“네. 그렇게 됐어요.”
헤르시아는 속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서연 님이 다시 건강을 되찾으셔야 할 텐데…… 안타까워요.”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사라진 게 문제라고 말해줄 수가 없으니, 깊은 한숨이 나왔다.
“다시 좋아지실 거예요.”
방법을 찾는다 했으니 찾아올 것이라 믿는 수밖에 없겠지.
“많은 분이 지원을 하셨는데도 공작부인께서 아직 시녀를 못 뽑고 있다고 하신 것도 들었어요.”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다 보니 아무나 뽑을 수가 있어야죠. 서연 님처럼 편한 분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헤르시아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용기 낸 듯 말했다.
“서연처럼 상대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분을 찾기란 매우 힘들긴 한 일이죠.”
“참, 헤르시아. 결혼식은 어떻게 됐어요?
“결혼식은…… 주례 섭외가 안 돼서 일단 미루었어요.”
“혹시 주례가……?”
“네. 후작님께 부탁했어요. 아론이 주례는 무조건 후작님이 하셔야 한다고 했거든요. 저도 후작님이 해 주시길 원했고요. 그래서 이번엔 저도 기다려 주려고요. 후작님이 상황이 좋아지시면 그때 주례를 받을 생각이에요.”
지금 레이독스가 주례할 정신은 아니긴 하지. 하지만 그가 언제 나아질지는 장담할 수가 없을 텐데. 헤르시아의 결혼식도 역경이 많구나.
그리고 헤르시아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어 내게 내밀었다.
그것은 금테가 둘러진 벨벳 상자였다.
“이게 뭐죠? 헤르시아?”
“길리언이 숨겨둔 재산을 찾았거든요. 일전에 공작부인께서 제게 빌려준 돈과 이자예요.”
“모비아트 부인께서 돈을 헤르시아 님께도 주신 거예요?”
헤르시아는 자신이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원래 우리 집이 예전엔 길리언의 집이었거든요. 길리언이 왕이 되면서 우리에게 준 집인데 거기 정원에 있는 큰나무 밑을 파보니까 온갖 귀금속들과 금화들이 한가득 매몰돼 있는 거예요. 저도 어머니께서 모두 다 가져가실 줄 알았는데, 제게 절반을 나누어 주셨어요. 이제 이 돈으로 아론과 결혼하라고 하시면서요.”
모비아트 백작 부인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헤르시아는 내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겠다는 듯 웃었다.
“저도 처음엔 공작부인처럼 그런 표정을 지었죠. 그런데 이제는 납득했어요. 어머니께서 공작부인을 무서워하시더라고요.”
“저를요?”
“이번에 재판에서 거액의 세금을 지불하고 길리언의 재산을 차지하게 됐는데. 어머니는 공작부인이 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줄 아시거든요.”
“헤르시아. 제가 재산을 아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전 아직도 납득할 수가 없겠군요.”
“공작부인께서 의리가 있으셔서 어머니가 돈을 모두 가져간 줄 아시면 다시 몰수해갈 것이라며 주셨어요. 그리고 꼭 공작부인께 이 사실을 전하라고도 하셨고요.”
아. 그런 이유였구나. 어쩐지. 난 또 사람이 변한 줄 알았더니…….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헤르시아가 안쓰러웠다.
“헤르시아…….”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께서도 할머니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대요. 그래서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도 헤르시아는 그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참, 이자는 됐어요. 가져가요.”
내가 다시 상자를 내밀자 헤르시아는 손사래를 치며 격심하게 거부했다.
“안 돼요! 이자를 드려야 저도 마음이 편하고 아론도 좋아할 거예요.”
내가 사라지고 나면 어차피 쓰지도 못할 돈인데…….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사라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 돼. 그런 생각 하면 안 되지.
“그럼 잘 받을게요. 헤르시아.”
헤르시아는 해사하게 웃고는 다시 말했다.
“이제 저희가 여유가 좀 있어서 아론이 사업채를 운영하고 저는 쉴 수 있게 되었어요.”
헤르시아는 이제 정말 편해 보였다.
길리언에게 실컷 이용당했지만,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도 이제 웃을 수가 있는 것이겠지.
“너무 잘 됐어요. 축하해요. 헤르시아.”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공작부인의 시녀로 지원하고 싶어요. 서연 님을 대신해서 제가 공작부인을 잘 모시고 싶어서요. 이전에 제가 거절한 건 정말 죄송해요.”
헤르시아가 내 시녀가 된다면 너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서연이 사라지고 내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내가 사라지면 헤르시아도 꽤 큰 충격을 받을 것이 못내 걸렸다.
그래서 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헤르시아. 거절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