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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머문다는 건 (4) (179/197)


179화. 머문다는 건 (4)
2023.02.16.


우리는 합동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궁에 있기로 했고 그동안 베로니아공주 부부 내외도 이곳에 같이 머물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식을 앞두고 결혼식 입장에서부터 행진까지 리허설을 하기로 했는데…… 생각만큼 순탄하지는 않았다.

마냥 즐거워하는 발리제와는 달리 베로니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치, 행군하듯이 버진로드를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로니아. 우리가 지금 출정 나가는 줄 알아? 버진로드 위를 걸어야 하는 일이라고. 조금 더 표정을 풀 수는 없을까?”

베로니아를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무이 발리제 뿐이지 않을까.

발리제가 뭐라고 하면 베로니아가 못 이기는 척 그를 맞춰주는 모습이 꽤 다정해 보였다.

우리 또한 시카르와 발을 맞추어 버진로드를 걷는 연습을 했지만, 이미 우리는 한 번 결혼식을 올린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어색하진 않았다.

다만, 베로니아 부부와 행진 합을 맞추는 것이 조금 힘들었을 뿐이었지만.

어느 정도 연습이 끝나자 베로니아는 혼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이 정도면 서로 합은 맞춘 것 같군. 우리가 먼저 입장하고 그다음은 너희가 입장하고. 이런 순서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이니.”

사실 입장 순서를 지키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잔뜩 어색해 보이는 베로니아의 표정이 문제였을 뿐이지.

계속 베로니아의 표정을 지적하던 발리제도 이제는 지쳤는지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땀을 좀 흘렸더니 우린 산책을 좀 돌아야겠군. 같이 갈 텐가?”

“저희도 땀을 식힐 겸 산책에 동행하고 싶지만, 아직 공작님의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이만 쉴까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베로니아가 발리제와 다정히 산책을 즐기러 가는 것을 보며 시카르는 아쉬워했다.


“날 너무 약골 취급하는 거 아니야?”

“국왕이 말하길 네가 요즘 몸이 상할 일이 너무 많아서 지금 회복을 잘해야 한다고 했어.”

“요즘 국왕이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진 탓이지.”

아직 어린 국왕이 유별나다는 식으로 말을 하긴 했지만, 키안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지 않은 듯, 시카르의 입매는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산책 대신에 차나 한잔하는 건 어때. 난 야외 벤치에 앉아 적당한 바람을 맞으며 밀크티 마시는 것도 좋던데.”

“나쁘지 않지.”

“그 밀크티 제가 가져왔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헤르시아가 한 손에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

우리는 정원 벤치에 앉아 헤르시아가 가져온 밀크티를 홀짝였다.


“나쁘지 않군.”

“그런데, 헤르시아. 신혼여행을 오래 다녀오신다고 하더니 벌써 오신 거예요?!”

헤르시아는 말도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말도 마세요. 공작님이 돌아가셨다는 둥. 부마님이 살아 계시다는 둥. 그래서 베로니아 저하 부부 내외와 블레이크 공작 부부 내외가 사이가 나쁘다는 둥. 얼마나 온갖 소문이 다 들려오는지. 심란해서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더라니까요.”

시카르와 나는 황당하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런 소문이 돌았구나. 헤르시아가 한 말 중에 우리가 베로니아 부부와 사이가 나쁘다고 소문이 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실이었다.

헤르시아의 말을 듣고 보니, 키안이 우리의 합동결혼식을 준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결혼식을 제대로 올리지 못한 것도 마음이 쓰였겠지만, 무엇보다 그런 헛소문을 잠재우려 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시카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차를 마시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국왕이 아주 영특하군.”

헤르시아는 디저트를 집어 먹으며 기막힌 소문에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계속 설명했다.


“전 그중에서도 부마님이 살아 계시단 소문이 제일 황당했어요. 물론 세간에는 부마님이 돌아가셨다고 소문만 났지만, 저희는 알잖아요. 부마님이 정말 돌아가셨다는 걸요. 돌아가신 사람이 어떻게 되살아날 수 있겠어요.”

어차피 놀랄걸. 빨리 놀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헤르시아.”

“네. 공작부인.”

“부마님께서는 정말 살아 계세요.”

별생각 없이 체리를 집어물던 헤르시아의 입이 쩍 벌어지며 체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어머. 그럼 돌아가신 게 아니에요?”

“부활하셨어요.”

헤르시아는 마치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네?”

그래서 나는 그동안의 일들을 설명해줬다. 헤르시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내 얘기를 경청하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그럼 소문이 모두 다 사실이었던…….”

“공주님과 사이가 나쁜 것을 빼면 모두 사실이죠.”

 

 
헤르시아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차마 어쩌지 못하겠다는 듯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요…….”

“저도 아직도 얼떨떨하니 당연한 반응이에요. 헤르시아.”

“놀라긴 했지만, 너무 감동적인 일이에요. 국왕 전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말도 못 할 만큼 기뻐했죠. 참, 그리고 곧 저희는 공주 저하 내외와 합동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에요.”

“합동결혼식이요?”

“네. 그렇게 됐어요. 와주실 거죠?”

“그럼요! 당연하죠! 너무 잘된 일인 걸요. 안 그래도 공작부인의 결혼식 때 참여하지 못한 게 너무너무 마음에 걸렸었거든요. 정말 너무너무 잘 됐어요.”

고맙게도 헤르시아는 정말 제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참, 드레스는 제가 선물해도 될까요?”

“그럼 베로니아 공주님의 것도 같이 봐주실래요? 물론 저희 쪽에서 금액은 지급해드릴게요.”

“아니에요. 저희가 공작부인 덕분에 입은 은혜가 얼마인데요. 공작부인이 없었으면 저희는 카페도 못 차렸고, 또 길리언이 숨겨둔 재산도 받지 못했을 거예요. 여러모로 저희에게는 은인이신걸요. 그런 은인에게 드레스 두 벌. 아니, 이백 벌을 해드려도 아깝지 않아요.”

정말 이백 벌을 사다간 전 재산을 날려 먹을지도 모르지만 나를 생각하는 헤르시아의 마음이 얼마만큼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감동한 눈으로 헤르시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사실 결혼식에 참석해주는 것만도 제겐 너무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공작부인은 제게 언제나 큰 힘이 되어주시는걸요.”

“헤르시아.”

우리가 다정히 서로의 손을 잡으며 애틋한 시선을 주고받자 시카르는 나를 헤르시아에게서 떼어놓았다.


“청첩장은 곧 보내도록 할 테니.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아, 네. 공작님. 죄송합니다.”

시카르가 살벌한 눈으로 헤르시아를 쳐다보는 바람에 그녀는 도망가듯 궁을 빠져나갔다.


“시카르. 헤르시아한테 왜 그러는 거야.”

“널 평생 내 곁에 두기 위해 네가 좋아하는 모든 걸 경계할 생각이다. 그래야 네가 사라지는 걸 조금 더 막을 수가 있겠지.”

아무래도 시카르는 여전히 내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

며칠 뒤. 로엔과 제르미가 짐가방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공작님이 틀렸어요. 대신관님께서는 로엔 님을 쫓아내셨답니다.”

시카르는 은근히 무안했는지 코를 긁적거렸다.


“쫓겨난 사유는 뭐지? 대신관의 명을 어겼기 때문인가?”

제르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신전의 명을 어겼고, 신관들을 돕지 않은 이유로 신전 내부 재판 끝에 쫓겨났어요. 그래서 갈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공작님.”

“저희가 쫓겨나면 작은 제단이라도 하나 차려주신다고 하셨다고 해서 왔어요. 공작님. 저희를 외면하지 않으실 거죠?”

사실, 오늘 아침 대신전으로부터 신관 한 명을 추방하니 레카도르 왕실에서 받아주지 말라는 협조 요청서가 날라왔었다.

키안과 시카르는 그때 이미 추방당하는 신관이 로엔임을 알고 있었다.

시카르는 오전에 받은 협조 요청서에 대해 말하며 왕실에서는 로엔을 협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해주었다.

다행히 로엔은 실망한 표정은 아니었다.


“어차피 왕실에서 일할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대신전에서 쫓겨난 것에 대해서는 매우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아, 난 대신관이 목표였는데.”

“나를 돕다 쫓겨난 것이니 블레이크에서 너희를 거두겠다.”

로엔은 이미 시카르가 거두어 줄 것을 알고 와 놓고도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를 아는 주인이라면 믿고 저희 두 몸을 의탁하죠.”

“손해는 없을 것이다. 블레이크의 사람이 된다면 네가 평생 밥벌이 걱정은 하지 않게 해줄 테니까. 또한 제르미의 마법 연구를 돕기 위해 블레이크 가문의 수련의 방을 제공하고 마정석을 주기적으로 지급하도록 하지.”

이만하면 매우 파격적인 조건이었기에 제르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엔은 이미 이런 상황까지 생각해서 공작을 도운 게 아니냐고 제르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긴 했지만, 시카르가 내건 조건이 마음에 드는지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 너희가 첫째로 해야 할 것이 있다.”

“공작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늘 큰 보상을 내리셨죠. 이번 일도 큰 보상이 따라오는 건가요?”

“물론. 그리고 로엔 네 도움이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다.”

“그게 뭐죠?”

“국왕이 대신전에 신성초 일백 드라크마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내 일을 합의 보았다는군.”

로엔은 그것이 존재 가능한 숫자냐는 듯 입을 벌렸다.


“이, 일백 드라크마요?!”

“그래.”

“그 많은 신성초를 어디에 쓰길래요?!”

“그것까진 우리가 개입할 부분이 아니다. 국왕의 말로는 신성력을 지닌 자들만이 신성초를 찾을 수 있다던데?”

“네. 저도 대륙을 다니면서 몇 번 캔 적이 있죠. 하지만 그건 하나만으로도 꽤 강력한 치유력을 갖게 되는데, 일백 드라크마나 필요하다니…….”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구해줄 수 있겠나?”

로엔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다는 듯 미소지었다.


“물론이죠.”

“곧 있으면 베로니아 공주 저하와 우리의 합동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다. 공주 저하께서는 합동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신성초를 구하러 다니실 생각이라는군. 너도 그때부터 움직이면 될 것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로엔은 합동결혼식에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 합동결혼식이요? 세상에! 너무 로맨틱한걸요?”

맞아. 로엔이 이런 사람이었지?!

로엔은 생각만 해도 너무 설렌다는 듯 두 손을 모으곤 미소를 지었다.


“그럼 결혼식 때 던져지는 그 부케는 당연히 저의 것이겠죠? 부케를 두 다발이나 받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요.”

로엔의 말은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저기. 로엔 님? 로엔 님은 이미 결혼을 하셔서 부케는 미혼 분들께 양보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결혼하면 부케는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네. 로엔 님.”

로엔은 참으로 안타깝다는 얼굴로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부케를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었는데…….”

“제르미 님께서 로엔 님께 부케보다 예쁜 선물을 주실 거예요. 그렇죠? 제르미 님?”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던 제르미는 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군요. 공작부인. 그리고 무엇보다 결혼식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제르미 님.”

시카르는 머쓱한 듯 청접장을 꺼내 로엔과 제르미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모두 우리 결혼식에서 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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