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믿을 수 없는 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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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믿을 수 없는 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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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믿을 수 없는 일 (5)
2023.01.23.
뻐근한 몸을 비틀며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했다고 생각한 시카르는 제 손으로 유라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휘청거리며 다시 앉았다.
“아직 완전히 몸이 회복하지 않은 건가…….”
말을 하고 난 후 시카르는 제 목소리가 여전히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라가 기운 없이 자리에 앉는 시카르를 부축하듯 팔을 붙잡았다.
“놔둬. 내가 할게.”
“내 손으로 네게 밥 한 번 해먹여 본 적이 없어서 그래.”
“당장 이별할 사람처럼 굴지 마. 그런 건 천천히 하면 되니까.”
시카르는 죄인처럼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널 속인 건 정말 미안해.”
“부마님을 살려주셨다는 건 들었어…… 고대의 부활서가 신전에 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아니, 됐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시카르는 대뜸 말을 하려다 유라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유라가 다시 재촉했다.
“솔직하게 말해줘.”
“……국왕에게 제 아버지를 찾아주면 네가 나에게 저주를 풀라고 다그치지 않을 거 같아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유라는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그럼, 나와 더 있고 싶어서 그런 위험한 선택을 했다는 말이야?”
“음…… 그 반대야. 그런 위험한 일 말고는 네 곁에 머물 방법이 없어서 선택한 거지. 나도 되도록이면 더 안전한 방법을 찾고 싶었지만, 세상에 정말 호락호락한 일이 없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지.”
다르게 말하면 시카르를 저렇게 궁지에 몬 것이 꼭 자신 같기도 했다.
그래서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위험한 선택을 한 시카르가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키안이 발리제를 다시 만나게 해주었으니 그의 용기에 감사하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었다.
“일단, 식사부터 해. 너 그동안 식사도 못 했어.”
시카르는 기운 없는 몸을 다시 일으켰다.
“내가 준비할게.”
“그동안 쫄쫄 굶은 사람이 뭘 준비해. 그냥 있어.”
하지만, 그동안 이미 파시움이 모든 식사 준비를 마친 터였다. 때마침 듀리온이 유라와 시카르의 몫의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파시움이 모두 준비를 했거든요. 그럼, 즐거운 식사 하세요.”
듀리온이 자리를 비워주자, 시카르는 포크를 들어 올리려다 말고, 유라의 표정을 살폈다.
화가 난 건지. 속상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에 시카르는 또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분위기를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괜시리 유라에게 포크를 넘기며 기운 없이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아. 아직 회복이 덜 돼서 그런지 포크를 들어올 릴 기운도 없네.”
유라는 시카르의 속이 뻔히 보였지만,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니 그 모습이 꽤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포크를 들어 고기와 야채를 집은 후 시카르의 입을 향해 내밀었다.
“자. 아 해.”
막상 유라가 먹여주는 것을 받아먹으려니 민망함이 물씬 오른 시카르의 뺨이 붉게 상기 되었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보살핌을 받을지 모를 일이었기에 그는 냉큼 입을 벌리며 음식을 받아먹었다.
“아.”
기운이 없다고 하기엔 시카르는 너무너무 씩씩하게 잘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유라의 눈에는 왠지 더 귀엽게 느껴졌다. 죽었다 살아 돌아와서 그런 건지 원래 귀여워 보였던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평안했다.
“그러고 보니까, 나 이렇게 누가 음식 떠먹여 준 게 처음인 거 같네.”
“전에 내가 물 먹여준 적 있잖아.”
“그건 물이지. 음식은 아니니까.”
“하긴.”
시카르는 또다시 유라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오물오물거리며 말했다.
“우리 식사하고 나면 여길 나가자.”
“여길 나가자고? 대신전의 추적은 어떡하고?”
“그렇다고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곳이 가장 안전해.”
“이곳이 안전하긴 하지만,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또, 뭘 하려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으면 안 돼?”
“안 돼. 이대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 수는 없으니까 방법은 찾으며 지내야지.”
유라는 시카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비카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비카에게 들었는데 대신전의 보서를 훔쳐서 붙잡히면 봉인은 불가피하대! 그런데도 이곳을 나가겠다는 거야?”
“봉인을 받게 된다면 적어도 죽지는 않겠군. 그렇게 되면 목숨은 건지겠어.”
“죽지 않아도 죽은 것과 뭐가 달라.”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겠지. 언젠간 발리제처럼 다시 돌아올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넌 끝까지 저주를 안 풀 생각이야?”
“그래. 네가 뭐라고 해도 절대 풀지 않을 생각이야.”
시카르는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유라의 눈가가 젖어가는 것을 보았다.
자신에게 잊고 살았던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준 여인이었다. 모두가 무서워만 하는 자신을 처음으로 좋아해 준 여인이었다. 그래서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다.
시카르는 유라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내게 강요하지마. 지금은 그냥 네 곁에 있고 싶으니까…….”
시카르가 유라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채 기다리기도 전에 듀리온이 다급하게 들어오다가 꼭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구, 국왕 전하가 도착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유라는 시카르를 날리듯 밀쳐내며 물었다.
“누, 누가 도착했다고요?!”
“구, 국왕 전하께서요…….”
“여길 어떻게 알고…….”
유라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시카르가 일어나 와서 말했다.
“레이독스가 알려줬겠지.”
그리고 곧 키안이 들어와 이 말에 동의했다.
“맞아. 스승님이 알려주셨어. 아버지.”
시카르는 오랜만에 보는 키안이 반가웠지만, 키안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시선을 회피했다.
유라는 시카르가 키안의 시선을 회피하는 이유를 알았기에 그의 팔을 잡아당겨 강제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아드님이 오셨는데 인사도 안 하고 뭐 해.”
시카르는 키안을 향해 머쓱한 얼굴로 인사를 하려다 저를 노려보고 있는 키안을 보고 놀란 듯 움찔거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대신전의 노여움을 샀다. 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네 친아버지를 찾아 줬는데 그렇게 날 노려…….”
그러자, 키안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카르에게 덥석 안겨 들어왔다.
“흐윽…… 아버지! 죽은 줄 알았잖아! 죽은 줄 알았다고! 살아 있으면서 왜 죽었다고 한 거야!”
키안이 그렇게 덥석 안겨오자 시카르도 코끝이 찡해졌다. 그는 붉어진 눈시울로 유라를 쳐다보았고, 유라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국왕…….”
시카르는 손을 들어 제게 안겨 있는 키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 사정이 있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어도 그렇지! 엉엉…… 아버지가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잖아! 어머니도 나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키안은 어린아이처럼 시카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고 있었다.
다 큰 줄로만 알았던 키안이 그렇게 안겨 엉엉 우는 것을 보자, 시카르도 유라도 마음이 편치 않아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저에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키안이었기에, 유라는 눈물이 차올라 목이 메어왔다.
겉으로는 저에게 늠름한 모습만을 보였던 키안이 사실은 시카르를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었음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시카르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시카르도 꼭 끌어안고 있던 키안을 놓으며 키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새 더 컸네?”
키가 더 컸다는 말에 키안은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래? 내가 좀 컸나? 그래요? 어머니?”
시카르가 그냥 한 말에 진지하게 쳐다보는 키안이 유라는 귀여웠다.
그녀는 키안을 따라 맑게 웃으며 시카르의 말에 호응했다.
“그러게. 그새 많이 컸는걸요?”
시카르는 잘했다는 듯 유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은 키안의 잔소리를 피해갔다는 일종의 안도와도 같았다.
“이제 궁으로 가. 아버지.”
유라는 곧장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안 돼요. 공작님은 여길 나갈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시카르는 그 말이 듣고 싶었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좋지. 궁으로 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국왕. 공작님은 이곳을 나서면 대신전의 추적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외부로 나가는 건 안 될 말이에요.”
키안은 유라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았기에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제 친아빠를 살리기 위해 대신전의 노여움을 샀다는 말을 저도 들었어요.”
시카르는 그건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노여움이라니. 오해가 조금 있었을 뿐이고 내가 잘 해결할 생각이다.”
키안은 자신이 대신전과 합의를 본 사실은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 블레이크 공작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고 모든 것이 다시 정리가 될 때쯤, 그때쯤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그 좋은 소식도 제 자신에게 신세를 졌다는 생각에 미안해질 수도 있으니까.
키안이 알고 있는 제 양부 블레이크 공작은 가족에게 극도로 신세를 지기 싫어할 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알겠어. 난 아버지를 믿어. 밖에 마차도 다 준비해놨으니까 이제 나가기만 하면 돼. 밖에 스승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시카르는 유라를 향해 들었지? 라고 말하듯 보고 있었고, 아들이자 국왕 키안이 이곳을 떠나자고 하는 까닭에 유라는 말릴 수가 없었다.
유라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좋아요. 가요.”
유라의 맥없는 소리를 들은 비카가 문을 벌컥 열며 고개를 내밀었다.
“잘 생각했어요. 마님.”
비카의 뒤로 제르미도 고개를 빼곰 내밀었다.
“드디어 이곳을 나가는 모양이군요. 파시움이 조금 서운해 하겠는걸요.”
파시움. 그 이름이 아직 친근하지 않은 키안은 문 뒤에 서 있을 파시움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미는 파시움의 모습에 당황한 듯 눈을 껌뻑였다.
제르미가 괜찮다며 울지 말라며 다독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파시움이었고, 파시움은 아쉬운 듯 훌쩍이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건 유라도 마찬 가지였다.
시카르는 그 모습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파시움은 저렇게 순박했던 놈이었지. 제 부모와도 같았던 스승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야…….”
“파시움을 괴물로 만들었던 건 야욕이 아니라, 복수심 때문이었던 모양이구나…….”
“그런 셈이지.”
시카르는 씁쓸한 얼굴로 파시움을 보고 있는 유라와 키안을 깨우듯 말했다.
“이제 출발하지. 어서가서 부마님을 뵙고 인사도 드리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