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믿을 수 없는 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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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믿을 수 없는 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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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믿을 수 없는 일 (3)
2023.01.16.
레카도르 국왕의 방문에 대신전이 소란스러웠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키안의 모습에 신관들은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
어린 국왕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신관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대신관의 알현실로 향했다.
대신관은 점잖게 일어나 키안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레카도르의 국왕이시여. 기별을 늦게 받는 바람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해 면목이 없군요.”
키안은 대신관이 내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되어 실례가 많습니다.”
대신관은 키안의 작은 손을 맞잡으며 어린 왕의 기세가 과연 왕의 기세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직 작은 아이였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아우라가 분명히 있었으니까.
“앉으십시오.”
키안이 자리에 먼저 앉고 나자 대신관도 곧장 자리에 앉았다.
키안은 자리에 앉는 대신관을 점잖은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여기 왜 왔는지는 알고 계시겠죠?”
“블레이크 공작 때문이라 짐작합니다.”
“알고 계셨군요. 짐작하신 대로 제 아버지를 어떻게 처결하실 생각이신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안 그래도 소신도 그 문제 때문에 전하를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대신관이 이미 저를 찾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한 키안은 그의 뜻밖에 말에 눈썹을 올렸다.
“저를요?”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신전의 물건을 훔치고 소실시킨 죄는 엄중히 처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이크 공작을 잡기 위해 왕실의 원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대신관은 키안이 신전을 방문했을 때부터 그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는 이 어린 왕이 뭐라고 대답을 할지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었기에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조금은 당황한 듯 흔들리는 키안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아무리 왕이라 해도 연치 어린 왕은 아이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골몰히 생각에 빠져있던 키안이 입을 열었다.
“그러시면 블레이크 공작에 대한 처결 권한도 왕실에 넘겨주시죠.”
여유 있게 찻잔을 들어 올리던 대신관의 손이 멈추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키안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대신관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가 어렵게 말하진 않았을 텐데요?”
대신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내렸다.
“허허.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당황스러워서 그랬습니다. 전하. 대신전은 레카도르의 왕실에 종속돼 왕실과 운명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왕실에 곤란한 상황이 닥쳤을 때 신전이 왕실을 돕는 것이 당연하듯 왕실도 신전을 돕는 것이 당연한 줄로 사료됩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대신전은 레카도르 왕실과 더불어 국가에 종속된 신전입니다. 그리고 국왕인 나는 레카도르라는 이 국가를 대신할 수도 있는 사람이지요.”
“……물론 대신전은 왕실을 따르지만 대신전만의 법도와 규율이 엄연히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것은 초대 대왕 때부터 지켜서 내려오던 규약입니다.”
“신전에 오기 전, 서고에서 초대 대왕 때부터 기록돼 있던 레페르 신전과 레카도르의 왕실의 히스토리를 찾아보았죠. 혹시라도 내가 국왕으로서 처신을 바로 하지 못할까 봐. 그 방대한 자료들을 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레카도르의 왕실 서고에는 대신전 도서관에서 보관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왕실의 일원이 아니라면 그 서고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키안은 늙은 대신관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이 더욱 짙어지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기록된 것이며 대신전에서도 대신관의 서고가 아니면 그 누구도 열람할 수 없게 돼 있는 기록이더군요.”
그런 기록들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신관은 그 방대한 기록 중 키안이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슨 기록을 말씀하시는 건지 이 늙은 신관도 궁금해지는군요.”
“한때, 레페르의 최고위 신관이 왕실의 국고를 횡령, 배임한 일이 있었더군요.”
대신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그것은…… 백년 도 더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결하기 힘들거나 해결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일에 봉착하게 되면 지난 전례를 찾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백 년 전이라고 해도 말이죠. 아니, 백 년이 다 무엇입니까? 오백 년 전이라고 해도 후대에 쓰이는 귀한 선례가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요…….”
“루텔만 대왕께서는 당시 대신관 레오드엘반의 요청에 따라 그 모든 일을 레오드엘반에게 모든 처결을 전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신전에서 벌어진 치부와 과오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것이지요.”
그 사실은 대신관도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어린 왕이 그 방대한 자료들을 모두 뒤져가며 이렇게까지 낱낱이 조사를 해올 줄 몰랐기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국왕의 말은 곧, 왕실에서도 대신전에서 왕실에 저지른 허물을 스스로 지울 수 있게 하였으니 레카도르 왕실에서도 이와 똑같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대신관은 이 어린 왕의 영특함과 치밀에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리다는 이유로 국왕을 과소평가했던 자신에 대한 씁쓸한 헛웃음이었다.
키안은 이제 선전권은 자신에게 들어왔다는 듯 대신관을 보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전면에 대고 이런 전례를 들며 대신전을 직접 견제할 수도 있습니다.”
“전하의 말씀은 왕실의 치부를 드러내면 대신전의 치부도 드러내시겠다는 뜻이군요.”
“제 아버지이신 블레이크 공작의 일을 덮어주지 않으신다면 저 또한 대신전이 그동안 꽁꽁 숨겨두었던 과오를 공표할 수밖에 없겠죠. 지난 백 년 동안 숨겨온 일과 얼마 전에 벌어진 일이 공개되었을 때 어느 쪽이 더 타격이 큰지는 대신관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대신관은 문득, 저 어린 왕이 제 양부를 살리겠다고 서고에서 책들을 뒤적이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효심이 깊은 왕은 백성들에게도 어진 왕이 된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효심이 깊은 왕이라면 이번만큼은 대신전에서 한발 물러나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명백한 전례 앞에서 왕실과 날을 세울 수는 없기도 했다.
신전 내에서는 그저 보서라고만 했기 때문에 관련된 몇 사람 외에는 부활서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대신관은 완전히 체념한 듯 얼굴을 긁적였다.
“전하께서 단단히 준비를 해오셨군요.”
대신관의 백기 선언과 같은 말에도 키안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꼿꼿했다.
“아버지의 죄를 없었던 일로 하진 않을 것입니다. 대신전의 명예를 실추하지 않는 선에서 현명하게 이 일을 해결할 것을. 왕실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국왕이라 해도 함부로 면제권을 준다면 대신전에서도 충성을 바치기는 쉽지 않을 일이었다. 어린 국왕은 기가 막히게도 그 점까지 간과하지 않고 있었다.
“전하께서 이 늙은 신관을 놀려 먹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납득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벌이란 잘못 내리면 더 원성만 들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신관은 이 어린 국왕이 제 아버지를 어떻게 처벌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
파시움은 갑자기 자신의 은신처로 나타난 또 다른 인물들 때문에 놀란 나머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파시움이 유라와 듀리온이 새로운 인물들임을 구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소환되는 소리 때문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비명이라도 질러봤겠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탓에 입만 쩍 벌릴 뿐이었다.
블레이크 공작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파시움은 이들이 공작을 붙잡으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파시움은 더듬더듬 지팡이를 찾아 들고 일어서며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거처를 향해 돌진했다.
“어……. 어……. 어…….”
그가 낼 수 있는 소리는 단지 이것뿐이었지만,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제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해 목청을 내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안에서 비카와 함께 검은 눈동자의 사람의 발견 장소를 체크 중이던 제르미는 다급하게 들어오는 파시움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시움. 왜 그래?”
그제야 비카는 뭔가 불길한 직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인기척도 듣지 못했는데 무슨 일인 거지?”
“파시움의 은신처에서는 파시움이 아니고서는 먼 곳의 소리까지 들을 수가 없습니다.”
“파시움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공간이라 그런 건가.”
“파시움이 만들어 놓은 마법진의 움직임 때문입니다.”
“어쨌든 무슨 일인지 나가보지.”
비카가 제르미와 함께 자리를 이동하려 하자, 멀리 나갈 것도 없이 듀리온과 유라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비카 님. 오랜만이에요. 제르미 님.”
듀리온은 별다른 살가운 인사 없이 손을 한 번 들어 보였다.
비카와 제르미는 멈칫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어떻게…….”
당당히 들어선 유라는 눈으로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으며 물었다.
“공작은 어디 있죠?”
“고, 공작님이라니요. 전 무슨 말인지 도통…….”
“베로니아 님께 들어서 다 알고 왔으니 속일 생각은 마세요. 비카 님도 아직 시카르와 맹약을 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카는 뜨끔해서 도저히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시선을 돌렸다.
모두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려고 했지만, 버티고 있는 유라를 이길 재간이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시카르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물론 비카는 유라를 안내하면서도 깨어난 공작이 노발대발 거릴 것이 눈에 훤했기에 벌써부터 피로가 몰려왔다.
유라는 시카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 제르미의 손을 잡으며 그를 불렀다.
“그리고 제르미 님.”
“네. 공작 부인.”
“시카르를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르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겸사겸사 도와드린 거죠. 사실, 제가 친부모님의 얼굴을 몰라서 그런지 공작님께서 국왕 전하의 친부를 찾아주려고 하는 모습이 꽤 감동적이었거든요. 그래서 뭐, 도와줄 수밖에 없었죠.”
유라는 제르미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기에 조금 뜻밖이었다. 그녀는 이내 제르미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해요. 제르미 님.”
그리고 유라는 시카르가 누워 있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주 오랜만의 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