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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악역의 사랑법 (4) (163/197)


163화. 악역의 사랑법 (4)
2022.12.22.



 


“걱정이 많이 되시겠지요.”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시카르를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비카의 모습에 고위 신관이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비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은 시카르가 대신관의 기억을 읽기 전에 의식을 잃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대신관은 시카르를 치유하기 전 키마이라의 입안에 쇠구슬을 집에 넣느라 먼저 바빴다.

그동안 시카르가 의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자꾸만 두 눈을 부릅뜨고 있긴 했지만, 출혈이 큰 탓에 혈압은 자꾸만 떨어져 갔다.

대신관이 키마이라를 다시 봉인하고 돌아왔을 때 시카르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비카는 그가 대신관의 기억을 읽었는지 의식을 잃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공작이 절호의 기회를 놓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워낙 부상이 큰 탓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런 속 사정을 알 리 없는 고위 신관은 미안한 얼굴로 비카를 볼 뿐이었다.


“저희가 정말 죄송합니다. 어쩌다 지하에 있는 마물의 봉인의 풀렸는지 원인을 찾고 있는 중이니 경위가 밝혀지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전에 대신관님께서 사과의 뜻을 밝히시며 공작님께서 쾌차하시는 대로 사죄 인사를 올리겠다 하셨습니다.”

곧이 그 원인을 밝히지 않기를 더 바라는 비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공작님이 무사하시니 저희는 그걸로 됐습니다.”

“아닙니다. 대신관님께서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마물의 봉인이 풀린 일은 매우 큰 일이니 신전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이제 쉬셔야 할 것 같으니 이만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진통제는 이미 충분히 놓아 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깨어나셔서 고통을 호소하시거든 불러 주십시오.”

“그러죠.”

비카는 고위 사제가 방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자마자 시카르의 뺨을 치기 시작했다.


“공작. 공작. 일어나봐. 어? 너 지금 이렇게 정신을 잃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뺨을 때려도 시카르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몇 번 더 그를 깨우던 비카는 저도 지쳐 자리에 털썩 앉았다.


“완전히 혼수상태인가. 아, 몰라. 난 분명히 너 깨웠으니까 네 계획이 실패로 끝나든 말든 이젠 내 알 바 아니야. 난 할 만큼 했어.”

비카는 나 몰라라 하듯 시카르를 내버려 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공작이 제 기억을 보고 절 깨우지 않았다고 늘어질 게 갑자기 눈에 훤했다. 그래서 비카는 구시렁거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시카르를 흔들었다.


“공작. 일어나. 일어나라고 좀.”

그렇게 붙잡고 늘어지듯 몇 번을 더 흔들자 시카르가 슬며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제는 비카도 지칠 만큼 지쳤기에 그녀는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너도 이제 봤지? 난 분명히 너 깨웠고 할 만큼 했어. 그러니까 뭐라 하지 마. 알았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비카는 피곤에 지쳐 잠에 들었다.

그렇게 얼마쯤 잠에 빠져 있을 무렵 시카르가 깨어났다. 시카르가 깨어나는 기척에 눈을 뜬 비카는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공작. 괜찮아? 네 몸에 피가 절반 이상이 빠져나가서 너 정말 죽을 뻔했대. 네가 미리 힐링 포션을 먹어서 대신관께서 살릴 수 있었던 거래.”

시카르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물.”

비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물 찾는 걸 보니까 죽을 정도는 아닌가 보네.”

비카는 물을 한 잔 따라주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됐어? 기억은 본 거야?”

시카르는 비카가 주는 물을 받기 위해 일어서려 했지만 허리 부상이 심해 결국 일어서질 못했다.


“아직은 허리에 힘을 줄 수가 없다. 등 뒤로 베개 좀 더 받쳐라.”

비카는 베개로 시카르의 얼굴을 가격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의 등 뒤로 베개를 집어넣었다.


“이제 말 좀 해봐. 기억은 봤어? 어?”

시카르는 기운 없이 입을 열었다.


“네 짐작은 완전히 틀렸더군. 비카. 부활서는 대신관의 방 침실에 있다.”

“그, 그래? 거기는 너무 뻔한 장소잖아?”

“뻔한 장소지만 안전한 장소이기도 하지. 아무나 그 방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그 방에서 보관하는 것 같군. 그 방은 신관 한 명이 대신관의 방을 청소할 때에나 들어갈 수가 있다.”

시카르의 계획은 이랬다. 대신관의 방은 그 방을 청소하는 신관만이 들어갈 수가 있고, 그럴 땐 한 달간 방 출입을 허가받은 고유의 신성력이 필요하다.

신관이 대신관의 방에 들어갔을 때 로엔이 급히 찾는다고 말한 후 신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부활서를 가지고 나와야 했다.


“그럼 뭐야. 로엔과 제르미는 전혀 견제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

“그렇지. 오히려 그들이 헤르시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전에 일을 치러야겠지.”

로엔과 친분이 있는 시카르의 신분이 그대로 노출이 돼야 했기 때문에 부활서가 사라진다면 시카르는 의심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카는 그 계획에 찬성할 수가 없었다.


“그럼 네가 범인이라는 게 그대로 노출이 되잖아?! 그 이후는 어떡하려고 그래?!”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 짓을 벌였다가 네 할머니도 쫓겨날 수 있어!”

“내 할머니라는 이유 때문에 병든 노인을 쫓아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공범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난 거기서 빼줘.”

“네게 피해가 가지는 않게 하겠다. 다만, 내가 부활서를 찾기 전에 신관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 시간만 끌어라.”

“그건 내가 개입을 하는 건데 어떻게 피해를 안 입어?!”

“네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가 코앞이니 그 정도는 나를 도와야겠지. 대신전에서 네게도 죄를 묻는다면 넌 내 협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자백해라.”

“너 같으면 그 말을 믿겠냐? 믿겠어?”

시카르를 돕는 일 따위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대신전의 물건을 빼낸다면 대륙에 존재하는 레페르 신전의 수배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레카도르의 국왕 키안일지라도 말릴 수 없을 터였다.


“국왕 생각은 안 해? 제 친부는 네 덕분에 살아날지 몰라도 제 양부는 대신전의 물건을 훔친 도둑으로 남게 될 텐데?”

“국왕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국왕의 행복이다.”

비카는 시카르가 완전히 맛이 갔다고 생각하면서도 키안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카 역시도 때때로 키안이 사랑스러워 보였으니까.


“너무 걱정은 마라, 비카. 대신전에서도 지금까지 고대의 부활서를 보관 중인 것을 밝힐 수가 없었던 만큼 다른 귀한 물건들도 보관 중이다. 그러니 부활서를 도둑맞아도 국왕에게 곧장 보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대신전의 수배를 피할 수 없겠지. 하지만 넌 이 일에 연루되지 않게 내가 손을 쓰도록 하지. 어차피 너까지 엮이게 된다면 나도 골치니까.”

운명을 같이하는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함께 이 일을 잘 해결해 나가는 방법밖에 없었기에 비카는 차라리 시카르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게 더 잘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돕고 싶었다.

하지만, 헤르시아의 결혼식 전날까지도 시카르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다음 날이면 로엔과 제르미가 신전을 비우고 당분간 레카도르에 있다가 오기로 했기 때문에 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오늘이 적기군.”

“아무래도 이 몸으로는 안 될 거 같아. 포기하자. 그냥.”

“부활서를 기어서 가지고 나오는 한이 있어도 포기는 어림없지.”

시카르는 기어이 덜 아문 상처를 이끌고 대신관의 방을 털기로 했다.

그동안 비카가 신관이 대신관의 방을 치우는 시간을 확인해준 덕분에 시카르는 그 시간에 맞춰 대신관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신관님. 로엔 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로엔 님께서요?”

로엔이 공작과 친하다는 것을 아는 신관은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신관은 안에서 나오지 않는 시카르를 보고 서 있었다.

시카르가 대신전에 전 재산의 절반을 기부한 일은 신관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신관들은 시카르에게 항상 선의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방 안에 있는 시카르를 보며 큰 의심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작을 부러 방에 두지는 않았다.


“공작님. 나오시겠습니까. 문을 닫아야 해서요.”

순순히 나가주면 좋으련만 신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신관이 끝끝내 버티고 서 있다면, 신관을 해치고 부활서를 빼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전에서 신관을 해치는 건 용서받지 못할 대죄였다.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부활서를 훔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때,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인지 때마침 시카르의 옆구리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시카르는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며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러자 신관이 달려왔다.


“고.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제가 상처를 좀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시카르의 상처는 하위 신관이 돌볼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시카르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신관님. 그것보다. 제가 지금은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그런데 잠시만 쉬게 해 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신관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금방 로엔 님을 모셔올 테니 조금만 쉬고 계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신관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시카르는 옆구리를 붙잡고 침대 밑을 뒤졌다.

침대 밑 공간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보관돼 있었지만, 대신관의 기억을 본 시카르는 금세 부활서를 찾아 손에 들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길목을 따라 고스란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되었다. 이제 발리제를 살릴 수 있다!’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흘러내리는 상황에서도 시카르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비카는 사카르의 부탁대로 밖에서 말을 붙잡고 대기 중이었다가 허리에서 피를 흘리며 걸어 나오는 시카르를 보며 뛰쳐나왔다.


“야이 미친놈아! 상처가 덜 아물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했잖아!”

시카르는 입술이 바짝 마른 상태에서 힘겹게 말했다.


“서, 설산으로 가자. 어…… 어서…….”

비카는 시카르의 등 뒤로 보이는 그의 핏자국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카르는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듯 고스란히 핏자국을 남긴 상태였다.


“하. 진짜 미친놈.”

비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시카르를 말에 태우고 고삐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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