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낯선 가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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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낯선 가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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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낯선 가족 (1)
2023.01.26.
시카르는 혹시나 누군가 자신을 속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파시움의 은신처를 나오기전, 모두의 손을 잡고 그 기억을 훑어 나갔다.
그 덕분에 제르미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를 많이 썼군. 제르미.”
시카르가 사람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까지는 몰랐던 제르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네?”
“비카에게서 들었다. 네가 우릴 위해 로엔도 버렸다는 얘기를 말이다.”
“그렇진 않고요. 로엔 님이 절 이해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로엔 님께서는 정말 절 이해해 주셨구요.”
“그래서 내가 깨어나면 로엔에게 신전 하나는 차려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군.”
그건 제르미와 로엔 저만이 주고받았던 말이었다. 그래서 제르미는 난감한 듯 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아신 거죠? 그건 분명 저와 로엔이 나눈 이야기인데…….”
시카르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는 명석하게도 금방 머리를 굴렸다.
“여기 비카가 듣고 내게 말해줘서 알고 있다. 너도 알다시피 비카는 귀가 밝으니까.”
제르미는 곧장 그 말을 이해했고 납득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들으셨으니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괜찮지만, 로엔 님이 만약 대신전에서 쫓겨나서 오시거든 작은 신전 하나만……. 아니, 작은 제단 하나만 만들어 주세요.”
“대신관을 소인배 취급하는구나. 아무리 로엔이 신전의 명을 무시했다고 해도 그런 일로 중위 신관을 내치진 않을 것이다.”
“블레이크 공작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 말이 맞는 말이겠죠.”
“그래.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는 말도록. 그리고 로엔이 쫓겨나든 쫓겨나지 않든, 나를 도운 보답은 하겠다.”
블레이크 공작의 배포를 알고 있는 제르미는 애쓰지 않아도 절로 기대가 되었다. 저에게 보답하겠다고 했으면 사실 거절했을 테지만, 로엔이 피해를 입는 건 그도 바라지 않았기에 제르미는 거절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내가 감사하지. 덕분에 신관들에게 끌려가지 않았으니까.”
“그럼 전 이제 다시 로엔 님께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엔 님이 걱정되기도 하고요.”
곁에서 듣고 있던 키안이 불쑥 고개를 내밀며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왔다.
“제르미 경께서 저희 아버지를 도우셨다고 하니, 저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죠. 마차를 내리도록 할 테니 타고 가십시오.”
“아, 아닙니다. 국왕 전하.”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 그럼 내리시는 마차는 타고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망극합니다. 전하.”
키안은 파시움에게도 작은 상으로 소정의 보상금을 내렸지만, 보상은 시카르가 하겠다고 말리는 바람에 다시 보상금을 돌려받았다.
파시움의 은신처를 빠져나오자, 레이독스가 앞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독스는 이들을 향해 낮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공작님께서 위중하다고 들었는데 한결 건강해진 얼굴을 보니 반갑군요.”
예전 같았으면 또, 까불지 마라를 남발했을 시카르는 조용히 레이독스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네 얼굴도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레이독스는 환하게 웃으며 제 어깨를 두드리는 시카르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공작님께 들었던 말 중 가장 정겨운 말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위로도 곧잘 해주었던 것 같은데?”
사실 서연이 사라진 후 저를 가장 많이 위로해 준 것도, 저와 함께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 함께 뛰어다닌 사람도 오직 시카르 뿐이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레이독스의 마음에 작은 일렁임이 일어났다. 그러고 보면 시카르 공작이 제게는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갑자기 정작 자신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후. 제가 공작님께는 아무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했군요.”
“그건 그렇지. 아니, 도움은커녕. 내 아들에게 우리 위치를 알려줬으니 방해만 된 것 같은데.”
물론 시카르의 농담이었지만 레이독스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더군요. 죄송합니다. 공작님은 제게 큰 힘이 되어주었는데 전 아무 힘도 되어주지 못해서…….”
시카르는 레이독스의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내고자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가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카르는 사람 좋게 누군가를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간단명료한 말로 레이독스의 찌푸린 얼굴을 펴주었다.
“나를 당황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이만 인상을 풀도록.”
레이독스는 금세 표정을 풀며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럼 이제 넌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공작님.”
레이독스는 시카르의 명에 따라 출발 준비와 함께 제르미와는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파시움은 그동안 정든 이들을 배웅한다고 밖으로 나와 이들을 배웅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이 돼서 싸우던 파시움에게 도움도 받고 이렇게 배웅까지 받고 있으니 유라는 이 상황이 기분 좋게 낯설었다.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야. 그치, 시카르?”
시카르는 마치 이때다 싶은 사람처럼 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도 모르는 거야. 그러니 내 말 따라줘.”
“난 네 말을 안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어.”
“하지만 따르겠다고도 하지 않았지.”
유라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서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일단 마차에 타고, 궁에 도착해서 얘기해.”
사실 유라는 가는 길에 신관들에게 붙잡히면 어쩌나 너무 조마조마했던 탓에 시카르와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카르는 귀신같이도 그런 유라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너 걱정하면 얼굴에 다 티 나는 거 알지? 아마 그래서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키안이 네게 내색 못했을걸.”
시카르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를 떠올리니 키안이 자꾸만 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게 떠올라 유라는 귓불까지 벌게졌다.
“그래…… 그래서 키안이 그렇게까지 내 눈치를 봤구나. 휴…… 나 정말 나쁜 엄마였구나.”
유라의 한숨에 시카르가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마음 내려놔.”
“보장할 수 없는 말이야.”
“대신전에서도 감히 왕이 타고 있는 왕실 마차를 수색할 수는 없을 거야.”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국왕의 양부가 대신전에서 쫓는 수배범이라 해도 감히 왕의 마차를 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은신처에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레이독스의 조언 덕분에 왕실의 마차가 여러 대 함께 온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대는 대신전으로 향하는 제르미가 타고 가고, 또 다른 마차에는 비카, 듀리온, 레이독스가 함께 올랐다.
울적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파시움의 배웅을 받으며, 왕실의 마차는 곧장 출발했다.
***
레카도르로 돌아온 후 시카르는 곧장 유카나다르로 돌아가려는 레이독스 붙잡았다.
“부마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나?”
“공작님과 더 깊은 인사를 나누어야 할 테니 저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하지만, 시카르는 떠나려는 레이독스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가서 같이 인사를 올리지.”
“저는 다음에 루시와 함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혼자 인사하는 게 어색했던 시카르는 레이독스의 팔을 곧장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루시와 인사를 올리는 것보단 내가 있는 게 너도 좀 더 편할 텐데.”
제 팔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시카르를 보며 레이독스도 그쯤에서야 그가 왜 그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작 부마님을 살리신 건 공작님이시면서 막상 인사를 드리려니 어색하신 모양입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니 어색하지 않은 게 이상하겠지. 그러니까 같이 가지.”
레이독스는 시카르의 손을 잡아 제 팔에서 떼어내었다.
“감히 제가 낄 자리가 아닙니다. 공작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이독스는 돌아서 가려다 허탈한 얼굴로 서 있는 시카르를 보며 마치 한 방 먹이듯 말했다.
“그리고 제가 부마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건 아마 상견례일 텐데. 상견례 때는 공작님도 함께 계실 듯하군요.”
그 말은 어차피 자신은 발리제를 만나도 시카르와 만날 테니 자기는 어색할 게 없다는 식이었다.
사실 어떻게 만난다고 해도 레이독스는 어색할 게 없는 입장이었다.
시카르는 누군가와 이렇게 만나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혼자 긴장한 채로 궁으로 걸어갔다.
***
궁에 먼저 와 있던 유라는 베로니아 공주 부부 내외가 묵고 있는 방으로 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었다.
듀리온과 비카도 옷을 갈아입고 발리제에게 인사를 드릴 준비를 했다.
두 사람은 먼저 메인홀로 나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길을 온 비카는 고단함에 쉬고 싶었지만, 부마를 만나는 일이다 보니 인사를 안 올릴 수가 없었다.
“피곤해. 공작은 언제 오는 거야.”
비카와 달리 듀리온은 부마를 본다는 생각에 긴장 중이었다.
“부마님은 어떤 분이셔?”
“그냥 뭐, 왕의 친부이시지.”
듀리온이 물은 뜻은 그런 게 아니었기에 답답했다.
“내 말은, 차가우신지 인자하신지 재미있으신지 그런 걸 묻는 거야.”
“무서운 분이셔.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사람을 특히 싫어하시니까 조심해.”
물론 비카의 장난이었지만, 듀리온은 그 말을 진지하게 새겨들었다.
조금 뒤 들어온 시카르는 옷을 멀끔히 차려입은 듀리온과 비카를 보고 한숨을 쉬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듀리온은 시카르가 자신을 보고 쉬는 한숨이라고 생각했다.
“공작님 보시기에 내 옷이 이상한가?”
“공작이 우릴 보고 한숨을 쉬어서 그래?”
“우릴 보고 쉰 거야? 난 날 보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저 성격에 부마님과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려니 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뭐.”
“그런가? 그럼 나와는 상관없겠네.”
조금 지나, 메인홀에는 블레이크 공작 부부와 베로니아 공주 부부가 마주 보고 서게 되었다.
그리고 비카와 듀리온이 먼발치에 앉아 이 어색한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어색해하는 건 시카르 뿐이었지만.
유라는 감동스러운 눈으로 이들 부부를 보고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부마님. 오늘 석찬을 함께 하기 위해 준비를 시켰으니 다이닝룸으로 드시지요. 국왕께서는 오늘 관료들과 함께 석찬 약속이 돼 있어서 조금 늦게 오신다는군요.”
“그러지.”
시카르는 곧장 가지 않고 서 있다가 유라가 팔을 잡고 가자 어색하게 끌려가듯 걸어갔다.
발리제에게 인사할 타이밍만 노리고 있던 듀리온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들었다 하고 있다가 저들이 그냥 다이닝룸으로 들어가 버리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는 인사 안 드려도 되는 건가?”
“우리는 밥 먹고 난 후에 인사를 올리는 거지.”
듀리온은 식사를 하러 가기 위해 일어서는 비카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며 따라 일어섰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네가 바보처럼 긴장하고 있는 거 구경하려고.”
듀리온은 화가 난 얼굴로 낄낄거리며 걸어가는 비카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