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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믿을 수 없는 일 (2) (169/197)


169화. 믿을 수 없는 일 (2)
2023.01.12.


나는 키안이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두고 데이지 궁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베로니아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말에 그 자리에 더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시카르가 살아 있다고 한다.

그가 이런 일을 벌인 까닭은 내가 사라지는 게 두려웠고 나를 좀 더 보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큰 부상을 입은 그가 어디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지만, 제르미가 데려갔다는 말에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듀리온은 내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늘 내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듀리온 님.”

“네? 네. 마님.”

“공작님과 비카 님도 아직 맹약이 파기되지 않았다죠?”

“네? 네…….”

“공작님이 제가 이 모든 일을 비밀로 하라고 했겠죠.”

“죄송합니다. 마님…….”

“듀리온 님도 어쩔 수 없었겠죠. 괜찮아요. 이제 찾으러 가면 되니까.”

“하지만, 제르미가 데려갔다는 말고는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전 알 것 같아요.”

듀리온은 어떻게 그걸 아냐는 듯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에 나는 그를 향해 피식 웃어 주었다.


“우리 일전에 파시움의 은신처에 간 것을 기억하나요?”

“아? 네. 네.”

“아마 거기 있을 거예요. 대신전의 추적을 받고 있는 상태라면 거기가 가장 찾기 힘든 장소일 거예요.”

듀리온은 얼빠진 얼굴로 손뼉을 쳤다.


“그, 그럴 수 있겠군요.”

“그런게 공작님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또 누가 알고 있나요?”

듀리온은 쉽게 말하지 못하고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그건…….”

“편하게 말해보세요. 누가 알고 있죠?”

“그러니까……. 저와 비카, 레이독스, 제르미…… 로엔…… 베로니아 공주님…….”

거기까지만 듣고 나는 그만하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듣자 하니 저와 국왕 빼고는 다 알고 있었던 것 같군요.”

듀리온은 마치 혼이라도 난 아이처럼 입을 집어넣었다.


“혼내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주눅들 필요 없어요.”

“죄, 죄송합니다. 마님.”

“이제 그가 어디 있는지 듀리온 님도 알았으니 이만 출발하죠.”

“네?”

“공작님이 계신 곳으로 가잔 말이에요.”

하지만 듀리온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난처한 듯 고개를 돌렸다.


“하, 하지만. 공작님께서 원치 않으실 겁니다.”

“내가 진실을 알게 돼도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말라고 한 건가요?”

듀리온은 자신도 정말 난처하다는 듯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휴… 공작님께서는 방법을 찾으실 때까지 마님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마님이 아시게 된다면 공작님의 저주를 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듀리온 님은 공작님을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신가 보군요.”

“……명령이니까요.”

“명령이면, 공작님이 듀리온 님께 자신을 죽이라고 해도 죽이실 겁니까?”

듀리온은 미어캣처럼 놀란 눈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마님.”

“지금 듀리온 님이 하는 행동이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공작님의 죽음을 방관하고 계시잖아요!”

“전 그저…… 마님을 잃기 싫어하는 공작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뿐입니다…….”

“아니요. 그건 잘못된 충성이에요. 그리고 전 듀리온 님의 잘못된 충성을 바로 잡을 생각입니다.”

듀리온은 참으로 난처하다는 표정 반,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표정 반으로 나를 보고 서 있었다.

나는 이 정도면 그를 설득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내가 혼자 가겠다고 강짜를 부려도 그가 나를 온전히 막지는 않을 것 같았다.


“듀리온 님께서 같이 못 가겠다면 저 혼자라도 가죠. 다만 저를 막아설 생각은 마세요.”

역시나 내가 그렇게까지 말을 한 탓인지 듀리온은 나를 막을 생각 없어 보였다.

듀리온은 딜레마에 빠진 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신을 좀 봐달라는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마님…….”

“듀리온 님…… 저는 지금 시카르가 너무 보고 싶어요.”

정말 너무 보고 싶었다. 사실은 그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정말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몸까지 안 좋다고 하니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듀리온은 졌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공작님이 안 계실 때는 마님의 말을 잘 들으라고 하셨죠. 그러니 제가 마님 뜻을 따른다고 해도 공작님의 명을 어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님.”

그제야 굳어 있던 나도 약간이나마 웃음을 찾을 수가 있었다.


“고마워요. 듀리온 님.”

 

***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고, 우리 아빠를 살린 사람이 바로 아버지란 말이에요?”

뒤늦게야 시카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키안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래…… 그랬다. 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구나. 하지만 난 아직 은혜를 입고도 은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키안은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깊은 감동과 그리움을 느꼈다.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죠?”

베로니아도 시카르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르미가 어딘가로 대피시켰다는 것 말고는 우리도 아는 게 없구나. 하지만, 지금쯤이면 대신전에서 수색대를 보내 공작을 찾고 있을 것이니 네가 먼저 수색대를 보내 그보다 더 빨리 공작을 찾아야 한다. 대신전의 물건을 건드렸으니 신전에서 공작을 그냥 두지는 않을 테니까.”

수색대가 찾아야 다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죽은 줄만 알았던 제 아버지를 당장 볼 수 없는 것도 답답할 지경인데, 쫓기기까지 하고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럼 제가 대신관 님을 뵙고 아버지의 선처를 부탁해 볼게요.”

“그러면 좋겠지만 신전에서 호락호락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신전은 신전의 규율을 따라야 하니까.”

“그렇다면 신전에 명을 내리겠습니다. 내 아버지의 일은 내가 처결하겠다고요.”

“아무리 왕이라도 신전의 물건을 훔친 도둑을 비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억지니까. 네 말대로 했다간 신전에서 너를 폭군으로 칭하고 길리언을 추대하려 들지도 모른다. 네가 그런 위험을 부담하는 것은 공작도 원치 않겠지.”

“그럼 아버지를 구할 방법이 없단 말이에요? 제가 왕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없단 말인가요?”

“답답하겠지만 할 수 없다. 이미 공작도 죽을 각오를 하고 발리제를 구한 것이니까.”

키안은 베로니아의 말이 모두 맞다고 생각했지만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제 아빠를 구하갰다고 목숨을 내놓은 아버지를 아무것도 안 하고 지켜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무리 신전의 물건을 훔쳤다고 해도 레카도르의 국왕인 자신이 제 왕부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유약한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전 아버지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대신전으로 가겠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 살 아이 같던 키안은 허리에 검을 차며 밖으로 걸어 나가며 시종을 향해 말했다.


“당장 재상을 불러들여 대신전으로 갈 채비를 하도록 해라!”

 

 
제복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키안의 뒷모습을 보며 발리제는 이제 더는 키안이 제 보호가 필요한 아이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키안이…….”

베로니아는 애틋한 눈으로 키안이 떠난 자리를 보는 발리제의 손을 잡았다.


“키안이 이제 다 컸지?”

“진짜 왕이 됐구나…….”

“그럼. 우리 키안이 얼마나 대단한 왕이 된 줄 알아? 이 하늘에 푸른 해를 띄운 왕이 됐어.”

애틋한 눈으로 키안이 떠난 자리를 보고 있던 발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야?”

“그래. 우리가 그런 아이를 낳았어. 발리제.”

“하지만 우린 낳기만 했지. 제대로 키우지를 못했어…… 그런 키안을 키운 건 블레이크 공작이지. 우리 그에게 큰 신세를 졌어. 어떻게 하면 갚을 수 있을까.”

그동안의 기억은 없지만, 만날 수 없었던 베로니아를 만났고 키안이 성장한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발리제는 진심으로 시카르에게 감사함을 느꼈고 이것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로니아는 그 마음을 알수 있었지만, 발리제가 키안으로부터 조금은 마음을 비우길 바랐다.


“신세를 갚기 위해서는 블레이크 공작 부부에게서 키안을 뺏지 않아야겠지.”

발리제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키안을 뺏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블레이크 공작 부인이 궁에서 지내고 있어. 내가 그리하라고 했지.”

“그럼 블레이크 부부에게 키안의 부모 자리를 양보했다는 말이야?”

“키안과 그들에게 갑작스런 변화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베로니아…… 키안을 많이 그리워했잖아…….”

“하지만, 나는 낳기만 했지 제대로 키운 적도 없는걸. 그래서 그들에게서 부모 자리를 뺏기 싫었어. 그러니 발리제도 블레이크 부부를 키안의 양부모로 인정해줬으면 해. 우리가 키안의 부모임을 주장하면서 키안을 그들에게서 떨어트려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 키안이 두 부모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게 말이야.”

블레이크 부부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발리제는 어딘가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이제야 세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던 발리제는 맥이 풀렸다.


“설산으로 다시 돌아가잔 말이구나…….”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좋를 테니까.”

“그래서 키안에게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군 거야? 난 알아. 네가 사실은 키안을 많이 품고 싶어 한다는 걸.”

“발리제…….”

베로니아는 발리제의 어깨에 기대 눈물을 떨구었다.

자식을 품 안에 안고 싶지 않은 어미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제 와 그 자리를 뺏고 싶지 않았다. 저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보답이었으니까.

더불어 키안을 유약한 임금으로 만들기 싫었으니까.

발리제는 베로니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네 마음을 알겠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그 자리를 뺏기고 싶지는 않아…… 우리 때문에 키안이 곤란해지는 건 싫으니까.”

“그래. 우린 키안이 보고 싶을 때 보면 되는 거야. 아니면, 키안이 언제든 우리를 보러 오고 싶을 때 볼 수 있게만 하면 되겠지. 그리고 이젠 내 곁에 너도 있으니까, 난 만족해.”

그토록 그리워하던 키안을 만나고 평생 가슴에 품으며 살고자 했던 발리제와도 함께할 수 있음에 베로니아는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이제 공작만 무사하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없어. 안타깝지만 이대로 잡힌다면, 공작은 대신전의 분노를 피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공작이 계속 잡히지 않는다면, 키안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베로니아는 아직은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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