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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머문다는 건 (1) (176/197)


176화. 머문다는 건 (1)
2023.02.06.


비카는 잠든 시카르의 등을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잠의 정령을 불러낸 후 시카르를 잠재우고 나면, 키안이 그의 저주를 완전히 풀어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사라질지도 모르겠지. 아무렇지 않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어차피 실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잠든 시카르의 등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비카 님 부탁드려요.”

하지만, 비카는 손을 들어 올리려다 포기했다는 듯 내려놓았다.


“힘들겠어요. 공작이 깨어있어서.”

“네?! 뭐라고요?!”

키안과 나는 경악한 얼굴로 누워 있는 시카르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서서히 몸을 들어 올렸다.


“후. 눈치 빠른 비카 덕분에 들켰군.”

시카르는 앉아서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내 저주를 풀 계획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부인.”

“아니.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키안! 어서 시카르의 저주를 풀어줘!”

나는 결의한 듯 외쳤고 키안도 심각한 기세로 고함쳤다.


“알겠어요! 어머니!”

그렇게 키안이 불러낸 것은 불의 정령 레오렘이었다.

키안이 저 나이에 어떻게 벌써 골렘(바위 거인)과 비슷한 형태를 지닌 레오렘을 불러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강한 정령을 불러내었다.

비카도 놀란 듯 ‘아니, 어떻게……?’라고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시카르 역시도 레오렘을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레오렘?!”

키안은 씨익 웃으며 시카르와 대치했다.


“그래. 아버지. 레오렘이야. 그러니까 어머니 말씀 들어.”

하필 키안이 불러낸 것이 레오렘인 데다, 아직 몸이 덜 회복한 탓에 시카르는 꽤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키안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라. 키안. 네 어머니의 뜻대로 내 저주를 풀게 되면 크게 후회하는 생길 것이다.”

“이미 후회는 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믿었을 때. 그때 내가 얼마나 후회하고 얼마나 절망한 줄 알아?!”

키안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여 있는 것을 보며 시카르의 저주를 풀고야 말 것이라는 그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키안을 독려해주었다.


“잘하고 있어요. 국왕. 결코, 물러서서는 안 돼요. 아셨죠?!”

시카르는 화나고 답답한 듯 허리에 손을 올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러지 마라. 키안. 넌 지금 이러면 안 된다.”

나는 궁지에 몰린 시카르가 키안에게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하기 전에 어서 그를 치유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국왕! 공작님을 기절을 시켜서라도 어서 저주를 풀어드려요! 어서 빨리요!”

“네! 어머니!”

키안이 우렁차게 대답하자마자 레오렘이 시카를 향해 쿵쿵거리며 걸어갔다.

하지만 시카르가 정령을 지배했는지 레오렘은 걸음을 멈추며 다시 키안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키안이 뭔가 생각대로 잘 안 된다고 느낀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집중했다.

시카르와 키안의 눈은, 그 어느 때 보다 집중해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는 레오렘은 마치 고장 난 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삐걱삐걱거리고 있었다.


“이럴 시간 없다. 키안. 내 저주를 푼다면, 네 어머니는 사라질 거라고!”

키안은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곤 나를 보며 다시 되물었다.


“아, 아버지 말이 대체 무슨 말이에요? 어머니?”

“국왕! 제 말을 들어요! 어서 공작님을 치유해야 해요!”

“안 돼! 날 치유하면 네 어머니는 사라진다고!”

“어머니가 사라진다고? 그게 무슨…….”

키안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는 사이 레오렘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시카르는 이때다 싶어 레오렘을 완전히 없애버리려 하고 있었다.


“비카 님! 국왕을 도와줘요!”

지켜만 보고 있던 비카는 정령을 불러내 시카르의 양팔을 붙잡았고 그는 너무나 화가 난 눈으로 비카를 쳐다보았다.


“비카…… 이러지 마라. 유라가 사라진다면 내가 결코 네 맹약을 깨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비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매섭게 시카르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죽는 것보단 낫겠지.”

이제 남은 건 키안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걱정 마. 키안! 난 사라지지 않아. 그러니까. 어서 시카르를 치유해야 해!”

“아니. 네 어머니는 사라질 것이다, 키안! 레이독스의 연인이었던 서연이 사라진 것을 기억하나?! 그녀처럼 유라도 사라질 것이야!”

키안은 혼돈 속에서 나와 시카르를 쳐다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머니? 어머니가 사라진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없어! 공작님이 죽었던 때만 생각해야 해. 키안! 어서! 공작님을 살려줘! 어서!”

“안 돼! 유라가 사라진다고! 정신 차려! 키안!”

“그럴 리 없어! 없으니까! 네 아버지를 살려! 어서!”

제발 키안이 내 손을 들어 주기를 바랐다. 나는 간절한 눈으로 키안을 쳐다보았다.

제발 내 간절함이 닿기를 바라며.

시카르는 계속해서 절대 그러면 안 된다며 키안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기에 키안이 시카르의 말을 들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제발 키안…… 제 발 내 말을 들어줘…… 제발…… 부탁이야…… 시카르를 살려줘. 제발…….”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키안을 향해 호소했다. 제발 내 부탁을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내 간절한 마음이 닿았던 탓인지 키안은 나를 보며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키안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시카르는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


“키, 키안.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안 돼! 네 어머니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유라! 유라! 이러지 마!”

유라는 눈물을 흘리며 시카르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시카르. 미안해…….”

유라는 차마 겉으로 하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사랑해. 나 때문에 네가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꼭 살아남아, 시카르…….’

유라의 간절한 눈물을 본 키안은 시카르의 말은 결코 듣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굳게 감으며 고함쳤다.


“아버지! 미안해!”

키안의 외침 후 레오렘이 몸을 틀며, 시카르를 향해 곧게 걸어갔다.

시카르는 더는 견딜 힘이 없는지 악에 받친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키안! 네 어머니가 사라진다고……!”

그 순간 시카르는 저를 향해 손을 뻗어오는 레오렘의 손을 막아 내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시카르의 이마에서 핏줄이 뻗어 나왔다.

그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비명을 질렀다.


“키아아아아안!”

시카르는 더는 말하지 못하고 레오렘의 화기에 잠식된 채 기절하고 말았다.

죽은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키안이 금세 시카르를 치유시켰다. 그러곤 땀을 흘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시작할까요?”

“어서 시작해요. 어서.”

키안은 나를 보고 굳게 다짐한 듯 시카르의 곁에 서며 그를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아직 중요 장기들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바람에 아버지 체력이 많이 약한 상태라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키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

이제 나는 갈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키안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됐어요. 어머니. 이제 정말 다 됐어요. 아버지의 몸속에 있는 저주의 씨앗을 완전히 뿌리 뽑았어요.”

이제 끝이구나. 안녕, 시카르.

떠날 시간이라 생각하니 키안을 보는 마음이 착잡했다.

이제 나는 갈 준비를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이대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걸까.

이 세계를 떠나게 되는 게 아쉬웠지만 시카르의 죽음을 방임하지 않게 되어서 괜찮았다.


“키안. 우리 한 번만 안아볼까.”

키안은 문득 나를 보다가 살며시 미소지으며 나를 껴안았다.


“이제 다 끝났어요. 어머니.”

 

***

잠에서 깬 시카르는 번쩍 눈을 떴다. 몸에서는 그 어떤 이상한 감각이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리를 움직이려니 온몸이 욱신거려왔다. 그제야 지난 밤 기절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는 단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유라!’

그는 당장 확인해야 했다. 키안이 저를 치료했는지, 유라는 이곳에 있는지!

시카르는 정신없이 복도를 향해 뛰어나갔다.


“유라! 유라!”

복도 끝에는 비카가 나른한 얼굴로 시카르를 보고 서 있었다.


“드디어 깼나 보군. 공작.”

시카르는 욱신거리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허리를 굽히고 절뚝거리며 비카를 향해 걸어 나갔다.


“유라는? 유라는 어디 있어?!”

비카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을 본다는 듯 안쓰러운 얼굴로 허리가 굽어진 시카르를 내려다보았다.


“불쌍하군. 공작.”

“유라가 어딨는지나 말해…… 비카…….”

“마님은 이제 없어.”

시카르는 절망 속에서 주저앉으려다 휘청거렸다.


“결국…… 결국…… 유라가 사라진 건가…….”

비카는 참으로 딱하다는 눈으로 시카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가엾은 공작.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모르고…….”

절망 속에 휘청거리던 시카르가 난간을 짚으며 비카를 노려보았다.


“시간이 흘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비카는 혀를 차며 시카르를 외면한 채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은 참 빨리도 늙지…….”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앞으로 걸어가던 비카는 안 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넌 이제 너무 늙어 버렸어. 시카르.”

“늙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

“네가 잠이 든 동안 벌써 50년이 지나버렸는걸.”

“내, 내가 그, 그렇게나 오래 잤다고?”

“그래. 이 텅 빈 궁을 봐. 네가 잠든 동안 이 궁은 너무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지. 네가 알던 사람들은 이제 더는 없어.”

50년이 지나갔다니. 시카르는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비카의 모습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노화가 느린 다크엘프 혼혈이다.

혼란에 빠져 있는 시카르를 향해 비카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 마님은 계시니까. 하지만, 네가 알던 그 마님은 이제 없어. 마님께서는 너무 늙어 버렸거든.”

“유, 유라가 있다고?! 어디 있어?! 유라는 지금 어디 있어?!”

“너를 기다리며 또 정원을 가꾸고 있겠지.”

시카르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50년이나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이렇게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면 비카의 말이 맞는 것만 같았다.

시카르는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유라…… 보고 싶다. 네가 할머니가 되었든, 괴물이 되었든…… 상관없어…….’

그는 유라가 간절했다.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장미꽃으로 가득했던 정원은 베로니아 공주가 살던 때처럼 데이지 꽃들로 가득했다. 제가 알던 장미꽃으로 가득하던 정원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정말 50년이 지난 것일까.

제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훔쳐내자, 저 멀리 머리가 희끗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시카르는 너무나 가슴이 아려왔다.


‘유, 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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