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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낯선 가족 (3) (175/197)


175화. 낯선 가족 (3)
2023.02.02.



 
키안은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베로니아는 키안이 말했던 적절한 벌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봉인은 피할 수 있다고 해도 벌은 피할 수 없다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대신전의 분노를 재울 수 있는 합당한 벌이라…… 쉽지 않겠군.”

“물론 알고 있는 밥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유라는 어떻게든 시카르를 구해낸 키안이 너무 대견해서 예전처럼 꼭 끌어안고 싶었지만, 앞에 베로니아도 있고, 발리제도 있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감동한 듯 붉어진 눈시울을 손수건으로 닦기만 하고 있었다.

키안은 안타까운 눈으로 유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세요. 어머니.”

“공작님을 그렇게까지 생각해주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국왕.”

“아버지께서 날 위해 목숨 걸고 내 아빠도 구해주셨으니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라는 키안의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번득, 이 사실을 시카르가 알게 된다면 또 사라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유라는 모두에게 이 일을 함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공작님께서 알게 되시면 분명 다른 마음을 드실 겁니다. 그러니 제발 당분간만 비밀에 부쳐주시길 바랍니다.”

베로니아는 유라가 그런 부탁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작이 또 도망을 갈까 봐 그러는 게지?”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제가 또 강제로 저주를 풀려고 할까 봐……. 도망갈 것입니다…… 또 제 눈앞에서 사라지겠죠…….”

잠자고 듣고 있던 키안은 그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저주를 푸는데 아버지가 왜 도망을 간다는 거예요? 어마마마께서도 뭔가를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말씀해주세요. 제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요.”

유라는 달래듯 키안의 손을 어루만졌다.


“제가 나중에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다만, 지금 만큼은 공작님께 비밀로 해주세요.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키안은 애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국왕.”

물론 나중에 시카르가 모두 알게 되겠지만, 그때까지 유라는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시카르와 접촉하지 않고 있다가 그의 저주를 풀게 된다면 그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다행히 시카르가 다시 돌아온 것은 대화가 모두 마무리되고 분위기가 가라앉은 뒤였다.

시카르는 밀크티를 가져와 어디 한번 맛보라는 듯 발리제의 앞에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궁에 왔더니 전용 홍차를 찾느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부마님.”

발리제는 시카르가 내미는 밀크티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받아들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시카르는 이내, 밀크티를 베로니아와 키안에게도 갖다 주었다.


“아마 이런 맛은 처음일 것입니다. 제 아내가 즐겨 마시는 거니 기분 좋게 드십시오.”

밀크티를 한 잔 마신 발리제는 이런 맛은 처음이라는 듯 자신이 들고 있는 찻잔을 보며 미소지었다.


“정말 맛있군요. 저는 그럼 다음엔 닭고기 수프를 만들어 드리도록 하지요.”

그, 닭고기 수프는 시카르 자신도 매우 잘 알고 잘 만드는 것이었기에 시카르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불러주시면 찾아뵙겠습니다.”

발리제는 마시던 밀크티를 내려놓으며 이제 말해야 할 때가 왔다는 듯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우린 내일이면 다시 설산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유라는 아까 자신이 부탁한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돼 버린 것 같았기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베로니아를 쳐다보았다.


“공주 저하. 정말 그러실 작정이십니까?”

“그래. 이곳은 내가 이미 너희에게 내어준 곳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들어와 있는 것이 웃기지 않겠느냐. 우리가 여기 잠시 머문 것은 이렇게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한 번쯤은 식사를 함께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베로니아가 건넨 우리 가족이라는 말이 심장을 쿵, 하고 치듯 와 닿았다.

하지만, 시카르는 제가 없는 동안 베로니아가 키안의 곁에 있어 주길 원했고 유라는 제가 없는 동안 베로니아 부부가 키안의 곁에 있어 주길 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뜻은 달랐어도 베로니아를 설산으로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주십시오. 공주 저하.”

하지만, 유라의 간곡한 청에도 베로니아는 냉정하기만 했다.


“이미 생각은 다 끝냈다.”

시카르도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기에 한마디 거들었다.


“부마님께서 제 공을 높게 사신다면 국왕의 곁에 머물러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발리제도 키안의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베로니아가 고집을 피우고 있으니 그로서도 힘이 없었다.

발리제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며 베로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베로니아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발리제가 돌아왔다는 이유로 이제 와서 궁을 다시 차지하려 들고 싶지도 않았고, 시카르가 발리제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베로니아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날 테니 그렇게 알아라. 거듭 말하지만, 내 고집을 꺾을 생각은 말아라.”

베로니아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방법이 없었기에 시카르와 유라는 더 설득해보지도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둘 중 누군가 혼자가 된다면 반드시 공주가 키안의 곁으로 돌아와 줄 것이라 생각했다.

베로니아와 발리제가 자신들이 머무는 방에 들어가고 나자, 시카르는 유라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 쉬고 싶었다.

하지만, 시카르와 손을 붙잡게 된다면 키안이 대신전과 합의를 본 사실을 시카르가 알게 될 것이기에 유라는 그와 접촉을 할 수가 없었다.


“나, 국왕과 나눌 얘기가 좀 더 있어서 조금 이따 다시 올게.”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니야. 나 혼자 다녀올게. 궁금한 건 어차피 내 기억을 통해서 보면 되잖아.”

시카르는 그때까지만 해도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

유라가 시카르를 보며 그저 빙긋 웃어만 주고 나가려 하자 시카르는 유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 그동안 아팠더니 애정 결핍이야. 안아주고 가.”

평소라면 안아줄 유라였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유라는 되레 시카르를 피하듯 닿지도 않은 몸을 뒤로 빼며 피했다.


“미안. 바쁜 일이라서. 다녀와서 안아줄게.”

유라는 다급하게 자리를 떠났고, 그런 행동이 더욱 시카르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시카르는 유라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와의 접촉을 저렇게 피할 일이 없었다.

비카라면 분명 무언가를 듣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카르는 비카의 기억을 보기 위해 그녀를 찾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비카는 보이지 않았다.


“듀리온! 비카는 어디 있지?”

저녁 식사 후 부른 배를 붙들고 잠들어 있던 듀리온은 시카르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듯 칼을 뽑으며 일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공작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비카가 없어졌다. 비카를 찾아라.”

“네? 비카요? 비카라면 어딘가 있지 않겠습니까? 공작님과 맹약이 파기되지 않았으니 어디 도망갈 수도 없을 텐데요?”

그래서 시카르는 어쩔 수 없이 발리제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카르 때문에 발리제는 잠옷 차림으로 나타났다.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공작님.”

시카르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낮에 발리제가 했던 것처럼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부마님. 부마님께 한 번만 더 공주 저하를 설득해 주시길 부탁드리기 위해 염치 불구하고 이 밤에 찾아왔습니다.”

사실 그것은 핑계였다. 시카르는 발리제의 기억을 읽기 위해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리제는 시카르가 그런 목적으로 제 손을 잡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기에 두 손으로 시카르의 손을 꽉 붙잡고 그를 달래고 있었다.


“저도 노력해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공작님…… 그래도 이렇게까지 저희를 생각해주시는 마음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공작님은 제 은인이자 제 가족의 은인이자…….”

다행히 발리제가 길게 말을 해주는 덕분에 시카르는 충분히 그의 기억을 읽을 수가 있었다. 이만 되었다고 느낀 시카르는 발리제의 손을 한 번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럼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마님.”

“얼마나 걱정이 많이 되셨으면 이 밤에 저를 찾아오셨겠습니까. 그 마음을 생각해서…….”

하지만 발리제는 말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시카르는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몇 번 더 강조한 뒤 다급하게 방을 빠져나왔다.

대신전에서 이제 더는 저를 추적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된 시카르는 마음이 급했다.

유라가 그 사실을 알게 됐다면, 그리고 지금 키안을 만나고 있다면 분명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일을 도모하고 있을 것이었다.

시카르는 그 비상한 머리를 재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제게서 저주를 풀기 위해 유라가 택할 방법에 대해 골몰히 생각한 결과, 시카르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비카에게 도움을 받아 키안으로 하여금 저주를 풀게 할 것이다.

시카르가 잠들지 않았을 때는 비카가 불러낸 정령으로 그를 잠재우지 못했지만, 그가 잠든 사이에는 잠에서 깨는 걸 어느 정도 막을 수가 있었다.

유라가 이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비카가 알고 있을 것이다.

시카르가 저주를 풀게 되면 비카와 맹약을 파기할 수 있으니 비카는 유라의 편이 되어 도울 것이다.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유라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이것을 한계일 것이다.

시카르는 이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위해 잠에 든 척 책상에 엎드렸다.

***



“비카 님. 시카르의 저주가 풀린다면 비카 님에게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시카르를 잠재워 주실 수 있나요?”

“그럴 수 있다면 제가 진작 재워서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었겠죠. 알고 계시겠지만 공작은 정령을 지배하는 종족입니다. 그래서 부탁하신 일은 불가합니다.”

“그럼 시카르를 무력화시킬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흠…… 공작이 잠들었을 때 잠의 정령을 불러내면 깨어나는 시간을 조금 지연할 수는 있겠죠.”

“그럼 그렇게라도 부탁드려요.”

유라는 시카르가 짐작한 대로, 시카르가 잠든 후 키안을 통해 저주를 풀 계획이었다.

자세한 정황을 모르는 키안은 그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아버지는 왜, 저주를 풀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어머니?”

“국왕께 짐이 되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그거 말고는 다른 이유는 정말 없는 거예요?”

“그럼요. 그러니 어서 한시라도 빨리 공작님의 저주를 풀어주도록 해요. 국왕.”

유라가 사라지거나 하는 그런 일은 결코 상상도 못 했기에 키안은 믿고 의지하는 제 어머니의 말에 의심 없이 따랐다.


“알겠어요. 어머니. 가요.”

그렇게 세 사람은 시카르가 잠든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체 그가 자고 있을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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