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믿을 수 없는 일 (4) (171/197)


171화. 믿을 수 없는 일 (4)
2023.01.19.


유난히 창백한 시카르는 입술에 핏기 하나 없었기에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든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곁에 있는 제르미에게 물었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길래 이렇게까지 의식이 없는 거죠?”

“이틀에 걸쳐 출혈이 꽤 많아서 베로니아 공주님 말씀이 당분간은 혼수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저희 중에는 치료할 사람도 없는 탓에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래도 깨어날 테니까요.”

당장 일어나라고, 왜 날 속였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죽은 듯 잠들어 있는 그에게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만 공작님을 궁으로 데리고 가겠어요.”

내 요구에 제르미는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지금 공작님은 대신전의 추적을 받고 계시기에 공작님이 깨어날 때까지는 이곳에 모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도 궁까지 수색을 하진 않을 것 같았지만,

차분히 누워 있는 그의 손은 한없이 차갑기만 했고 그의 몸에는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죽은 사람처럼.

그 순간 차가운 것은 그의 몸뿐 아니라 그가 누워 있는 침대 바닥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토퍼를 들어보니 딱딱한 돌침대는 차갑기만 했다.


“아픈 사람을 이렇게 차가운 데 재우면 어떡해요?”

제르미와 비카는 당황해서 나를 쳐다보곤 코를 긁적였다.


“네?”

“돌침대가 차갑잖아요. 아래에서 냉기가 올라오니까 시카르의 얼굴도 이렇게 창백한 거고요. 몸이 따뜻해야 회복도 빠르죠.”

두 사람은 그런가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비카는 잘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저희는 저렇게 다쳐보지 않아서 모르죠.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무모하게 싸우지도 않고 힐링 포션을 마시고 회복하니까.”

“어서 아궁이에 불을 피워주세요. 몸이 좀 따뜻해지면 회복도 빠를 테니까요.”

지켜보고 있던 듀리온이 가장 먼저 장작을 패오겠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불을 피우고 방이 조금씩 따뜻해져 오니 시카르의 몸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따뜻해져 오자 그제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시카르는 혼수상태라 식사를 할 수 없었기에 입으로 힐링 포션을 떨어트려 줘야 했다.

나는 그가 좀 더 빨리 나으면 했기에 밤낮으로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혈액순환이 좀 더 잘 이루어지다 보면 더 빨리 깨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감동한 눈으로 보던 듀리온은 나를 따라 시카르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저도 도울게요.”

시카르의 회복을 도운 것은 비단 듀리온만이 아니었다.

제르미는 파시움과 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의 중간에 서서 매개체가 되어 필요한 것들을 조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비카는 그녀가 건강히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카르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되어주었다.

며칠간 시카르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 끝에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직 온전히 몸이 회복되진 않았지만 시카르의 눈이 희미하게 떠졌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음 날 아침. 시카르의 곁에 앉아 잠을 청하던 나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눈을 떴다.

기력을 회복하지 못해 힘이 없는 손길이었지만, 어떻게든 온 힘을 쏟아 나를 만지려 하고 있었다.


“시카르? 깨어났어? 깨어난 거야?”

희미한 눈빛은 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베로니아 공주님이 말씀해주셔서 나 이제 다 알게 됐어. 대체 왜 그랬던 거야.”

한 번 깜빡이는 그 눈은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시카르는 내 손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굳이 내게서 이런저런 설명을 듣기보단 그냥 내 기억을 보는 게 낫긴 하겠지.

나도 그의 기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면 내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달래줄 수 있을 텐데.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내 손을 잡고 있는 시카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왜 이러고 누워 있어. 네게 할 말이 많단 말이야. 그러니까…… 어서…… 어서…… 일어나.”

시카르는 마치 내게 울지 말라고 말하듯 떨리는 손으로 훌쩍이는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자다 다음 날이 돼서야 완전히 깨어났다.

내 손을 잡은 시카르의 손은 어제보다 더욱 강하고 힘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몇 번을 눈을 더 깜빡이다 완전히 눈을 뜨고는 날 끌어안았다.


“유라…… 꿈인 줄 알았는데…… 정말 너구나. 내 아내…… 보고 싶었다…….”

완전히 의식을 찾은 그의 얼굴을 보자 나도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왜 날 속였어? 왜 나한테 그런 거짓 연극을 한 거냐고!”

시카르는 내 볼을 어루만지며 힘겹게 힘을 열었다.


“너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러다 죽으면? 죽으면 다 끝이야.”

시카르는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네가 사라져도 인간 시카르는 끝이야.”

“사라진다는 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거야. 하지만 죽으면 끝이야. 끝이라고.”

나를 꼭 끌어안으며 내 머리를 쓸어내리는 시카르의 눈에 눈물이 고여 흘렀다.


“난 이미 널 너무 사랑해서 보낼 수가 없다…….”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보낼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동안 내가 네 말을 잘 들어왔다는 걸 알겠지. 너도 이번만큼은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사람이 죽는다는데 어떻게 그 말을 들어?!”

“들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저주를 풀려고 한다거나 그러지 마. 내가 죽어도 발리제가 있으니 키안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난 그저 내게 허락한 시간 동안 너와 좀 더 있고 싶을 뿐이다. 아니면, 네 곁에서 방법을 찾아가거나…… 대답해 줘. 내게 저주를 풀 것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내 대답을 기다리듯 시카르는 내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이번에야말로 확실해졌다.

시카르가 죽으면 나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내가 정말 그래 주기를 바라는 거야?”

“그래…… 어차피 난 이제 대신전으로부터 쫓기는 몸이 되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중죄를 지었으니 대신전에 수감되거나, 아니면 봉인될 수도 있겠지.”

“그럼 도망가서 살면 되잖아. 키안에게서 치료받고 도망가서라도 일단 살아남아. 살아남아야 뭐든 할 거 아니야!”

“국왕의 양부가 중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자로 산다면 국왕에게 도움 될 게 없을 것이다. 키안이 나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는 왕이 되는 걸 원하지 않겠지?”

아…… 키안…….


“내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이라고 생각할게.”

시카르는 긴 한숨을 쉬며 내 볼을 다시 쓸어내렸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 우리 못해본 게 많은 만큼 해보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나는…… 의미 없이 긴 삶을 사는 것보다. 네 곁에서 행복하게 죽고 싶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대신전의 추적을 피할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서.

시카르를 이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겉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조용히 다짐했다. 그를 결코 이런 식으로 보내진 않을 것이라고.

***

베로니아와 발리제는 아직 설산에 돌아가지 않고 비어 있는 데이지 궁에 기거 중이었다. 유라가 궁을 떠나기 전 두 사람이 레카도르 궁에 더 오래 머물기 원한 까닭이었다.

발리제는 저를 살려준 은인의 아내의 부탁이자, 키안의 양모인 유라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염치가 없다고 느끼긴 했지만 데이지 궁에 머물기로 했다.

데이지 궁은 원래 베로니아가 쓰던 궁을 양보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온 곳은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발리제는 정원에 가득 심어져 있는 장미꽃을 의아함과 감탄으로 바라보았다.


“그 많던 데이지는 다 어디 가고 장미로 가득하구나.”

“키안이 블레이크 공작 부인을 위해 심었어.”

“그래? 키안이?”

발리제는 뜻밖의 말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귀여운 꼬맹이 키안이 제 양모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신기했는데, 제 양모를 위해 장미꽃까지 심었다니. 기특하면서도 신기하네…….”

“제 어머니를 많이 좋아하더군. 그만큼 살뜰히 키운 덕분이겠지.”

발리제는 조금은 서운한 듯 코끝을 긁적였다.


“나도 꽤 살뜰하게 키웠는데…….”

베로니아는 울적해 하는 발리제를 보자 마음이 조금은 쓰렸지만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완전히 고아라 생각했을 때 거두어줬으니까 더욱 애틋했겠지.”

“하긴, 그건 그렇겠다. 그래서 이렇게 낭만도 아는 소년으로 자란 모양이야. 어서 블레이크 공작을 만나보고 싶다.”

발리제는 시카르가 무사히 돌아와 그에게 반드시 감사하단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키안을 잘 키워준 도리를 하고 싶었으니까.

***

대신전에서 일을 잘 해결한 키안의 다음 과제는 제 양부을 찾는 일이었다.


“스승님. 제 아버지가 있는 곳을 알려주십시오.”

이미 예전부터 시카르는 레이독스에게 아무리 국왕의 명이 있어도 결코 제 위치를 알려주지 말라고 당부한 터였다.

하지만 재상의 입장으로써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국왕이 드러내고 제 양부를 찾고 있는데 계속해서 모른 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레이독스를 키안은 점점 더 조여오듯 파고들었다.


“제자로서의 부탁입니다. 설마 스승님은 제가 국왕으로서 명을 내리기까지 함구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저를 뚫어져라 물끄러미 보고 있는 키안을 레이독스는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공작이 기억을 본다고 해도 이만큼 버티는 것을 봤다면 제가 의리를 져버렸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란 판단에 다다랐다.

그래서 레이독스는 마치 모든 것을 체념했다는 듯 말했다.


“파시움의 은신처에 계실 것입니다.”

“파시움이라면…….”

“지금은 능력과 기억을 잃고 예전 자신의 은신처에서 밭을 갈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저를 그것으로 안내해주시죠.”

“전하……. 꼭 그곳에 가셔야 하시겠습니까.”

“네……. 가야 합니다. 그러니 어서 안내해주십시오.”

레이독스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보셨죠? 공작님. 저도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국왕 전하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제 공작이 제 기억을 본다면 어쩔 수 없었겠노라고 이해해줄 것 같았다.

레이독스는 다시 고개를 들어 키안을 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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