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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이별은 예고 없이 (3) (158/197)


158화. 이별은 예고 없이 (3)
2022.12.05.


그렇게나 기다렸던 말이 전혀 반갑지 않게 들렸다. 우리의 시간이 짧아진 것만 같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어머니. 사실 그동안 아버지가 너무 힘들어해서 저주 풀기를 시도해봤는데 조금씩 지워졌어요.”

시카르는 마치 소름이 돋는다는 듯 키안을 쳐다보았다.


“지워졌다니. 뭐가 말이야?”

키안은 코를 긁적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음…… 아버지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내 눈엔 아버지 몸에 있는 저주가 보여.”

키안은 시카르의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저주가 각인 돼 있거든.”

그랬구나. 원작에서 키안이 시카르를 전혀 치료해준 적이 없으니 우리로서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키안은 민망했는지 코를 조금 긁적거렸다.

키안의 다음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저주를 치료해줄 때마다 각인이 조금씩 옅어졌거든. 근데 이젠 거의 다 옅어졌어. 그런데, 옅어질 수록 저주의 힘도 옅어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어.”

키안은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시카르는 그런 키안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멍한 표정이다가 꽤나 충격을 받았는지 소름이 돋는다는 듯 키안을 쳐다보았다.


“그럼…… 네 말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저주의 각인이 모두 지워질 거야. 아버지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된다고.”

키안은 뿌듯한 듯 얘기했지만, 시카르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마음껏 기뻐해 주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

눈치가 빠른 키안은 금세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표정들이 좋지 않아요……. 왜, 왜 그러시는 거예요? 어머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에요. 아무 문제 없어요. 국왕…….”

“어머니. 저에게는 다 말씀해주세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저주를 풀면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순수하게 묻는 키안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평소 그렇게 말 잘하던 시카르도 백지가 된 듯 초점 없는 눈빛으로 앞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내게 떠오른 것은 비카뿐이었다.


“비카 님! 비카 님 때문에 그래요!”

키안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비카님이요?”

“공작님의 저주가 풀리면 비카 님과의 맹약을 깨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서 놀라서 그러는 거예요.”

다행히 키안은 금세 이해했다는 듯 미소지었다.


“아…… 하긴 그렇겠어요. 맹약이 깨지면 비카 님과 작별을 해야 하니까요. 저도 비카 님과 작별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쉬워요.”

키안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카르를 슬쩍 봤다가 다시 날 쳐다보며 속삭였다.


“아버지가 충격이 큰가 봐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슬쩍 미소짓는 키안을 따라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그러신 것 같죠?”

“네. 어머니.”

키안이 자신의 저주를 서서히 지워가고 있었다는 건 상상도 못 했겠지. 나도 못 했으니까.

시카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요즘 바쁜 탓에 식사를 하다말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키안도 대수롭지 않게 식사를 하며 말했다.


“오늘도 재상과 함께 약 찾으러 다니는 거야?”

키안이 약을 찾으러 다니냐고 묻는 건 레이독스가 휴직을 할 때, 서연이 아파서 약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핑계를 댔기 때문이었다.

시카르는 반쯤이 넋이 나간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오늘도 바쁠 것 같다.”

“몸은 좀 괜찮아? 내가 풀어 줄까?”

평소 키안이 저주를 좀 풀어 줄까? 라고 물으면 일어섰다가도 다시 자리에 앉으며 ‘아, 시원하다.’를 외치며 치료를 받던 시카르는 오늘 그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소름 돋게 들린다는 듯 키안을 쳐다보았다.


“아니! 됐다!”

시카르가 질색하는 얼굴로 자리를 뜨자 키안은 당황한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어머니. 제가 실수한 걸까요?”

“실수요?”

“아버지가 비카 님과 이별해야 한다는 걸 생각 못 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너무 급작스럽게 말한 것 같아서요.”

마음의 준비라. 나도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키안도 내가 갑자기 떠나면 꽤 놀랄 텐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떠나야 할 텐데…….

이렇게 이별이 갑자기 찾아올 줄 알았더라면 더 마음의 준비를 잘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조금 더 떠나기 편했을까.

나도 떠나기 전 키안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시간을 줘야 할 텐데. 이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예고 없는 이별을 키안이 또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시카르가 잘 말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는 그래도 나보단 더 냉정하니까 더 말을 잘하겠지.


“오늘은 식사 후 산책 괜찮아요?”

내가 조심히 건넨 말에 키안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시종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내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즐길 생각이니 점심 식사 후 예정돼 있던 각료 회의는 내일로 미루도록 하지.”

키안이 왕이 된 직후에는 길리언의 잔당을 해결하느라 일이 많았지만, 요즘은 나라에 큰 변고도 없고 한여름에도 그 흔한 가뭄도 없이 세상이 평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적어도 원작에서처럼 키안이 레카도르를 집권한 이후 평화롭고 평탄한 태평성대가 열렸단 사실만은 순탄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모처럼 여유 있게 산책을 즐길 수가 있었다.

산책을 하는 동안 아주 오랜만에 나는 키안의 이름을 불렀다.


“키안. 오늘은 오랜만에 네 이름을 불러보고 싶구나. 허락해주겠니.”

“물론이에요. 어머니. 언제든 어머니가 편하실 때마다 그렇게 불러 주세요. 전 아직도 그편이 훨씬 더 좋거든요.”

“키안. 만약에 말인데.”

“네. 어머니.”

“만약 내가 멀리 떠난다고 해도 공작님과는 지금처럼 잘 지냈으면 한단다.”

옆에서 조용히 걸어가던 키안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머니? 멀리 떠난다니요?”

“서연이 아프셔서 고향에 내려가셨잖아. 서연 님을 뵈러 잠시 갔다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아.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아버지와는…… 이제 아버지와는 잘 지낼 수 있어요. 아버지가 절 위해 많이 희생하신 걸 알고 있으니까요.”

키안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코끝이 찡해져 왔다.

산책 중에 비카가 우리에게 와서 인사를 올렸다.


“공작이 맹약을 파기해줬습니다. 그래서 두 분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전 이만 떠날 것 같아서요.”

시카르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비카와 맹약부터 파기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겉으론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나와 벌써 이별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아팠다.


“비카 님.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인간들이 없는 조용한 숲으로 가야겠죠. 아,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하는 걸 다 싫어하는 건 아니고요. 음식은 인간들이 만든 게 가장 맛있으니까. 인간들이 운영하는 시장이 가까운 한적한 시골로 갈 예정입니다.”

비카의 성격상 포옹이라도 시도한다면 기겁을 할 것이기에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나마 이 악수라도 받아준다면 다행인 거니까.


“비카 님. 보고 싶을 거예요.”

지금까지 내게 늘 시큰둥 하기만하던 비카였기에 내 악수를 거절한다고 해도 놀라지도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비카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뭐, 마님께서 만든 밀크티를 마시러 가끔 올게요. 밀크티는 마님이 만든 게 제일 맛있으니까. 그러니 그때까지 꼭 여기 계세요. 아셨죠?”

아. 비카도 알고 있구나. 하긴. 그 좋은 귀로 못 들었을 리가 없겠지. 말투는 냉랭했지만, 그건 내게 보이는 비카 식의 애정이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껏 함께했던 비카와도 이렇게 이별을 맞이하게 되니 내가 떠날 시간이 다가온 것이 더욱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


“네. 저 반드시 여기 있을게요. 꼭 다시 오세요. 비카 님.”

키안도 아쉬운 듯 비카를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또 만나요. 비카 님.”

“국왕 전하가 더욱 강성한 군주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비카 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테니 지켜봐 주세요.”

키안이 비카의 입에 사탕을 넣어주던 게 바로 엊그제 같기만 했다.

비카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키안과 나는 반나절을 함께 했다.

차를 마시고 포옹을 하고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어쩌면 시카르는 내게 키안과 함께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자리를 먼저 비켜준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

시카르는 키안에게 말해 며칠간 각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키안도 처음으로 휴가를 갖게 했다.

그 며칠간 우리는 예전과 같이 낚시도 하고, 같이 그림도 그리고, 정말 모처럼 단란하고 평범한 가족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키안은 낚시를 했고 시카르는 고기를 구웠고 우리는 구워진 생선을 소금에 찍어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키안. 소금을 그렇게 많이 찍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

“영양사가 이 정도는 괜찮다고 했어. 대신에 물도 많이 마시고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했거든.”

“이미 네 몸은 나트륨을 배출하기 위해 더 많은 수분을 필요로 하겠지. 그리고 네가 섭취한 수분은 모두 네 장기에서 걸러지는 과정을 거쳐야 할 테니 네 몸은 이미 과부하를 느끼게 될 것이고…….”

키안은 생선을 먹다 말고 뾰로통한 눈으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언제는 갑각류만 조심하면 된다고 했잖아. 오늘따라 왜 그래.”

시카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싱겁게 먹는 버릇을 들이는 게 더 좋다는 말이다.”

한 나라의 국왕은 온데간데없이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듣는 어린 키안만이 보였다.

이 귀여운 부자를 이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 아렸다.

시카르와 나는 서로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조용히, 서서히. 이별을 준비해가고 있었다.

키안의 휴가가 끝나는 마지막 날.

시카르는 저주가 발현됐지만, 치료를 받지 않고 꾹 참고 있었다.


“며칠간 우리는 작별의 시간을 가질 만큼 가졌어. 그러니 너도 내일은 그만 치료받아.”

시카르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내일 떠날 생각이구나…….”

“네가 계속 치료를 미루니까 키안이 이상하게 생각하잖아. 이렇게 자꾸 미룰 순 없어. 우려하던 그런 상황이 안 생길 수도 있잖아.”

예전의 그 대담하던 시카르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카르는 말없이 허공을 쏘아보다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깊게 한숨 쉬었다.


“그럼 오늘 하루만 더 시간을 줘. 내일은 반드시 받을 테니까.”

“알겠어.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받는 거야. 알았지?”

“그럴게. 네 말대로 할게.”

기운이 하나도 없는 시카르의 목소리에 마음이 아팠다.

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하겠지.

그날 밤. 나는 그를 위로하듯 나를 꽉 끌어 안아주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시카르는 내 머리를 만져주며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만약 이 세상에 네가 없어진다면…….”

“우리 작별 인사를 하더라도 내일 하도록 해. 응?”

시카르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낮게 대답했다.


“알았어…….”

내게도 직감이란 것은 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봤을 때, 내일 시카르가 치료를 받게 된다면 나도 서연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밤은 작별 인사를 하느라 눈물을 쏟아내고 싶진 않았다.

슬픈 이별은 내일로 미루고 싶었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시카르는 곁에 없었다.

그간 시카르는 식사를 하다가 자리를 뜨는 한이 있어도 아침 식사만큼은 늘 함께했다.

그래서 침실에서 시카르가 보이지 않아도 당연히 식사 자리에 가면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헤르시아는 보이지 않고 흰색 제의를 입은 듀리온이 나를 안내했다.


“따라오십시오.”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듀리온을 따라간 곳은 궁 안에 있는 재단 앞이었다.

재단 앞에는 흰색 관 하나가 보였고 키안마저도 그 앞에서 흰색 제의를 입고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한 키안은 내게로 걸어와 내 손을 붙잡았다.


“어머니…….”

“네. 국왕.”

키안은 갑자기 눈물을 툭툭 떨구기 시작했다.


“어머니…… 흐윽…….”

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눈물을 잘 보이지 않던 키안이었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구슬피 우는 걸까.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길래 안 보이던 눈물을 다 보이십니까.”

키안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다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놀라지 마세요.”

나는 키안을 향해 고개를 찬찬히 끄덕여 주었다.


“놀라지 않을 테니 말해보세요.”

키안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내 표정을 살피다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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