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악역의 사랑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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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악역의 사랑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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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악역의 사랑법 (2)
2022.12.15.
사실 시카르는 비카의 맹약을 파기해주지 않았었다.
시카르가 죽었음에도 비카가 살아 있는 걸 유라가 보게 된다면 그의 죽음을 믿지 않을 것이기에 맹약을 파기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맹약이 지속된 상태에서 시카르 본인이 죽는다면 비카도 함께 운명을 같이했기에 그전에 반드시 맹약을 파기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결국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바보 같은 공작.”
비카는 시카르를 비웃듯 혀를 찼지만 비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고작 평범한 인간 하나 때문에 죽기를 작정하는 게 우스워서 한 말이다.”
“누군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리는 그런 심정을 넌 모르겠지.”
“다른 의미로 조금은 알 것 같긴 해. 네가 죽어버리면 조금 심심할 것 같긴 하거든. 그 바보 같은 듀리온이 나만 졸래졸래 따라다닐 것 같아서 말이지.”
“그건 그렇고, 내가 부탁한 건 좀 알아봤나?”
“검은 눈의 인간들을 말하는 거지?”
“그래. 멀리 보고 멀리 듣는 네 눈과 귀라면 나보다 빠르게 찾을 수 있겠지.”
비카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네 말이 맞아. 그래서 이번에 아주 재미있는 걸 발견했거든.”
“재미있는 거?”
“네가 죽도록 찾아다니던 그 물건이 여기 있던데?”
“내가 죽도록 찾아다니던 그 물건……?”
비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시카르를 보며 맥이 빠지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그것 때문에 너와 맹약을 맺게 됐는데, 정말 기억이 안 나?”
시카르는 비카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설마 고대의 부활서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 물건이 여기 있던데? 하지만 그게 있어도 이제 네 부모님은 살릴 수 없어. 이미 죽고 백골이 된 시체는 살릴 수가 없다더군. 대신 네가 죽으면 널 살릴 수는 있겠지.”
“그래서 그 물건이 지금 어디 있는데?”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 네가 저주로 죽는다면 네가 널 살려줄게. 대신 너도 내게 뭔가를 하나 해 준다면 말이야.”
“네가 나한테 원하는 게 다 있는지 몰랐군. 비카.”
“정령을 지배하는 네 능력을 내게도 줘.”
비카의 눈빛에서 어떤 거대한 야심이 보이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비카는 그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도구 중 하나로 그 능력이 꽤 쓸만하다 여겼을 뿐이었다.
“우리 종족 고유의 능력을 달라는 말인가?”
“그래. 그게 있으면 적어도 다시는 너 같은 놈한테 끌려다닐 일은 없겠지.”
하지만 시카르는 시타르 종족이 가진 고유의 능력을 비카에게 전수해줄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대의 부활서가 있다 한들 그는 그렇게 살아날 마음이 없었다.
“내가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저주는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내 저주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렇게 되면 유라가 사라진다. 그러니까 내가 죽고 살고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지. 유라가 이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것만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꽤 좋은 정보라고 생각했는데 쓸데없는 정보였군.”
“아니. 그 정보는 꽤 쓸만했다.”
시카르는 비카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좋은 걸 알아냈어. 장하군. 비카.”
비카는 징그럽다는 눈으로 시카르를 쳐다보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 표정은 뭐야. 나 보면서 웃지 마. 네가 날 보고 웃으면 소름 끼쳐.”
“그 물건을 찾아야겠다. 그 물건은 지금 어디 있지?”
“어차피 쓸모도 없는 물건은 찾아서 뭐하게?”
시카르는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길에 올렸다.
“잊었나? 발리제의 시신이 전혀 부패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야.”
비카는 시카르를 보며 미친놈이 드디어 더 미쳤군, 이라고 중얼거리다 웃으며 말했다.
“그 귀여운 국왕이 좋아는 하겠군.”
“발리제가 살아난다면, 유라도 내게 치료받기를 덜 강요하겠지. 키안의 곁에 내가 없어도 제 친부가 있을 테니 말이야. 그렇게 되면 유라의 곁에 좀 더 머물 수 있겠어.”
비카는 소름이 돋는다는 얼굴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넌 정말…… 미친놈이구나?”
***
“공작부인…….”
헤르시아는 참으로 민망하다는 얼굴로 눈물을 툭툭 떨구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 좋자고 결혼이라니요. 안 될 말이에요. 공작부인. 공작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결혼이라니요. 그럴 수 없어요…….”
헤르시아는 정말 그 명을 거둬 달라는 듯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클지…… 제가 다 짐작은 못 한다고 해도 공작부인과 이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만큼은 허락해주세요. 공작부인께서 정말 더 편안해지셨을 때. 그때는 제가 먼저 공작부인께 결혼 소식을 전해 드릴게요. 네?”
“슬픔은 이 만큼 나누었으면 됐어요. 저는 헤르시아를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공작님도 바라지 않을 테고요.”
항상 내가 씩씩하길, 강하길 원했던 시카르였으니까.
내가 슬픔 속에 빠져 사는 것보다 이전처럼 살기를 더 원하고 바라고 있을 테니까. 슬픔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공작부인…….”
헤르시아는 내 손을 잡으며 눈물을 훔쳤다.
“아론과 결혼하길 그렇게 원하셨잖아요. 이제 다 준비됐는데 우리 때문에 또 두 분이 어긋나길 바라지 않아요. 제 마음 아시겠죠?”
헤르시아는 내 무릎에 기대 한참을 울었다.
“저를 보살펴주시는 공작부인의 은혜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드디어 제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헤르시아를 볼 수 있겠는걸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의 신부의 될 거예요. 헤르시아.”
헤르시아는 눈물을 닦으며 막상 닥칠 결혼식이 걱정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제 결혼식에 오실 분은 공작부인밖에 없어요. 서연 님도 안 계시고 로엔 님은 바쁘시고…… 비카 님은 이제 영영 떠나셔서…….”
이제 정말 올 사람이 없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두 다 흩어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참석할 거예요.”
여전히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직도 문전으로 하례물을 보내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 시녀인 헤르시아의 결혼식에도 당연히 참석할 것이다.
“다음에는 아론과 함께 인사드릴게요. 공작부인.”
“아니, 다음에 아론과는 결혼식장에서 뵀으면 해요. 겨울이 오기 전에 야외에서 하는 결혼식이 아주 근사할 것 같아요. 참, 그리고 로엔 님께는 제가 서신을 보내보도록 할게요.”
“아니에요. 로엔 님께서도 바쁘실 텐데요…….”
“바빠도 친구의 결혼식에는 참석해야죠. 오늘은 이만 가보도록 하세요. 헤르시아. 이제 결혼식 준비를 시작해야죠.”
헤르시아는 내게 크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퇴근했다.
어쩌면 정신을 딴 곳에 빼놓고 싶어서 헤르시아에게 결혼식을 하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일전에 헤르시아가 나와 시카르에게 자신의 결혼식 때 입고 와주길 바라며 선물한 드레스를 살폈다. 드레스 옆에는 시카르의 수트도 같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나란히 옷을 차려입고 헤르시아의 결혼식에 가길 바랐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된 사실이 너무 슬펐다.
매일 곁에 있던 시카르가 없으니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흐르고 이렇게 옷장을 뒤적이다가도 눈물이 흘렀다.
툭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울컥울컥 쏟아지고 자주 멍해지기를 반복하게 된다.
슬픔이란 것은 내가 각오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가혹하고 아픈 것이었다.
하지만,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가 날 위해, 내가 이곳에 남기를 간절히 바라서 죽음을 택했으니까.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내가 보다 더 키안과 함께 잘 살아야 할 테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
“가서 눈물 닦아줄 수 있다면…….”
비카와 함께 시카르가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창안으로 유라를 바라보는 시카르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비카는 그런 시카르의 등을 밀어 버릴까 하다가 결코 혼자서는 안 떨어질 놈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고는 그를 밀려던 손을 내려놓았다.
“뭘 알아보러 온다더니, 마님을 보러 온 거였어?”
“잘 지내는지 봐야 마음이 편하니까. 그리고 덕분에 좋은 정보도 하나 알아냈고.”
“좋은 정보?”
“곧 헤르시아의 결혼식이 열릴 모양인데, 그때 로엔과 제르미가 이곳에 있는 동안 고대의 부활서를 빼내면 될 것 같군.”
비카는 이놈이 하는 말이 정말 진심인지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진짜 발리제를 살리기 위해 그런 모험을 할 생각이야? 만약 일이 성공한다고 해도 대신전에서 널 가만 안 둘 텐데?”
“어차피 죽을 놈을 가만 안 두면 저들이 어쩐단 말이지? 그딴 건 대단할 것도 없다. 유라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으니까. 더불어 키안의 친부도 찾아줄 수 있으니 내겐 그보다 더 간절한 일은 없겠지. 헌데, 부활서는 정확히 누가 갖고 있지? 역시 대신관의 방에 있는 건가?”
“그것까진 몰라. 어제 말했지만, 나한테 네 능력을 나눠 주겠다고 약속해. 그럼 나도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네게 줄 테니까.”
시카르는 그거 정말 웃기다는 듯 고개를 돌려 비카를 쳐다보았다.
“비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네 기억을 볼 수 있다. 굳이 너와 거래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
비카는 아차 싶은 얼굴로 시카르를 쳐다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시카르는 비카의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비카가 고함을 치며 팔을 흔들어 봐도 시카르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잡고 있는 비카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비카는 시카르의 명을 따라 유라에게 맹약이 파기되었음을 알리고 곧장 대신전으로 와 은거중이었다.
다크엘프 혼혈인 비카는 툭하면 나무에 앉아 쉬는 게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가 밝은 비카에게 고대의 부활서를 두고 오가는 대화가 들렸다. 한 사람이 로엔인 건 확실했지만 다른 한 사람의 목소리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곳에 바로 고대의 부활서가 있다.”
“고대의 부활서라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고대의 그 물건을 뜻하는 것입니까?”
“레카도르의 혈통이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초대 왕이 고대의 부활서를 이곳 대신전에 맡겼지. 지금 레카도르의 유일한 왕족이라곤 현 국왕뿐이니까 국왕을 잘 지켜봐야 한다. 레카도르 왕족의 혈통이 끊기지 않게 국왕을 잘 지켜내야 하는 게 우리의 임무기도 하니까. ”
“이, 이런 말씀을 왜 제게 해주시는 겁니까.”
“네게도 이제는 알려줘야 할 때가 왔으니까. 하지만 이 비밀이 결코 다른 사람에게 새어나가게 하면 안 될 것이다.”
비카의 기억을 모두 확인한 시카르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고대의 부활서가 신전 안 어딘가에는 확실히 있다는 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