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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악역의 사랑법 (1) (160/197)


160화. 악역의 사랑법 (1)
2022.12.12.


베로니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르미와 로엔이 나타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주 저하.”

베로니아는 안치실 안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은 깨어나려면 아직 멀었는가?”

제르미는 조심스럽게 시간을 확인했다.


“곧 깨어나실 시간이니 공작님을 꺼내오겠습니다.”

베로니아는 피곤한 기색으로 이들이 공작을 관에서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며칠 전, 시카르는 듀리온과 함께 갑작스럽게 설산을 찾은 후 제르미와 로엔을 기다렸다.


“이곳을 네 아지트로 사용할 셈이냐?”

“송구합니다. 공주 저하. 하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베로니아는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는 듀리온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인지 너는 아느냐?”

“호, 혹시 공작님께서 그렇게 친절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공주저하.”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건 듀리온도 마찬가지였기에 공주에 대한 예의도 잊은 채 얼떨결에 되물은 질문에 베로니아가 눈을 흘겼다.


“뭐라?”

“아, 아닙니다.

시카르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은 건지는 몰랐지만, 좋은 얘기만은 아닐 게 훤했다.

듀리온이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는 동안 로엔과 제르미가 도착했다.

베로니아는 이제 말하라는 듯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다들 모였으니 이젠 말하지. 무슨 일로 사람들을 이곳에 소집한 것이지?”

시카르는 서연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며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것은 제외하고 검은 눈의 사람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시카르의 설명을 들은 베로니아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낯설었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곳에도 마계와 엘프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엘프나 페어리들처럼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건가?”

“비슷합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시공간을 오갈 수는 없나 보군?”

“공주 저하께서 이해하신 대로입니다. 아내가 사라진다면 다시는 이곳에서 볼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제르미와 로엔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러면, 후작가의 유모였던…… 그러니까, 그 서연이란 사람은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래서 아내만은 사라지지 않게 하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그러니 제가 계획대로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시카르가 자신의 계획을 얘기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특히나 듀리온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 듯 착잡한 눈으로 말했다.


“네? 공작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죽어야 한다고요?!”

시카르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언성을 높이고 있는 듀리온의 입을 막았다.


“잠시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죽은 것처럼 꾸미라는 소리지. 여기서 제르미와 로엔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냥 죽은 척 만으로는 신성력을 가진 키안을 속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르미와 로엔이 키안의 신성력에 혼선을 줘야만 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이고 키안을 속일 수는 없었기에 설산까지 와서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시카르가 깨어나려면 베로니아가 머물고 있는 설산이 필요했다.

그래야 시카르도 관속에서 나올 수가 있었으니까.

제르미와 로엔은 시카르가 재산 절반을 대신전에 기부하겠다고 하자, 두말 않고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다.

하지만, 베로니아는 그런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카르가 죽게 될 경우 발리제와 같은 안치실을 쓰게 해달라는 건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키안을 속여야 하는 게 싫었던 베로니아는 처음엔 이 부탁을 거절했다.


“네 심장까지 얼어붙을 때까지는 키안의 곁에 머무는 게 낫지 않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국왕이 마음먹고 저를 치료해버린다면 제겐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제 아내를 지켜주십시오.”

“네가 없다면 키안은 아버지를 두 번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방법을 찾아볼까 합니다. 방법을 찾다 안 되면 그땐 죽음을 받아들여야겠지만요.”

공작의 진심을 느낀 베로니아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베로니아가 그때를 떠올리며 씁쓸함을 느끼는 동안 시카르가 관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공작의 손에는 키안이 놓아준 종이학과 로즈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참 보다가 관속에 다시 넣었다.


“이것은 관속에 넣어둘 테니. 나중에 제가 정말 죽게 되거든 그때 다시 꼭 함께 잘 보관해주십시오.”

베로니아는 시카르에게 고생했다며 그 어깨를 두드려주려다 다시 손을 거두었다.


“그런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오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공주 저하.”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할머니부터 찾아봬야죠. 손자가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비춰드려야 할 테니까요.”

“나는 공작이 방법을 찾을 것이라 믿겠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내 남편 곁에 있는 네 관을 빼가거라.”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기를 그도 간절히 빌었다.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부디 지금과 같지 않기를.

***

시카르의 죽음으로 인해 궁 안은 한없이 어둡고 무거워졌다.

그의 부고를 들은 안드레아는 그대로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고, 공작저에서부터 함께 했던 수많은 사용인 역시도 한동안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든든한 오른팔과 같은 양부를 잃은 키안은 아침부터 내 방을 찾아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도 할까 하는데, 어떠세요?”

입맛도 없었고 산책할 마음도 나지 않았지만 날 위해 뭐라도 해보려는 키안의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애써 기운 있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안은 시종이 자신의 음식 위에 소금을 뿌리지 못하게 하였다.


“앞으로 내가 먹는 음식에는 소금을 많이 뿌리지 말도록 해라.”

마지막에 시카르가 했던 잔소리가 마음에 걸린 탓이겠지. 그런 모습을 보니 더 마음이 쓰렸다.

키안은 밥을 먹는 동안에도 내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하고 있었다.


“국왕. 난 괜찮으니 너무 내 걱정은 마세요. 무엇보다 나보다 국왕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

이미 발리제를 한 번 보낸 탓인지, 아니면 나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키안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괜찮아야 저도 괜찮아요. 제가 어머니를 더 잘 모실게요.”

매일 내게 감동을 주는 키안은 저도 힘든 시간일 텐데도 어떻게든 나를 위로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키안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내 걱정은 말고 앞으로 왕비가 될 루시를 더 많이 챙겨주도록 하세요. 루시도 유모가 없어서 많이 힘들 테니까요.”

키안은 나를 달래듯 내 허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사랑해요.”

울컥한 마음에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아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키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점심 때 레이독스와 약속을 잡은 탓에 키안과 오래 산책을 할 수가 없었다.


“국왕과 더 산책을 하고 싶지만, 후작님과 약속을 잡아서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머니. 그럼 저희 내일도 식사 후 산책할까요? 점심 후 가벼운 산책이 심신에 좋다고 해서요.”

그런 것까지 신경 써주는 키안이 내심 더 고마웠다. 매일 나에게 감동을 주는 키안.

나는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않고 있는 키안의 손을 매만져 주었다.


“그래요. 우리 그렇게 해요.”

키안을 보낸 후 궁으로 돌아오니 레이독스가 이미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레이독스의 얼굴은 여전히 수척했다. 그가 볼 때 내 모습도 저럴까.


“많이 힘드시죠……?”

“공작 부인께서도 많이 힘드시지요…….”

“힘들죠.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눈치를 보느라 해야 할 일을 못 하게 하면 안 되겠죠.”

레이독스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죄송합니다. 제가 공작부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후작님을 부른 건 다름 아니라, 헤르시아와 아론 때문이에요.”

“아론과 헤르시아 님이요?”

“아론이 후작님께 주례를 부탁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 후작님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결혼식을 미룬 상태죠. 헤르시아의 성격으로 보건데 저 때문에 또 결혼식을 미루겠죠. 하지만 전, 두 사람이 저희들 때문에 결혼식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레이독스는 아차, 싶었는지 낮게 탄식했다.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그럼 후작님께서 아론을 직접 만난 후 결혼식을 진행하라고 말씀해주세요.”

“네.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공작부인.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이심전심이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그 마음을 모를 수가 있을까.

슬픈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 슬픔이 다른 이들에게 전염되기를 나는 원치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행복을 누려야 할 때니까. 내가 항상 강해지길 바랐던 시카르의 말처럼 이젠 내 스스로 강해져야 하니까.

그것만이, 그가 죽었어도 그를 계속 사랑하는 방법일 테니까.

***

얼마 전 레이독스와 함께 대신전을 찾긴 했지만, 제 할머니를 만날 시간도 없이 금세 길을 떠나야 했던 시카르는 이번엔 제 할머니 힐리스부터 찾았다.

혹시나 누군가 자신을 봤다는 얘기를 흘리고 다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카르는 후드를 길게 내려쓰며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그래서 힐리스는 처음엔 시카르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그가 후드를 올리고 나서야 누군지 알겠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 오랜만이에요.”

 

 


“오. 시카르. 이게 얼마 만이냐. 어떻게 된 것이 이곳에 내 손자인 너보다도 유라가 더 자주 오는 것 같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온 것이냐.”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요.”

“유라와 싸운 건 아니고?”

“우리가 왜 싸워요. 안 싸워요. 할머니. 부탁이 있는데, 아내한테는 제가 여기 온 것을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힐리스는 가만히 보다가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 말을 잘 들어야 가정이 화목한 거다. 시카르.”

“늘 잘 듣고 있어요. 할머니. 근데 이번 한 번만은 아내 말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풀어야 한다. 알았지? 시카르?”

“물론이에요. 할머니.”

시카르는 겉으로 미소 지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악물었다.


“쉬고 계세요. 할머니. 저녁때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 그러렴.”

 

***

힐리스를 만나고 시카르가 간 곳은 대신전의 뒤뜰이었다.

아무도 없는 텅빈 뒤뜰에 들어선 시카르는 주변을 살피다 적당한 벤치에 차분히 앉았다.

그러자 곧 나무에서 비카가 뛰어내려 앉았다.

비카는 넌덜머리 난다는 얼굴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지긋지긋한 놈. 약속대로 네 놈이 죽기 전엔 반드시 맹약을 파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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