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이별은 예고 없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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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이별은 예고 없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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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이별은 예고 없이 (4)
2022.12.08.
나는 키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쉽사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라니. 어느 아버지를 말하는 거야?”
키안은 더는 말을 못 하고 있었고 듀리온이 내게 묵례를 하며 말했다.
“지난밤 공작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듀리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시카르가 죽었다는 말이에요? 그런 거 아니죠?”
듀리온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돌아가셨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말이 안 되잖아요. 지난밤까지만 해도 곁에서 잠들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이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징후도 없던 시카르가 갑자기 죽다니.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
내가 자꾸만 저주를 풀라고 하니까 도망가기 위해서 죽었다고 한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
“무슨 모의 중인지 모르겠지만, 난 안 넘어가니까 시카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세요.”
듀리온은 침울한 얼굴로 눈가에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듀리온이 손을 들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찬가지로 흰색 옷을 입은 병사들이 나와 관을 열었다.
그러자 관속에는 잠을 자듯 누워 있는 시카르가 보였다.
이,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그 멀쩡하던 시카르가 죽는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털썩.
말 그대로 나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듀리온을 눈물을 참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요즘 국왕 전하께서 해 주시는 치료를 거부하셨었습니다. 신관의 말로는 그동안 저주가 발현될 때마다 저주의 발현을 멈추는 치료를 받다가 갑자기 치료를 받지 않게 돼서 사망까지 하게 된 거라고 합니다……. 요즘 공작님께서 계속 기운이 없으셨는데. 혹시 눈치 못 채셨습니까?”
기운이 없었다?
요즘 시카르가 꽤 순해졌다고 생각했었다. 상황이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가 나와의 이별을 준비하느라 그저 힘이 빠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기운이 없어서 그랬다니…….
“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사람이 죽을 수가 있는 거죠?!”
“저주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너무 허망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간밤에 나를 안던 시카르의 따스한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죽었다고?
나는 벌떡 일어나 관속에 누워 있는 시카르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 얼굴은 시카르가 맞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믿기지 않았다.
“국왕 정말 이 사람이 공작님이 맞는 거야? 정말 공작님이 돌아가신 게 맞아?”
키안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부터 생명의 반응이 전혀 없어요…….”
신성력을 가진 키안이 생명의 반응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죽은 것은 맞았다.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만지니 체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듀리온은 울면서 무릎을 꿇었다.
“간밤에 공작님께서 많이 아프셨습니다. 하지만 마님이 아시면 걱정을 하신다며 마님이 잠을 설치고 계시니 잠 오는 약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때라도 국왕에게 데려가서 치료를 받게 했어야죠!”
듀리온 또한 울컥했는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작님이 거부하셔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게 내버려 둬요?!”
듀리온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시카르가 고집을 피웠겠지. 말 안 해도 알고 있었지만, 이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늘 목에서는 핏대를 세우고 큰소리만 뻥뻥 치고 다니던 시카르가…… 요즘 그렇게 기운 없이 맥빠진 얼굴로 있는 걸 보고서도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다니…….
나야말로 시카르의 죽음을 방치한 거 같았다.
“공작님께서…… 설산에 묻어 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리제 님을 안치하신 곳에 공작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시카르를 안치하겠다는 말까지 나오니 그의 죽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키안은 어느새 종이학을 가져와 관에 누워 있는 시카르의 가슴 위로 놓아두었다.
우리가 예전에 함께 접었던 종이학이었다.
키안은 조심스럽게 종이학을 넣고 두 손을 모았다. 키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어머니……. 예전에 종이학 천 마리를 접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진다고 했죠? 제가 아버지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게 빌게요.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제가 아버지가 돌아올 수 있게 빌고 또 빌게요.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시카르가 살아나길 바라는 키안 때문에 참고 있던 울음이 쏟아졌다.
“키안……!”
나는 가서 키안을 품에 안았다. 키안은 내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빌고 또 빌면 아버지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예요…….”
정말 그런 날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라리 내가 이곳을 떠나고 시카르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를…….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키안과 나는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듀리온은 차마 우리를 볼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키안과 나는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다. 너무 가슴이 먹먹해서…… 너무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차라리 내가 사라졌어야 했다. 시카르를 죽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고 말았다…… 이제 그가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곳에 와서 모든 걸 그에게 의지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날 버려두고 가버린 나쁜 놈. 그는 정말 나쁜 놈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미 비카와 맹약을 해지했을 때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난밤 일을 떠올려보니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얘기는 오늘 하자며 미루었다.
그때 시카르는 자신이 죽을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기 전 나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았다.
그때 인사를 받아주는 건데. 그렇게 넘겨 버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온통 후회스러웠다.
너무 많이 운 탓에 기운이 빠져 있을 무렵 뒤늦게야 레이독스가 달려왔다.
“고, 공작님…….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듀리온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께서 장례는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설산에 조용히 묻히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작님의 유지를 받들어 오늘 설산으로 발인하려 합니다.”
“뭐가 이렇게 다급해요?! 안 돼요! 오늘 이렇게 보낼 수 없어요!”
“이미 새벽에 베로니아 공주님께 서신을 올렸습니다. 공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갑작스런 죽음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이렇게 벌써 발인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요?”
듀리온은 그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작님의 유지를 받들 수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뭐가 그렇게 급했던 걸까. 우리가 너무 슬퍼할까 봐, 그래서 그렇게 빨리 가는 건가.
이미 자기 죽을 걸 알고 일을 일사천리로 끝내버린 시카르가 원망스러웠다.
“공작님께서 또, 하나 더 당부하셨는데 할머니께는 자신의 부고 소식을 알리지 않길 원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려야 하잖아요?”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서 향후 몇 년까지는 알리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할머니의 치매가 더욱 심해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겠지. 그 점은 나도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레이독스는 착잡한 듯 한숨을 깊게 쉬며 말했다.
“공작님의 부고는 각료 회의에서 제가 귀족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듀리온과 레이독스는 키안과 나를 위해 꽤 신경을 써주고 있었지만 이 절망적인 마음이 풀어지는 건 아니었다.
설산에 많은 사람이 갈 수는 없어서 듀리온과 레이독스만 함께 마차에 올랐다.
달그락달그락 달리는 마차 소리가 한없이 허망하게 들렸다.
눈앞에 설산이 다가올수록 또 눈물이 흘렀다. 평소라면 가는 길에 잠이 들었을 키안도 오늘은 잠에 들지 않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키안은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었다.
또 아빠를 잃게 된 키안이 너무나 가여웠다.
허망한 눈으로 창밖을 보던 키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또 울컥했는지 나를 끌어 안아주었다.
우리는 설산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를 끌어안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
베로니아 공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시카르의 상여 마차를 쳐다보았다.
“안치실에 블레이크 공작의 자리를 마련했으니 상여를 거기 들이도록 하라.”
“신경 써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공주 저하.”
베로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유라를 보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많이 놀랐겠구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신세를 지게 돼 죄송합니다. 공주 저하.”
“아니다. 블레이크 공작을 이곳에 안치하게 된다면 국왕이 제사를 지내기도 편하겠지.”
베로니아는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키안을 보며 갑갑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이 아버지를 두 번 잃게 되었구나…….”
공주의 따뜻한 말은 참고 있던 유라를 또 울렸다.
“흐윽…… 공주 저하…….”
유라는 키안이 너무 가여웠다. 혹여라도 자신을 탓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것도 걱정이었다.
베로니아 공주도 오늘만은 그런 키안이 걱정이 되었다.
부디 이 시기를 잘 극복해나가야 할 텐데…….
장례는 발리제 때보다도 더 조촐하게 치러졌다.
조문객이라고는 레이독스와 듀리온이 전부였고 함께 온 병사들도 몇 되지 않았다.
키안은 시카르의 관 위에 백합 대신 로즈마리를 놓아두었다.
어릴 적 가정의 평화를 위해 시카르가 로즈마리를 선물한 기억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떠났어도 우리는 한 가족이야…….”
유라도 키안이 로즈마리를 가져온 것을 보고 놀라며 키안을 안았다. 그 어린 시절의 일을 기억해주고 있는 키안이 한없이 고마웠다.
“밤이 너무 깊으면 가기 힘들 테니 이만 가보거라. 블레이크 공작은 내가 잘 살펴 줄 테니까.”
듀리온은 자신의 진심을 담아내듯 허리까지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부탁도 잘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주 저하.”
“그런 인사치레는 필요 없으니 늦기 전에 가보거라.”
사람들은 조금 더 머물기 원했지만 해가 짧아진 탓에 서둘러 떠나야 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허무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게 된 유라와 키안은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벌써 해가 떨어지고 있었기에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또 보자꾸나.”
“자주 찾아 봬도 될까요?”
그것은 유라의 간절한 소망과도 같았다. 베로니아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망극합니다. 공주 저하. 망극합니다.”
베로니아는 듀리온에게 어서 데리고 가라는 듯 눈짓을 했고, 듀리온과 레이독스는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마차를 타고 떠났다.
모두가 떠나고 설산에는 다시 베로니아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혼자 남게 된 베로니아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나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