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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악역의 사랑법 (5) (164/197)


164화. 악역의 사랑법 (5)
2022.12.26.


신관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에는 공작이 남긴 핏자국이 대신관의 침대 밑을 따라 흥건하게 고여 있었으니까.

핏자국은 신전 안이 아닌 밖을 향해 있었기에 신관은 당장 사람들을 불렀다.

때문에 대신관은 부활서가 사라졌다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레카도르로 떠나기 위해 준비 중이던 제르미와 로엔은 급히 대신관의 방으로 불려갔다.

대신관은 방으로 들어온 로엔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네가 이 일과 관련이 있을까 했는데 표정을 보니 그렇진 않은 것 같군.”

로엔은 대신관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신관님. 제가 관련이 있다니요?”

대신관은 매우 유감이라는 얼굴로 로엔을 쳐다보았다.


“너를 고위신관직에 임명하려고 했던 만큼 높이 평가했었다. 로엔. 하지만, 이젠 어렵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왜, 왜입니까. 대신관님.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블레이크 공작이 부활서를 가져갔다. 로엔. 물론 네가 이 일과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관이 자리를 비우게 된 이유가 네가 자신을 찾는다는 블레이크 공작의 부름 때문이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도 네가 블레이크 공작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대신전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이 일은 반드시 누군가의 책임이 따라야 하고 화살은 네게로 돌아가겠지.”

“…….”

“네가 한통속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네 손으로 직접 블레이크 공작을 잡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겠느냐?”

로엔은 블레이크 공작이 부활서를 들고 어디로 향했을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제가 책임지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신관들과 함께 공작을 추적해서 반드시 부활서를 되찾아오거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명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서둘러야 할 것이다.”

대신관의 방에서 나온 로엔은 추적을 나서기 전 제르미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번 일도 제르미 님께서 함께 가주셨으면 해요.”

제르미 역시도 부활서를 손에 넣은 공작이 어디로 갔을지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설산으로 가셨겠군요.”

“부활서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전에 어서 떠나야 해요. 우리가 한시라도 더 빨리 찾는 게 블레이크 공작님을 돕는 방법이기도 해요.”

“그런데 공작님은 이곳에 부활서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을까요.”

“제 생각엔 제가 대신관님과 대화한 것을 그 엘프분께서 들으신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그렇군요…….”

제르미는 시카르의 핏자국이 대신전 밖에까지 이어져 있는 것을 보자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운이 나쁘면 설산에 도착하기 전에 공작님께서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수도 있겠군요.”

그 몸을 이끌고 기어이 부활서를 훔쳐 대신전을 나서다니. 로엔도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우리가 더 빨리 서둘러야겠죠. 어서 가요.”

 

***

베로니아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출혈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카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허리를 칭칭 감고 있는 찢어진 천에서는 식은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시카르를 어깨에 들쳐메고 있는 비카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품속에서 부활서를 꺼내 들었다.


 


“고대의 부활서입니다.”

비카의 말에 놀란 베로니아는 그녀의 손에 있는 낡은 천조각 같은 것을 쳐다보았다.

고대의 부활서.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다고 전해져 오는 그것이었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베로니아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비카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정말 고대의 부활서란 말이냐?”

“공작이 목숨을 걸고 구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작을 살려주십시오. 공작을 살려주신다면 이것을…….”

비카는 말을 하다말고 입에서 흥건한 피를 쏟아냈다.

시카르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느끼며 비카의 생명도 점차 꺼져가고 있었다.


“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공작을 사, 살려 주십시오……. 공작을 살려야……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비카는 말을 하면서도 또 입에서 한가득 피를 쏟아내다,


“이놈이 죽으면…… 저, 저도 죽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어서…… 이놈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비카는 시카르와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베로니아는 생명이 꺼져가는 시카르를 향해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베로니아는 차분히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고대의 부활서 때문이 아니다. 둘 다 키안에게 소중한 사람들이기에 살려주는 것이다.”

시카르의 상처를 치료하고 출혈을 멈추자, 창백해 있던 비카의 안색이 돌아오며 그녀의 얼굴에도 핏기가 돌았다.

새하얀 눈밭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만 같았다. 베로니아는 들것을 가져와 두 사람을 그 위에 실었다. 그리고 집 안을 향해 들것을 질질 끌고 갔다.

방으로 이동한 후 두 사람을 각각 벽난로 앞으로 옮겼다.

온기가 돌자 비카는 이내 의식이 돌아온 듯 정신을 차리며 부스스 일어났다.

깨어나는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후 테이블에 앉아 차분히 차를 마시고 있는 베로니아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 저하.”

베로니아는 대답없이 차분히 자신의 앞에 있는 빈찬에 따뜻한 차를 따랐다.


“이리와 앉아 마시거라.”

비카는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어느 정도 생생한 것을 보니 시카르가 완전히 목숨을 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비카는 자리에 앉으며 베로니아에게 살려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공주 저하.”

“공작의 목숨을 겨우 구하긴 했지만, 당분간은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비카는 난처한 기색으로 쓰러져 있는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당분간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느 정도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까?”

“글쎄. 지금 공작은 혼수상태니 빠르면 며칠이고, 늦으면 몇 주가 되겠지.”

“공작은…… 발리제 님을 되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것을 구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그랬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베로니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이전과는 달라진 눈으로 누워 있는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공작이…… 내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고대의 부활서를 구했단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공주 저하. 지금쯤이면 레페르 신전에서 추적을 해오고 있을 것입니다. 몇 주…… 아니, 우리에겐 몇 시간밖에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 전에 공작을 깨울 방법이 없겠습니까?”

베로니아는 허탈한 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로서는 더는 그 어떤 방법이 없다.”

“그럼, 혹시 고대의 부활서를 사용하는 방법은 모르십니까.”

“저런 게 존재한다는 소문만이 있었을 뿐 그 실체를 본 사람은 여태 없었지. 나도 마찬가지다. 저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한 번 목표한 것은 어떻게든 해내려는 시카르였기에 이번 일이 실패하면 또 그런 위험한 미친 짓을 할 것이라는 걸 비카는 알고 있었다.


“이것을 구하기 위해 공작과 저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어떻게든 오늘 이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공작을 강제로라도 깨어나게 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내 남편을 살리는 일이기에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절박하다만, 애석하게도 방법이 없다. 마법사라도 있으면 그의 영혼이라도 깨우겠지만 그마저도 없으니…….”

덤덤하게 말을 하고 있긴 했지만, 안치실에 누워있는 발리제를 떠올리자 베로니아의 마음이 또 울컥거렸다.


“힘들겠구나……. 어쩌면 그것이 발리제의 운명일지도 모르겠지…….”

힘들게 구한 부활서가 무용지물이 되다니. 죽음을 각오한 보람이 전혀 없었다.


“이대로 신전에 붙잡히게 된다면 공작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서를 다시 돌려준다면 공작을 크게 벌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대신전에서 공작에게 큰 벌을 내리려 한다면, 그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주겠다.”

“정말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까?”

“공작이 내 남편을 살리기 위해 한 일이 아니라 해도, 우리 키안의 왕부이니 당연히 지킬 것이다. 그리고 잊었나 본데…… 너희는 이미 나를 한 번 구한 적이 있었다. 그런 너희를 내가 저버릴 수야 없겠지.”

베로니아 공주.

비카는 그녀가 냉정하지만 그만큼 이성적이고 허튼 말은 안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 말을 신뢰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공주의 말에 안심하기도 전에 이내 또 다른 걱정이 밀려왔다.

깨어난 시카르가 자신이 실패한 것을 알게 되면 또 무슨 짓을 꾸밀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

블레이크 공작이 신전의 중요한 보서를 훔쳐 달아났다는 명분으로 로엔은 대신전으로부터 함께 추적에 나설 신관들을 지원받고 대신관의 명에 따라 추적에 나섰다.

로엔의 부탁으로 그녀와 함께 설산을 향해 움직이던 제르미는 말 고삐를 다시 붙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제르미 님.”

“아무래도 결혼식에는 못 갈 듯하니 공작부인께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지금 이 와중에요?”

“제가 아니라도 로엔 님께서는 얼마든 공작님을 추적해서 잡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공작님은 꽤 부상이 심하니까요.”

“하지만 거긴 비카 님도 계시잖습니까.”

로엔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제의 친구가 오늘엔 적이 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비카 님은 공작님과 운명을 같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공작님이 위중한 상태가 되신다면 비카 님도 제 힘을 다 쓰지 못하실 겁니다.”

로엔도 그 말에는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공작은 손을 쓰지 않아도 얼마든 포위가 가능했다.

아니, 오히려 이쪽에서 공작을 살리기 위해 힘을 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긴 공작부인께서 우리에게 직접 초대장을 보내기도 하셨으니 공작부인께 불참 소식을 전하는 게 마땅한 도리겠죠.”

“그래서 저는 지금 당장 레카도르로 출발하려고 합니다.”

제르미는 신전과는 상관이 없는 몸이었다. 그가 신전보다 친구들을 더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로엔은 제르미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그렇게 하세요. 제르미 님. 마침 저도 공작부인이 마음에 걸렸던 참인데 그것이 도리인 것 같아요.”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로엔 님.”

제르미는 이내 말고삐를 돌려 레카도르로 향하는 척 내달렸다. 그리고 로엔의 무리가 보이지 않자, 말을 세운 후 새로 변신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 제르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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