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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악역의 사랑법 (6) (165/197)


165화. 악역의 사랑법 (6)
2022.12.29.


비행을 하게 되면 훨씬 빠른 속도로 설산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비카는 제르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를 경계하며 누워 있는 공작을 막아섰다.


“제르미! 신전에서 네게 고대의 부활서를 먼저 찾아오라고 시켰나?!”

하지만 경계하는 비카와 달리 베로니아는 침착했다.


“그런 것이라면 미련하게 혼자 오진 않았겠지. 마법사가 여긴 무슨 일이지?”

제르미는 베로니아를 향해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린 후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을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비카는 제르미의 뜻밖의 말에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는 풀지 않았다.


“왜지? 왜 우릴 도우려는 거지?”

“이유는 간단합니다. 친구니까요.”

비카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얼떨떨한 눈으로 제르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친구……?”

“네. 저는 저희가 친구라 믿고 있습니다.”

비카가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친구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는 동안 베로니아는 제르미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부활서는 손에 넣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법은 모른다. 혹시 너는 알고 있느냐?”

제르미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공주님. 제가 그것은 본적이 없기에 사용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 네가 보다시피 공작은 지금 목숨만 겨우 구한 상태다. 혹시 네가 공작의 정신을 깨어나게 할 수 있겠느냐?”

“할 수는 있겠지만, 이곳까지 날아오느라 마력과 체력을 많이 소비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공작님의 정신을 깨어나게 한다고 해도 오래 불러내긴 힘들 것입니다.”

그것만이라도 베로니아에게는 매우 희망적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그녀는 매우 침착해 보였지만, 베로니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떨고 있었다.

공작을 깨어나게 한다면 발리제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잠시라도 좋으니 공작을 깨워 보거라.”

그 순간 베로니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다. 긴장하며 지켜보는 것은 비카도 마찬가지였다.

곧이어 제르미의 두 손이 시카르의 머리를 향해 뻗어갔다. 그의 몸에서 세찬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주변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제르미가 뭐라고 좀 더 중얼거리자 유체이탈을 하듯 시카르의 정신이 깨어났다.

마치 그것은 영혼처럼 보였지만 영혼은 아니었다. 깨어난 정신이 시카르의 형상이 되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시카르는 짐짓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누워 있는 제 자신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 시카르는 자신이 죽은 것은 아닐까 잠시 의심했다.

제르미가 식은땀을 흘리며 설명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제가 마법으로 잠시만 공작님의 정신을 깨워 형상으로 보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시카르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군. 꼼짝없이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공작님은 무사하십니다.”

시카르의 목소리는 마치 허공에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공작이 고대의 부활서를 힘들게 훔쳐낸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린 이걸 사용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깨웠다.”

시카르는 그제야 자신을 왜 이렇게 깨웠는지 알 것 같았다.


“잘하셨습니다. 먼저 부활서를 손에 드십시오.”

베로니아는 시카르를 따라 부활서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저를 따라 하십시오. ???????????? ???????????? ????????????????…….”

그것은 고대언어였다. 왕족으로서 고대언어를 배우고 자란 베로니아에게는 익숙한 언어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시카르의 말을 곧잘 따라할 수 있었다.


“???????????? ???????????? ????????????????…….”

“????????????…….”

“????????????…….”

“???????????? ????????…….”

그때 시카르의 형상이 잠시 사라지는 듯했다가 다시 나타났다.

제르미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이, 이제 더는 버티기가 힘듭니다. 공작님. 어서 서두르셔야 합니다!”

시카르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는 쉬지 않고 고대언어를 읊었다.


“???????????? ????????????…… ???????????? ????????…….”

하지만, 언어를 말하는 사이에 시카르의 형상은 자꾸만 사라졌기에 언어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끊기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비카는 속이 타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고대언어를 흉내낼 수조차 없었다.

자신의 형상이 사라질 것을 직감한 시카르는 빠르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 반드시 외워야 합니다! 반드시! 부마님을 살리셔야 합니다!”

시카르는 자신의 정신이 사라지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주문을 전달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제르미는 지친듯 벽에 기대며 쓰러져 내려 앉았다.


“허억…… 허억……. 이제 끝났습니다. 더는 공작님을 붙들 수가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공주 저하.”

와중에도 침착하게 자신의 형상이 사라질 때까지도 오직 주문만을 빠르게 읊어낸 시카르 때문에 베로니아는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시카르가 남긴 주문을 몇 번이고 외쳤지만, 도저히 중간에 끊긴 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 외치던 베로니아는 지친 얼굴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그가 깨어나 다시 한번만 더 말을 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비카는 숨죽이고 베로니아를 보고 있다가 문득 발리제가 앞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주 저하. 부마 저하를 깨우려면 부마 저하의 시신 앞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문을 외우는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베로니아는 비카의 말에 동의했다.


“네 말이 맞다. 발리제의 시신 앞으로 가야겠구나.”

발리제의 안치실은 매우 추웠기에 베로니아는 두꺼운 외투를 챙기며 비카와 제르미에게도 하나씩 건네주었다.

바로 옆 안치실로 가는 동안 베로니아는 주문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며 반복했다.

발리제의 관 뚜껑을 연 베로니아는 잠을 자듯 누워 있는 발리제를 쳐다보았다.

막상 언제나처럼 평온하고 다정해 보이는 발리제의 얼굴을 다시금 보고 있자니 베로니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당신을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 다시 당신이 나를 보며 웃을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키안이 다시 당신을 만나게 할 수 있을까.’

베로니아는 눈물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발리제를 보며 주문을 읊었다.


“???????????? ???????????? ???????????????? ???????????? ???????????? ???????? ???????????? ????????????…… ???????????? ????????…… ???????????? ???????????? …… ????????!!!”

중간에 무슨 말이 들어갈지 모르는 탓에 몇 번이고 단어를 바꾸어 보았지만 손에 든 부활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켜보고 서 있는 비카와 제르미도 속이 타는 건 마찬가지였다.


“시, 시간이 없습니다. 공주 저하. 곧 신관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도착했다. 곧 있으면 이곳에 당도할 것 같군.”

비카는 이를 바드득 갈듯 미간을 찌푸리며 벽에 세워둔 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검 좀 빌리겠습니다.”

 

 

***

제르미는 급히 비카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이미 로엔이 신관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로엔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제르미를 보고 서 있었다.


“제르미 님, 여기서 지금 뭐하시는 거죠? 레카도르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친구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로엔 님.”

“친구요?”

“공작부인과 공작님께서는 저희를 맺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길리언을 몰아내기 위해 함께 의기투합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친구를 위해 연인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저는 단 한 번도 로엔 님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서로의 선택이 달랐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로엔 님이 이런 저를 이해해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로엔 님이 동료분들을 아끼고 보살피듯, 저도 제 친구들과 우정을 지켜야 하니까요.”

로엔은 제르미의 말을 곱씹듯 생각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르미 님은 친구를 위한 일이라면 레페르 신전의 적이 되어도 좋다는 말이군요. 레페르 신전의 적이 되면 저와도 적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레페르와 적이 되진 않겠습니다. 친구와의 우정을 무사히 지킨 후에는 레페르에서 내리는 처벌을 받을 생각입니다. 그것이 로엔 님을 위한 일이라면 무조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저를 한 번 희생하고 로엔 님을 위해선 제 전부를 희생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로엔은 슬픈 얼굴로 검을 빼어 들었다.


“결국 저와 검을 맞대겠단 소리군요.”

“죄송합니다. 로엔 님.”

로엔은 슬픈 눈으로 제르미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제르미는 반격하지 않고 두 눈을 감았다.

***

시간이 없다. 이제 밖에서도 더는 못 버틸 것이다.

베로니아는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발리제의 시신을 어루만졌다.


“당신이 깨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식사를 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어떡하지. 내 생에서는 내게 그런 행복은 허락되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해. 발리제…….”

그 순간, 베로니아에게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죽은 것들에 허락되지 않은 것. 그것은 삶.

시카르가 말해준 주문에는 허락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신관들이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친 것을 느낀 베로니아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 ????????!!!”

주문을 끝낸 후 베로니아는 자신의 손에 있던 고대의 부활서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활서는 스스로 발리제를 향해 날아가 불타오르며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부활서가 완전히 잿더미가 되며 사라지며 발리제의 주변으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베로니아는 그 순간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반짝이는 잿가루만 허공을 떠다닐 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역시 고대의 부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베로니아가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려 할 때, 발리제의 눈꺼풀이 꿈쩍거렸다.


“바, 발리제?!”

베로니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쩌면 발리제가 정말 살아날지 모른다는 기대와 감격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동안 발리제의 눈이 또 한 번 더 움찔거렸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베로니아는 이건 꿈이 아니라고 몇 번을 더 되뇌며 발리제를 보고 서 있었다.

그러자 이내 발리제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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