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머문다는 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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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머문다는 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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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머문다는 건 (3)
2023.02.13.
물론 아들이 직접 준비하는 웨딩마치라니.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 앞에 설 것이 분명했기에 또 진땀을 빼지는 않을지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린 그렇다 쳐도 베로니아 공주님이 허락하실까?”
“그거야 알 수 없겠지. 하지만 부마님이 계시니 못이긴 척하실 거 같은데.”
“세상에, 베로니아 공주님과 합동 결혼식이라니. 믿기지 않아.”
“나도 너와 다시 결혼을 한다니 믿기지 않는군. 하지만 말해두는데 나와 두 번 결혼을 한다고 해서 날 너무 좋아하면 안 돼.”
또 시작된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왜. 내가 사라질까 봐?”
“그래. 네가 날 덜 좋아해도 되니까 사라지지만 마라.”
“그러니까, 이제는 널 좀 덜 좋아하라는 거지?”
“그래…….”
언제는 자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강아지 해피를 떠올리더니, 이제는 정말 저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고 나니 절 좋아하지 말라고 하는 이 남자를 한 번 놀려줄까 싶었다.
“미안하지만, 시카르. 난 지금까지 널 그렇게 많이 좋아한 거 같지는 않아…….”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노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저를 덜 사랑하라는 그 말은 진심인 듯했다.
한마디로 시카르는 매우 반가운 얼굴로 나를 보며 방긋거렸다.
“잘했어. 기특해. 부인. 앞으로도 쭉 나를 너무 좋아하지 않는 자세를 갖도록 하지.”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반응에 나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 넌 항상 내 예상을 벗어났었지.
“누차 말하지만, 부인이 없으면 인간 시카르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거야. 그러니까 내 곁에만 붙어 있어.”
“그런데 대체 내 조건은 뭐였을까. 왜 서연 님만 사라지고 나는 남은 걸까.”
시카르의 저주가 풀린 뒤 나 또한 곧장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 이후로 시카르가 몸을 회복하는 동안 내 머릿속은 왜 나만 남게 되었을까란 의문이 끊임없이 떠나지 않았다.
제 턱을 짚으며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시카르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럼 혹시, 서연이 돌아올 방법도 있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어. 왠지 나만 남은 거 같아서 후작님을 보기가 민망하거든…….”
“레이독스를 네가 왜 신경 쓰는 거지.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후작님이 보기에 서연은 사라졌는데 나만 남아 있으면 마음이 어떻겠어. 얼마나 심란하겠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놈의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골머리를 싸매며 앉아 있는 동안 비카가 들어와 열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식사 다 끝났으면 나와 얘기 좀 하지?”
“내 부인이 듣지 못할 얘기는 없으니 그냥 들어와서 얘기해.”
비카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고 그 자리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약속대로 맹약을 해지할 시간이야.”
아. 시카르의 저주가 풀리면 비카와 맹약을 파기하기로 했었지. 그날이 오늘 성사되는 건가?
하지만 시카르는 전혀 해줄 마음이 없는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안 돼.”
그 말에 퓨즈가 나간 듯 비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정말 많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안 돼. 왜 안 돼? 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야이! 망할 공작 놈아! 너 애초에 날 풀어줄 생각이 없었지? 내가 처음엔 부활서를 두고 널 속였지만, 그래도 결국 너한테 고대 부활서를 갖다 준 셈이잖아. 그러면 약속을 지켜야지!”
시카르는 괘씸하다는 듯 시선을 돌려 비카를 노려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넌 또 나를 속이고 놀려 먹었지. 바로 조금 전까지. 내게 50년이 지났다고 놀려 먹은 걸 잊진 않았겠지? 비카?”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던 나는 이 황당한 얘기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50년이 지났다니……?”
시카르는 마치 억울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툴툴거렸다.
“비카가 자기가 노화가 느린 걸 이용해서 내게 50년이 지났고, 부인은 이제 꼬부랑 할머니가 됐다고 속였거든.”
“그거야. 네놈 좀 골려주려고 장난 좀 친 거야. 하지만 우리가 한 건 약속이잖아.”
“내가 말했지. 비카. 난 거짓말은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고.”
“거짓말은 너도 잘하거든!”
그건 그렇다. 심지어 내게는 죽었다고까지 거짓말을 했으니. 거짓말을 잘하는 것으로 따지면 본인을 따라 갈 사람이 없을 텐데.
시카르는 당당할 만큼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내 거짓말은 늘 바른 데 쓰이지.”
“난, 동의 못 하겠는데?”
“네가 동의를 하든 말든, 계약을 파기하고 싶다면 서연을 찾아라. 서연을 찾아오면 이번엔 정말 계약을 파기해줄 테니까.”
“그 여자는 사라진 여자잖아. 대체 왜 나를 안 놓아주는 건데?!”
“머리가 나쁜 인간들이나 할 질문을 하는군. 당연히 쓰임새가 있으니 놓아주지 않는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겠나?”
“허. 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나도 네가 아까 50년이나 건너뛰며 속였을 땐 어이가 없었지.”
비카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내었지만, 서연을 찾는 일에 비카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기에 난 그녀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소심하게 시선을 회피했다.
“마님 앞에서 약속해. 이번엔 정말 파기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시카르는 비카에게 사병을 붙여 주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떻게든 서연을 찾겠다는 뜻이었다.
시카르가 그녀를 찾는 이유는 레이독스 때문이 아니었다.
검은 눈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조건을 정확히 찾아서 내가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
다음 날 베로니아와 발리제가 궁을 찾았다.
키안에게 우리의 합동결혼식 얘기를 들은 탓에 베로니아의 그 고귀한 얼굴이 수줍게 물들어 있었다.
고귀한 얼굴에서 부끄러움이 묻어나도 베로니아는 더욱 품위 있고 아름다워 보였다.
베로니아가 쉽사리 우리 결혼식에 대해 입을 떼지 못하자 발리제가 대신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들으셨다시피 기특한 국왕 놈이 우리의 합동 결혼식을 준비해주겠다는군요.”
“네. 저희도 들었어요. 고맙게도 국왕의 효심이 남달라 저희까지 리마인드 웨딩을 올려주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물론 베로니아도요.”
발리제가 싫다 하는 베로니아를 설득하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을지 눈에 선했다.
나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 고충을 다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희로서는 영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부마님. 그리고 일전에 저희가 올린 말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보셨는지요.”
“일전에 올린 말이라니요?”
발리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지만, 베로니아는 알고 있다는 듯 발리제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알고 있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일종의 신호 같았다.
“오는 길에 보았다. 장미꽃이 모두 데이지꽃으로 바뀐 걸 보니 우리가 궁으로 들어오는 걸 포기하지 않은 것 같더군.”
“네. 저하. 사실 저희는 이만 공작저로 다시 가려고 합니다. 비단, 저하께서 본래의 위치를 찾길 바라는 마음만은 아니라. 저희가 그만 돌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돌아가면 국왕은 이 커다란 궁에 외롭게 홀로 지내야 하겠지요.”
이번만큼은 베로니아도 쉽게 거절하진 않았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듯 시선을 내렸다.
물론 궁 생활이 나쁘진 않았지만, 우리가 공작저로 가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국왕의 치세를 위해서도 공주님이 곁에 계시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발리제가 은근히 베로니아를 채근하는 것을 보면, 그도 키안의 곁으로 오고 싶었던 듯했다.
하지만, 베로니아는 전과 똑같이 대답했다.
“난 입궁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 궁을 지키도록 해라.”
이번에도 그녀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건가. 더는 묻고 싶어도 베로니아의 표정이 너무나 근엄해서 물을 수가 없었다.
발리제도 더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는 듯 우리를 보며 코를 찡긋거렸다.
베로니아의 관심은 완전히 다른데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국왕이 대신전에는 뭐라고 했길래 덮어둔 것이지?”
“신성초 일백 드라크라를 구해주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신성초 일백 드라크라? 세상에 그만한 양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신성초 일백 드라크라는 어디에 쓰는 거지?”
이건 나도 너무 궁금했던 일이기에 나는 그런 질문을 해준 발리제가 고마울 정도였다.
궁금한 건 시카르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도 궁금하다는 듯 베로니아를 쳐다보았다.
“왕실 도서관에 있는 고서에 의하면 신성초 일백 드라크라를 얻게 되면 대신관께서 부활서 하나를 만들 수 있다고 나와 있다.”
그랬구나. 키안이 그것을 구해준다고 했고 그래서 대신관이 시카르의 일을 무마해준 거였구나!
“하지만, 존재는 하는데 어디 있는지 찾기가 힘들지. 아무나 찾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신관들이나 신성력의 힘을 지닌 자들만이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국왕께서 직접 찾는다고 하시더군요.”
“국왕이 직접 찾는다…….”
베로니아는 나른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며 미소지었다.
“국왕에게 말해서 내가 직접 찾겠다.”
“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신세를 많이 졌지. 아니, 신세라고 하기엔 너무 과한 은혜를 많이 입었지. 내 남편을 되살리느라 공작이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니 내가 찾음이 마땅할 것이다.”
곁에서 듣고 있던 발리제도 그편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베로니아와 같습니다. 그건 우리가 해결하지요.”
그리고 나는 이때다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베로니아를 궁으로 불러들일 구실을 찾을 수가 없을 테니까.
“반대하겠습니다.”
베로니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사나울 만큼 매서웠지만 나는 지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하께서 궁에 입궁도 하지 않은 채 국왕의 일을 돕느라 고행에 나선다면, 분명, 우리 블레이크 가문이 구설에 오를 것입니다.”
“네 말은, 너희를 돕고 싶으면 이 궁으로 들어오란 말이구나.”
“그러합니다. 저하.”
베로니아는 썩 유쾌하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한 말에 대해서 흘려듣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내 말이 틀리지 않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베로니아는 조금 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네 말이 틀리지 않은 듯하구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것과 같은 형국을 보여서는 안 되겠지. 무엇보다 공작에게 진 빚을 갚는 방법이 따로 없는 듯하니, 다른 방법이 없겠구나.”
“결정하시겠습니까? 저하.”
베로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한 듯 말했다.
“내가 졌다. 궁으로 들어가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