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머문다는 건 (2)
(177/197)
177화. 머문다는 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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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머문다는 건 (2)
2023.02.09.
희끗한 흰머리를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동안 무슨 일들이 일어났단 말인가. 어쩌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잠에 빠져 있었단 말인가.
시카르는 천천히 앞을 향해 다가갔다.
“유, 유라…….”
사랑한단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시카르는 자꾸만 눈물이 흘러 눈물을 닦아가며 앞을 향해 걸었다.
“유라. 내가 왔어. 너무 늦었겠지만…… 내가 왔어……”
그러다 정원을 둘러보던 그 머리 희끗한 여인이 점차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 그렇게 느릿하게 흘러갈 수가 없었다.
유라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되었다 해도 사랑할 것이다. 제게는 세상에 유일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완전히 고개를 돌리며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공작님?”
그 얼굴은 어딘가 익숙했다. 시카르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안……드레아?”
안드레아는 다급한 얼굴로 시카르를 향해 뛰어왔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아직 이렇게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시카르는 또다시 혼란이 밀려왔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안드레아를 쳐다보았다.
“안드레아. 어떻게 된 거야. 지금 50년이 지났다고 들은 거 같은데…….”
안드레아는 당황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넋이 나간 듯 안드레아를 보고 있던 시카르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황한 안드레아는 시카르를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 공작님……?”
정원에 있는 꽃들이 모두 데이지 꽃으로 바뀐 까닭은, 며칠 전 키안의 지시로 정원의 장미꽃을 모두 바꿔 심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라는…….
시카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카가 나를 놀렸군.”
“네? 네? 공작님?”
여전히 어리둥절해 있는 안드레아의 손을 놓은 시카르는 매서운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비카가 재미있는 걸 구경하듯 웃고 있었다.
“아, 백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네. 바보 공작 같으니.”
“비카…… 너!”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유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버젓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 까닭이 어떻든 지금은 유라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시카르는 유라를 찾기 위해 다시 정원을 누비기 시작했다.
“유라! 진유라! 아니…… 유라 블레이크! 어디 있어! 어디야!”
정원에서 데이지 꽃을 꺾고 있던 유라는 저를 부르는 시카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카르?!”
50년은 고사하고,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유라는 제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시카르는 그녀가 남아 있음에, 시간이 머물러 있음에 감사하며 복받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다시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무슨 눈물이 이렇게 많아졌는지.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리듯 눈가가 마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유라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유라는 자신을 향해 절뚝거리며 오고 있는 시카르에게 달려갔다.
“시카르!”
시카르는 제게 달려오는 유라를 힘껏 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한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네가, 네가 사라졌을까 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나도 네가 저주 때문에 죽을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유라를 안고 있던 시카르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재차 확인했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사라지지 않은 거야?”
“모르겠어…….”
“흠, 그럼 네가 진정 원하던 것이 내 저주가 풀리는 게 아니었나 본데.”
그 생각은 유라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민망한 눈으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실망했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널 위한 일이 아니라서…….”
“아니. 전혀. 하나도 실망 안 했어.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응?”
“네가 나를 너무 사랑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네가 날 너무 사랑했으면 사라졌을 테니까.”
유라는 자신을 너무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다.
“너를…… 너무 사랑하지 않는다던가 그런 건 인정 못 하겠지만, 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
“어쩌면 조건이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네 조건은 뭘까. 설마, 난 평생 언제고 갑작스럽게 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하는 건가…….”
“그래도 어때. 너는 살았고 나는 여기 남았잖아.”
여전히 불안이 끝나지 않은 탓에 시카르는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전히 불안해. 아직 조건을 모르니까……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다른 것인지. 조건이 다른 것인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조건이 다른 것 같아. 네가 정말 저주를 풀 수 있다면 내가 사라져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조건이 다른 게 맞겠는데…….”
시카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군…….”
저도 꼼짝없이 사라질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남아 있는 자신을 보고 꽤 놀라며 여러 가지 해봤던 터라 유라는 시카르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일단 뭐라도 좀 먹는 게 좋겠어. 너 요즘 계속 먹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야.”
“내가 그 정도인가?”
“그래. 게다가 너 지금 잠옷 바람이야…….”
시카르는 그제야 제 옷차림을 확인하고는 민망한 듯 쿨럭거리며 말했다.
“이젠 좀 알겠군. 내가 잠옷을 입고 뛰쳐나올 만큼 네가 간절했다는 걸.”
기분 좋은 말에 유라는 미소를 머금으며 시카르와 같이 방을 향해 걸었다.
이제 옮겨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데이지 꽃들 사이로 유라와 시카르는 마치 50년 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의 손과 팔을 꼭 잡고 걸었다.
***
오랫동안 섭식을 못한 탓에 시카르는 닭고기 수프를 먹고 있었다.
“친히 부마님께서 만들어 두고 가신 거야. 이게 바로 그, 오리지널 닭고기 수프야.”
“가히 키안이 평생을 그리워했을 만큼 맛있긴 하네.”
“그날 아침 사연을 듣고 네가 얼른 쾌차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 두고 가셨어.”
“키안을 위해 만들어 주고 간 게 아니라, 날 위해?”
“그래. 널 위해서.”
발리제를 살려준 것이 저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키안의 친부가 절 위해 닭고기 수프를 직접 만들었다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은근한 감동이 밀려와서 괜히 머쓱했다.
그릇을 완전히 비울 때쯤 안드레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공작님. 공작님께서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국왕 전하께서 친히 이곳으로 납시었습니다.”
허겁지겁 들어온 키안은 시카르를 보며 괜찮냐고 물은 뒤 접시가 완전히 빈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수프를 다 먹은 걸 보니까 그래도 좀 괜찮나 봐.”
키안이 저를 걱정하는 마음과는 달리, 기절하기 전 꼼짝도 못 하고 화마에 휩쓸릴뻔한 기억에 시카르는 마치 배은망덕한 자식을 보듯 키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병 주고 약 주는군.”
하지만, 키안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지지 않고 시카르를 흘겨보았다.
“약 주고 약 주는 거지.”
“그건 그렇고. 네게 궁금한 것이 있다. 대신전에 네가 대신 벌을 내린다고 했다지? 그래서 네가 내게 내리는 벌은 뭐지?”
“내 아버지라고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줄 수는 없어.”
“당연한 말이다. 이미 각오한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신전에서도 수긍할 수 있을 만한 벌을 내리려고 해.”
키안이 곧장 말을 잇지 않고 머쓱한 표정을 짓자 시카르는 다음 말을 재촉하듯 말했다.
“그 쓰임이 어땠든 대신전의 물건을 함부로 취했으니 합당한 벌을 받을 생각이다. 그러니 편하게 말해라.”
“크흠…… 그래서 말인데, 내가 자식 된 도리로 그 벌을 대신하려고 해.”
시카르도 놀랐지만, 곁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유라도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네가…… 왜……?”
“내 아빠를 되살리느라 그런 거니까.”
“넌 이 나라의 국왕이다. 한 국가의 얼굴을 대신하는 네가 무슨 벌을 대신 받겠다는 거야.”
유난스러울 만큼 얼굴을 붉히고 있는 시카르와는 달리 키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걱정 마. 신성초 일백 드라크마를 모아서 대신전에 가져다주기로 했으니까.”
“일백 드라크마? 그 많은 양을 언제 다 모으지? 그럼 신성초는 내가 찾도록 할 테니 넌 이제 그만 이 일에서 빠져라.”
“나도 애석하지만, 신성초는 신성력이 없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어. 그래서 아버지는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럼 네가 직접 찾을 생각이란 말이냐?”
“물론.”
“국사는 어쩌고?”
“왕이라고 하루 종일 일하진 않으니까 퇴근 후에 구하러 다니면 돼.”
시카르는 키안을 볼 낯이 없다는 듯 괜히 물잔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군.”
키안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얼굴을 긁적이고는 시카르를 보며 씨익 미소지었다.
“그러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시카르로서는 부탁이라는 말이 그저 좋게만 들리지 않은 까닭에 그는 키안을 경계하며 물었다.
“부탁?”
키안은 시카르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고 시카르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를 올렸다.
“큼. 그런 거라면…… 내가 얼마든 들어주도록 하지. 키…… 아니 국왕.”
두 사람이 저만 두고 귓속말을 주고받는 걸 보는 유라는 모른 척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대화 내용이 너무 궁금했기에 장난처럼 눈을 슬쩍 흘기며 물었다.
“무슨 말이길래 저만 쏙 빼놓는 거죠?”
키안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께도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어머님이 거절하시면 제가 어머니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잖아요.”
키안은 마치 혼이라도 날까 봐 걱정하는 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고 유라는 그런 키안을 보며 더욱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국왕?”
키안은 뒷걸음치듯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머니, 제가 일이 있는 걸 깜빡해서요. 아버지께서 아마 잘 설명해주실 거예요. 그럼 전 이만 나가볼게요. 내일 봐요. 어머니.”
평소 같으면 볼에 입을 맞추고 갔을 키안이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급하게 뛰쳐나가는 것을 보며 유라는 괜시리 시카르를 노려보았다.
“뭐야. 키안이 뭐라고 했어?”
“그러니까 그게…….”
시카르는 망설이다가 각오하라는 듯 유라의 손을 꼭 붙잡았다.
“국왕이 우리의 결혼식을 다시 올려준다는데?”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광장 공포증이 있어서 우리가 결혼식을 제대로 못 올렸다는 것을 키안이 알고 있더군. 그리고 베로니아 공주님과 부마님도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고 하고.”
시카르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유라는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래서 우리를 결혼시켜 준다는 말이야?”
“키안의 말로는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데? 제발 부탁이니 꼭 들어 달라는군.”
“그럼 그건…….”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유라와 달리 시카르는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합동결혼식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