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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악역의 사랑법 (7) (166/197)


166화. 악역의 사랑법 (7)
2023.01.02.


로엔은 제르미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려치려다 멈춰 세웠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대체 공작님께 무슨 큰 신세를 졌다고 이러는 거예요?!”

“저는 그저 공작님을 이해할 뿐입니다. 공작님이 비록 대신전의 물건을 훔치긴 하였지만, 저라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살리기 위해서라면 똑같이 하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그것 때문에 저와는 적이 되었잖아요. 그건 괜찮냐고요.”

“저는 로엔 님을 향해 무기를 겨눈 적이 없습니다. 겨눌 생각도 없고요. 단지 로엔 님을 막으며 시간을 벌어볼 생각입니다.”

 

 
한동안 물끄러미 제르미를 노려보던 로엔은 서운한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정말 이기적이시다.”

“죄송합니다. 로엔 님.”

로엔은 뒤에 서 있는 신관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조금 떨어져 있는 신관들은 로엔의 지시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럼 시간만 벌어주면 되는 거예요?”

“네?”

“공주님이 부활서를 사용할 때까지 시간만 벌어주면 되는 거잖아요.”

제르미는 갑작스런 로엔의 제안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긴 하지만 로엔 님께서 왜…….”

“제가 제르미 님을 공격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제 마음이 이런 건 모두 신의 뜻일테고, 저는 신전의 명령보다는 신의 뜻이 더 중요하거든요.”

결국, 로엔의 말은 신전의 명을 따르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제르미는 그런 로엔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감격스러웠다. 그는 감동한 눈으로 로엔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로엔 님…….”

“그렇게 감동하지 말아요. 그냥 신의 뜻이 절 그렇게 인도하는 것뿐이니까요. 대신 고위 신관직은 고사하고 신전에서 쫓겨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제르미 님께서 제게 작은 재단 하나 차려주시겠죠?”

제르미는 다짐하듯 로엔을 보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쳤다.


“공작님이 깨어나시면 한번 간청해보겠습니다.”

그때 발리제가 잠들어 있는 안치실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왔다. 로엔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관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로엔 님! 뭐하십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로엔은 뒤돌아서 신관들을 향해 고험을 질렀다.


“안에 계신 분은 다름 아닌 국왕 전하의 모후이신 베로니아 공주님이시다. 공주님의 거처에서 일어날 불미스러운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협상 중에 있으니 잠시 기다리거라!”

“하지만 실기하시면 때는 늦습니다! 대신관께서 보서를 무사히 가져오라 하셨지 않습니까?!”

“이번 일의 지휘를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 잊었나?! 내가 상황을 면밀히 살핀 후 판단할 테니 잠자코 있거라!”

“로엔 님! 대신관께서는 우리에게 로엔 님이 망설이신다면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도우라 하셨습니다!”

신관의 표정은 비장했고 로엔은 더 버틸 수 없음에 탄식하며 제르미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뭐. 나쁘진 않아.”

대답을 한 사람은 제르미가 아닌, 비카였다. 비카는 검을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상황은 이미 끝난 것 같으니까.”

“그 말은 곧, 부마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입니까?”

제르미는 그것이 사실이냐는 듯 고개를 돌려 비카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부활서 말인데, 정말 효과가 기가 막히는군.”

 

***

발리제는 머리가 지끈거려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들기 전 누군가에게 머리를 가격당한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잠들기 전 마지막에 보았던 얼굴들을 떠올렸다. 그곳엔 파시움과 라페가 있었다.


“파시움! 라페!”

고함을 지르며 번쩍 정신을 차리자 제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베로니아였다.


“베로니아?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당신, 무사한 거야?”

베로니아는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을 채 닦아내지도 않고 그대로 발리제의 품에 안겼다.


“발리제!”

발리제의 두 손이 천천히 제게 안긴 베로니아의 등을 쓸어 내렸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베로니아를 품에 안은 발리제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베로니아…… 정말 당신이군. 정말 당신이야.”

하지만 여기서 미적거릴 정신이 없었다. 길리언이 또다시 베로니아를 추적할 것이다. 발리제는 베로니아를 품에서 떼어내며 다급히 말했다.


“베로니아. 지금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어! 길리언이 당신과 키안을 찾기 위해 이 설산마저도 쥐잡듯 수색 중이야! 어서 여길 피해야 해!”

하지만 베로니아는 꼼짝 않고 서서 발리제를 쳐다보았다. 발리제는 자신이 죽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베로니아는 다급하게 외치는 발리제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발리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길리언의 수하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저였다.


“아니야. 베로니아.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길리언의 수하들은 죽었어.”

“죽어……?”

“그래. 자세한 건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줄게. 지금은 우리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

발리제는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흔들었다.


“길리언의 수하들이 죽다니…… 누가 죽였다는 말이야?”

“블레이크 공작이 우리를 도왔어. 그래서 우리가 그를 도와줘야 해.”

“블레이크 공작이라면 길리언과 함께 폐왕을 밀어낸 자가 아니야? 그는 길리언을 지지하는 줄 알았는데…….”

“나도 다 설명해주고 싶지만, 말하자면 너무 긴 얘기가 될 거야. 하지만 우리에겐 지금 그렇게 한가롭게 노닥일 시간이 없어. 발리제. 어서 따라와.”

자신이 관에서 걸어 나온 것조차 모르고 있던 발리제는 몇 걸음을 더 걷고는 제 몸이 많이 굳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절이 뻐근해 오는 것을 느낀 발리제는 잠시 휘청거리며 베로니아의 어깨 위로 기대었다.


“이상해. 베로니아. 몸이 굳은 것 같아. 아무래도 그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한 모양이야.”

베로니아는 발리제가 꽤 오랫동안 관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에게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런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신전에서 공작을 잡아가지 못하게 그를 도와야 했다.


“조금만 더 힘내줘.”

“잠시만. 베로니아. 우리 키안은? 우리 키안은 무사한 거야?”

“응. 키안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마. 어서 나가자.”

 

***

그동안 관속에 있는 모습이 더 익숙한 발리제였다.

그가 한 걸음씩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있는 비카는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놀랍게 느껴졌다. 그것은 제르미와 로엔도 마찬가지였다.

비카는 헛웃음을 치고 씨익 웃으며 발리제를 쳐다보았다.


“내가 뭐랬어. 효과가 죽인다 그랬지?”

“정말 발리제 님께서 살아 돌아오셨군요.”

로엔은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설마했지만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믿기지가 않았다.

발리제와 함께 밖으로 걸어나온 베로니아는 제르미의 곁에 서며 로엔을 향해 말했다.


“보다시피 부마 발리제 타히곤이 깨어났다. 이제 부활서는 사용되고 없단 말이지. 이제 어떡할 셈이냐.”

로엔은 얼떨떨한 눈으로 발리제를 보다가 정신을 차리듯 대답했다.


“부활서가 소실되었다면 공작님께서는 봉인을 피하지 못하실 겁니다.”

결국 일이 그렇게밖에 될 수 없음에 베로니아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내가 신전을 막아야겠구나. 비카. 뒤는 내게 맡기고 너는 공작을 데리고 떠나라.”

로엔은 미간을 찌푸리며 제 뒤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신관들이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로엔은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비카님, 빨리 공작님을 대피시키십시오. 저도 더는 시간을 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비카는 로엔을 향해 알겠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보여준 후 베로니아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럼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저하.”

비카가 인사를 마치자 제르미가 그녀를 다급히 불렀다.


“비카님. 제가 공작님께서 몸을 숨길 곳을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비카가 어서 따라오라는 듯 자리를 뜨려 하자, 이번에는 발리제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발리제는 아직 사태가 확실히 파악되진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베로니아가 이들을 돕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이들을 도울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발리제는 예리한 눈으로 비카를 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정령을 좀 다룰 줄 아는 것 같은데, 내 말이 맞나?”

비카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발리제는 잘 됐다는 듯 미소지었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골짜기가 하나 있다. 거기에 썰매가 있으니 눈의 정령들을 불러내 끌고 가도록 해라. 그동안 나도 아내를 도와 너희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줄 테니까.”

제르미는 고마운 마음에 발리제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부마님.”

제르미는 떠나기 전 로엔에게 따로 인사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운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로엔은 손을 동그랗게 모아 보여주며 괜찮다는 듯 미소지었다. 제르미는 그런 로엔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신관들은 더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들은 비카가 베로니아의 거처에서 시카르를 데리고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앞으로 전진했다.


“블레이크 공작이다! 공작을 붙잡아라!”

누군가 소리쳤고 이내 다른 신관들이 모두 거처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베로니아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멈춰라!”

“비키십시오! 공주님!”

신관들 중에 우두머리는 없었지만, 그렇기에 누구 한 명을 설득할 수도 없었다.


“감히 누가 내 거처 앞에서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블레이크 공작은 대신전의 보서를 훔쳐 달아난 자입니다! 그를 비호하시다간 대신전의 노여움을 살 것입니다. 공주 저하.”

“대신전의 누구에게 노여움을 산단 말이지?”

신관들은 누구도 대답을 못 하였지만 베로니아에게 위압감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그걸 알지 못하겠느냐는 무언의 질문과도 같았다.


“공주 저하…… 진정 레페르와 척을 지려 하심입니까.”

“레페르가 레카도르와 함께함을 잊었는가?”

“저희는 오직 국왕 전하만을 보필할 뿐입니다.”

“내가 왕의 모후라는 사실은 모르는 듯 말하는군.”

“아무리 국왕 전하의 모후이실지라도 신전이 하는 일을 방해할 수는 없으십니다.”

곁에서 이를 듣고 있던 발리제는 이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레카도르 국왕의 모후라니? 그럼 우리 키안이 레카도르의 국왕이 되었다는 말이야?”

“그래. 키안이 국왕이야.”

발리제는 그 어떤 것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키안이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도, 레페르의 신관들과 대치 중인 이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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