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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악역의 사랑법 (3) (162/197)


162화. 악역의 사랑법 (3)
2022.12.19.


시카르는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대신관의 목소리였다.


“대신관이군. 대신관의 몸을 만질 수는 없을 테니. 로엔의 기억을 살펴보면 되겠군. 다행하게도 레이독스가 제르미와 로엔에게는 내가 기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발설하지 않았더란 말이지. 그런 거 보면 후작이 입이 참 무겁단 말이야.”

비카는 으르렁거리며 시카르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치사하게 강제로 기억을 보다니.”

“어차피 네 기억을 볼 수 없었다면 계약을 파기하지 않겠다고 협박해서라도 알아냈을 것이니 억울해 하지 마라. 약속은 지킬 테니까. 어차피 넌 나와의 맹약만 파기하면 그만이지 않나?”

“네 능력도 갖고 싶다고. 내가 이런 고급 정보를 알아냈으면 너도 그 정도는 내게 해줄 수 있잖아.”

“그건 네 욕심이지 내가 네 욕심까지 채워주길 바라는 것조차도 내 욕심일 테고.”

아무래도 시카르가 알려준다고 할 것 같지 않자, 비카도 쉽게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도 순순히 널 도와주진 않을 거야.”

“그럼 나도 맹약을 파기해주지 않으면 되겠군.”

“너, 너. 정말 같이 죽자는 거야?”

“맹약을 할 때부터 내게 순응하겠다고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란 소리다.”

비카는 시무룩한 얼굴로 시카르를 보며 투덜거렸다.


“이래서 인간들과는 약속이란 것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자꾸만 망각하는 것 같은데 너도 반은 인간이다, 비카.”

비카는 더는 말하기 싫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린 채로 시카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시카르는 유라가 잠드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

아무리 로엔과 친하다고 해도 신관의 손을 함부로 잡기란 쉽지 않았던 시카르는 고심 끝에 로엔의 손을 덥석 잡으며 구걸하듯 말했다.


“로엔. 부탁인데 헤르시아의 결혼식 때 가주었으면 한다. 가서 내 부인이 잘 지낼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을 해주면 내가 더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로엔과 제르미는 당황하긴 했지만, 시카르의 상황이 절박한 것을 알고 있기에 그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로엔은 둘도 없이 애처로운 사람을 보듯 시카르를 보며 안쓰러운 눈으로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공작부인의 마음을 잘 달래드리고 올게요.”

“고맙다. 로엔.”

물론 유라가 걱정되는 것은 맞았지만 지금 시카르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대신할 발리제를 되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로엔으로부터 시카르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대신관의 방은 생각만큼 패쇄적이지 않았기에 그 어떤 비밀이 숨어 있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결국 로엔의 기억을 들여다봐도 그 중요한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시간도 없는데 되는 것도 없군.”

“정작 중요한 물건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만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엄폐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만한 곳?”

“궁금하면 나에게 네 능력을 나눠준다고 약속해. 그러면 내가…….”

하지만 시카르는 비카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영특했다.

시카르는 곧장 대신전의 중앙홀로 내려갔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중앙에 커다란 분수대와 각종 신을 상징하는 조각품들이 자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

시카르는 이곳에 고대의 부활서가 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그런데 어디에? 대체 어디에 둔단 말인가?


“비카. 너라면 어디에 두겠어?”

“앞으로 나한테 묻지 마. 난 대답 안 해줄 거니까.”

막상 중앙홀로 나오고 보니 더욱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차라리 대신관의 기억을 보는 게 더 빠를 것이었다. 하지만 대신관의 몸을 만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대신관과 접촉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어떻게 해서든.

그때, 밖에서 추수감사절 주머니를 나누어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수감사절 기념 씨앗을 나누어 드리는 중이니 놓치지 말고 받아가세요!”

그제야 한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추수감사절에는 많은 신관이 농가 봉사를 하기 위해 신전을 비운다.

그때, 반드시 대신관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 만큼 큰부상을 입어야만 했다.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대신관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런 계획을 들은 비카는 세상 둘도 없는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미친 짓은 공작이 다 하는 것 같군.”

“천재적 발상이라고 해주면 좋겠군. 비카.”

“그 이후는 생각 안 해? 정말 죽을 작정은 아니지?”

“죽을 작정이다. 네가 날 따르지 않으면 언제든 같이 죽을 준비도 돼 있단 소리지.”

그 말은 곧 같이 죽고 싶지 않으면 자신을 잘 도우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비카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알았어. 뭘 도와줄까?”

“신전 지하에 마물을 가두어 놓은 곳이 있다. 그중 키마이라 하나만 풀어라. 너라면 신관들을 재운 후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

“키마이라한테 상처만 입으려다 잿더미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키마이라의 입을 막는 쇠구슬도 신전에 있으니까 대신관이 쇠구슬을 들고 나타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그동안만 잘 버티면 된다는 소리지.”

“네가 다칠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고! 그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 줄 알아?!”

“그러니 너도 나와의 맹약을 깨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환장하겠네.”

어차피 못하겠다고 해봤자, 그럼 같이 죽는 수밖에 없다고 할 놈이라. 비카는 제 살을 베는 심정으로 시카르의 계획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시카르의 말처럼 신전 지하에는 키마이라뿐 아니라 여러 마물들이 봉인돼 있었다.

지금껏 대신전에 오는 사람들 중에 부러 마물의 봉인을 푸는 미친 인간들은 없었다.

왠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비카도 지하에 봉인된 마물들을 보고 나니 정말 이 일을 해야 하는 건지 회의감이 들 정도였지만, 시카르를 떠올리며 미친놈의 손에서 살아남으려면 저도 미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추수감사절 당일.

고위 신관들 대부분이 근처 마을을 축복하기 위해 다니느라 신전을 비우는 날이었다.

시카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힐링 포션을 미리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비카는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너 같이 미친놈이 가족이 생기니 이런 미친 짓이 자연스러울 정도네.”

“아마 넌 나를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하겠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준비됐으니 출발하지.”

비카는 시카르의 뒤를 따르며 차라리 저놈이 키마이라에게 죽었으면 싶었다가도 운명이 연결된 것이 떠올라 제발 죽지만 말라고 빌어야 하는 제 자신이 처량할 정도였다.

지하에 도착한 후 비카는 보초병들을 하나둘씩 잠재웠다.


“보초병이라 해도 이들에겐 모두 신력이 있어서 오래는 못 재우니까 빨리 끝내야 해.”

시카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마이라가 봉인된 상자를 꺼내 들었다.

단단한 철로 된 상자는 결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건했지만, 이런 상자를 여는 법쯤이야 이미 신관들의 기억을 통해서 본 탓에 어렵지 않았다.

그 작은 상자를 들고 다시 지하를 빠져나오기까지 모든 것이 순탄했다.

시카르는 대신관의 방 창문이 내다보이는 곳에서 마물을 풀었다.

그 작은 상자 안에서 키마이라가 잠이 덜 깬 얼굴로 걸어 나오다가 시카르를 보며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키마이라의 염소 머리는 비카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고, 키마이라의 뱀 꼬리는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가듯 혀를 내밀었다.


“크릉!!!”

시카르는 주머니에 있는 힐링 포션을 만지며 미소지었다.


“죽지만 말자!”

비카는 제 이마를 손으로 내리치며 시카르와 함께 키마이라를 향해 돌진했다.

죽지는 않아야 하지만 죽을 정도의 부상이어야 대신관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카르는 대신관이 오기 전까지 키마이라를 상대로 버티며 어떻게든 큰 부상을 만들어야만 했다.

키마이라의 앞발이 시카르의 얼굴을 향해 오는 것을 보며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대신관이 오기 전까지 키마이라와 대적할 힘은 남겨둬야만 했다. 그전에 죽어버린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키마이라가 그런 시카르의 사정을 봐줄 리는 없었다.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든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주듯 키마이라는 또다시 시카르를 향해 발톱을 세우고 날아들었다.


“크르릉!!”

고막을 찢을 것만 같은 우레를 쏟으며 또다시 키마이라의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날카로운 키마이라의 앞발톱이 시카르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피해! 이 멍청아! 거긴 맞으면 죽어!”

행여라도 시카르가 치명상을 입을까 봐 놀란 비카가 달려와 키마이라의 허리를 향해 단검을 꽂으며 고함치는 소리였다.


“어딜 맞아야 덜 아플지 각을 재고 있는 것뿐이니 쓸데없이 끼어 들지마!”

비카는 기분 나쁜 얼굴로 키마이라의 허리에 꽂아 넣었던 단검을 다시 빼내며 소리쳤다.


“내가 말했지! 죽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죽을 때 죽더라도 나는 놔주고 죽으라고 했지!”

비카의 말대로 치명상을 입으려다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었다. 시카르는 그 적당한 선의 간극을 좁히기가 힘들다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요란 떨지 마라. 비카.”

몇 번 더 시도해보면 적당히 치명상을 입을 방법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대신전의 신관들이 이 소란스러운 사태를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신관들이 나타나면 치명상을 입기 전에 이미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는 모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시카르는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키마이라의 발톱을 향해 몸을 날렸다.

키마이라의 발톱이 시카르의 뱃가죽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는 죽을 만큼의 고통을 느끼며 배를 붙잡았다.

비카가 경악하듯 비명을 내질렀지만, 시카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해냈다.’

시카르의 머릿속은 해냈다는 생각과 여기서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정도면 대신관이 저를 살려주기 위해 손을 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카르는 자신의 뱃가죽이 찢어지는 걸 보면서도 웃음이 났다.

고통은 지독했지만 견뎌야 했다. 정신을 잃는 순간 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정신을 잃는다고 해도 대신관의 기억을 읽은 후여야 했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을 만큼 고통이 극심해지고 있었지만, 시카르는 죽을힘을 다해 견뎌내고 있었다.

오직 키안에게 제 아빠를 다시 돌려줄 일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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