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사랑이 가득한 세상
(180/197)
180화. 사랑이 가득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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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사랑이 가득한 세상
2023.02.20.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결혼식 당일은 금세 찾아왔다.
그때는 갑을 관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결혼식이지만 지금은 정말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에서 하는 결혼식이었기에 아침부터 심장이 요동쳤다.
거기다 베로니아와 함께하는 결혼식이었기에 더 떨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절할 만큼은 아니란 것이었다.
너무 떨려서 이러다 혀까지 씹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때쯤, 시카르가 내가 있는 신부대기실로 들어왔다.
“베로니아 공주님이 떨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부인은 괜찮아?”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지. 나 또한 극심하게 떨며 말했다.
“안…… 괜찮아…….”
시카르는 내 옆으로 와서 나를 안아주며 등을 쓸어주었다.
“내가 계속 곁에 있을게 그럼 좀 괜찮겠지.”
“후작님은? 좀 어때 보여?”
“어때 보이긴. 평소와 다름없지. 왜? 신경 쓰여?”
“당연히 신경 쓰이지. 결혼식을 앞두고 서연 님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리고 난 남았으니까 괜히 미안해. 그래서 그 뒤로 후작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기도 하고…….”
“그건 부인의 탓이 아니라고 했지?!”
그래도 괜히 미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날 바라보는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착잡할까…….
“그래도 마음이 무거워…….”
시카르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거렸다.
“우리가 손을 완전히 뗀 것도 아니고 비카와 듀리온이 최선을 다해서 서연을 찾고 있으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 기다리다 보면 좋은 소식이 있겠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꼭 찾으면 좋겠어…….”
그러자 시카르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 나를 떨어트리며 말했다.
“잠깐. 설마, 네 목적이 서연을 찾는 것이라면? 그런 거라면 어떡해?!”
“으응?”
“내가 저주를 풀어도 네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가, 네 목적이 내 저주를 푸는 것에서 서연을 찾는 일로 바뀐 거라면 말이야.”
시카르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난 정말 그렇게 바뀐 것인가에 대해 진지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 그런 거라면 어떡하냐고! 아무래도 안 되겠어. 비카한테 서연을 그만 찾으라고 해야겠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잖아!”
그때, 비카가 머리를 휘날리며 신부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럴 일은 없는 것 같으니 걱정 마. 공작.”
“비, 비카 님!”
시카르는 삐딱하게 서 있는 비카를 무신경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비카, 내 결혼식 따위에 참석할 시간에 서연이나 찾겠다더니. 아무래도 내 결혼식에 불참하는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지?”
“서연을 찾아서 온 거라는 생각은 안 드나?”
기적과도 같은 말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서연 님을 찾았단 말이에요?! 그럼 서연 님은 지금 어디 있다는 거죠?!”
“물론 밖에 있죠.”
나는 당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가보니 검은 두건을 덮어쓰고 있는, 내가 살던 시대의 옷을 입고 있는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끌려오고 있었다.
누가 보면, 인질이나 포로, 또는 죄인쯤으로 알기 좋았을 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꽤 익숙했다. 내가 처음 시카르에게 잡혀 왔을 때가 딱 저런 모습이었겠지.
“어서 풀어드려라!”
나의 고함 소리에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비카를 쳐다보았다.
“비카 님. 사람을 왜 저렇게 묶어서 온 거예요?”
비카는 저게 뭐 어떻냐는 듯 무감한 표정이었다.
“도망가면 안 되니까 그렇겠죠?”
도망을 생각하기 전에 놀라서 기절이나 안 하면 다행일 거 같은데.
“어서 풀어드려라!”
비카의 고함 소리에 병사들은 두건을 벗겨내었다. 두건 속에 있는 사람은 입에 재갈을 물고 있었지만, 정말 서연이 맞았다.
나는 달려가 그녀의 입에 물린 재갈을 벗겨내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
“서연 님! 괜찮으세요?!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예요?!”
서연도 제정신이 아닌 듯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으헝. 공작부인. 제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이곳에 오게 됐는데, 갑자기 병사들이 나타나서 입에 재갈을 물리더니 두건을 씌우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얼마나 험악한지는 나도 겪어봐서 알지. 나는 그 누구보다 서연을 이해했기에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서연 님, 많이 놀랐죠?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엉엉……… 공작부인. 엉엉…… 그러니까…… 그게요. 으엉…….”
그때 소식을 들은 레이독스가 뛰어나와 우리에게 달려왔다.
“서연 님!”
서연은 곧장 레이독스에게 달려가 안겼고 나는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울자 시카르는 내 어깨를 토닥여 주기 시작했다.
“저것들이 또 내 부인을 울리는군.”
하지만 시카르도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연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에 대해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니 무슨 방법을 찾아도 찾은 모양인 것 같군.”
레이독스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던 서연은 서럽게 울변을 토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그녀가 다시 가게 된 곳은 그녀의 집이었다고 한다.
현실로 오게 된 서연은 자신이 읽었던 책 ‘블러드 킹’을 찾아보았지만, 그 책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포털 사이트에서는 공공연히 블러드 킹을 보았던 사람들이 책 속 세계로 갔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공유 중이었다.
모두들 현실로 돌아오자 책은 사라지고 없었다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서연이 다시 블러드 킹을 구하려 했지만, 이미 그 책은 절판된 바람에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갔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던 서연은 결국 블러드 킹 책을 어렵게 구해 다시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 이곳에 다시 오려면 그 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네. 공작님.”
시카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지만 서연은 조금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시 현실로 소환되는 이유를 제가 찾았으니까요.”
“그게 뭐지?”
“그게 무엇입니까?”
시카르와 레이독스에 동시에 물었고 서연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포털 사이트에 사람들끼리 이유를 찾은 글들을 읽어봤어요. 그리고 거기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았죠.”
서연이 뜸을 들이며 말을 잇자 시카르는 답답한 듯 그녀를 재촉했다.
“답답하니 빨리 말하라.”
“그동안 스스로에게 가졌던 부정적인 신념이나, 저주가 해소될 때 다시 돌아왔다고 해요. 저도 제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평생 인정 못 받고 살 운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악몽처럼요. 하지만 루시가 저를 엄마로 인정해주면서 신의 저주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게 된 거죠.”
결국 스스로를 지배하던 부정적인 생각이 바뀌었을 때 다시 돌아갔다는 말인가.
“그렇군요. 어쨌든 너무 잘 됐어요. 돌아와서 너무 기뻐요. 서연 님.”
“저도 이곳에 다시 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서연과 나는 다시 서로를 부둥켜안았지만, 곧 결혼식이 거행되는 바람에 오래 안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서연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곧 우리는 베로니아 부부 내외와 나란히 버진로드를 밟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베로니아가 떨었다고 해서 믿지 않았지만, 정말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상 살다 보니 베로니아가 떠는 모습도 보게 되는구나.
“베로니아 공주 저하 내외께서 입장하십니다!”
연습한 대로 베로니아 부부가 먼저 입장을 하고 난 후 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블레이크 각하 내외께서 입장하십니다!”
이 야외결혼식에는 시카르와 조촐하게 공작저에서 올린 결혼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많은 하객이 와 있었다.
정원의 끝이 어디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하객 속에서 우리는 버진로드를 밟았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동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비카와 듀리온. 헤르시아와 아론. 로엔과 제르미. 그리고 내 사랑하는 아들 키안와 루시와 루이드. 레이독스와 서연까지.
한 가지 아쉬운 건 할머니가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지만 할머니께서 마음으로 우리를 축복해주고 계시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안 계셔서 조금 아쉽다. 그치?”
시카르는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할머니를 만나 뵈러 가도록 하자.”
“대신전에서 우리의 출입을 허가할까.”
“그건 나도 장담할 수가 없겠군.”
대신전에서 허가만 해준다면 결혼식이 끝난 후 곧장 할머니께 가고 싶었다.
결혼식 입장이 끝나고 부부가 사랑의 서약을 하며 입을 맞추는 차례가 다가왔다. 우리는 베로니아 부부 내외와 함께 동시에 서로의 입을 맞추었고 우리의 입맞춤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올리는 결혼식임에도 나는 전혀 떨지 않았다.
아니, 마음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나를 축복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했다.
어느새 달려온 키안은 공평하게 돌아가며 우리에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전 정말 복이 많아요. 어머니가 둘이고 아버지가 둘이니까. 사랑해요. 어머니. 아버지!”
그 순간이 너무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리는 모두 한 번에 키안을 부둥켜 안았고 키안은 숨이 막힌다는 듯 혓바닥을 길게 내밀긴 했지만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사실 베로니아를 찾게 됐을 때 키안을 이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도 했지만, 베로니아는 고맙게도 이런 형태로도 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사랑해. 국왕.”
“사랑해요. 어머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요.”
하지만 베로니아는 아직 키안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동시에 베로니아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러자, 베로니아는 부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키안에게 말했다.
“사, 사…… 사랑한다…… 키안.”
베로니아의 얼굴이 불타오르듯 벌게진 탓에 우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야만 했다.
그리고 키안은 멍한 눈으로 베로니아를 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꼭 끌어 안아주었다.
“저도 사랑해요. 어마마마.”
너무나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이제 더욱더 서로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발리제 또한 감동적인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다가 눈물을 훌쩍거렸다.
“부마님…….”
발리제가 눈물이 많다더니, 생각보다도 더 많은 것 같았다. 우리는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한참을 서로를 끌어안았다.
“결혼식 정말 축하드려요.”
루시가 우리에게 꽃을 내밀며 선물했고 루이드도 함께 꽃을 내밀었다.
“고마워. 루시. 고마워. 루이드.”
“너무나 아름다우세요!”
사람이 많은 결혼식은 막연히 무서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은 너무나 행복할 뿐이었다.
“참. 이제 루시도 우리와 한 가족이 되잖아.”
한 가족이란 말에 루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나는 손을 내밀어 키안과 마찬가지로 동그랗게 모여 있는 우리 중앙으로 루시를 끌어당겼다.
루시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수줍게 볼을 붉혔지만 우리는 동시에 키안과 루시를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얘들아.”
루시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우리와 함께 부둥켜안았다.
“사랑해요. 어머님들 아버님들.”
발리제는 그 호칭이 꽤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거 괜찮구나. 아가. 시댁이 둘이라 생각하지 말고 엄마가 둘이라고 생각하려무나.”
“황공하옵니다.”
수줍은 듯 붉게 미소짓는 루시를 보며 우리는 또 한바탕 웃었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는 정원에서 우리는 하객들과 함께 뒤섞여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추었다.
이상하게 이렇게 기쁜 순간에도 그동안 겪어왔던 많은 일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느낀 그 순간에 모든 일이 꼬이기도 한 지난날들이.
어쩌면 살면서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또 우리는 그 어떤 일도 극복해나갈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를 그리워했던 서연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처럼.
살면서 또 어떤 상실이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서로를 감싸고 품어주며 상실을 극복해 나갈 것이다.
사랑이 있는 한.
“무슨 생각해?”
시카르가 내 볼에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사랑에 대해 생각했어. 시카르.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사랑은, 생각하는 게 아니야. 함께하고 머물러주는 것이지.”
“그럼 넌 내게서 무엇을 느껴?”
“사랑을 느끼지. 절대적인 사랑을.”
시카르는 미소 지으며 내게 입을 맞추었다.
“늘 네 곁에 머물며 앞으로 사랑이 가득한 세상에서만 살게 해줄게.”
불어오는 바람이, 밝은 햇살이, 우리를 향해 너무나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앞으로의 내 삶이 저토록 찬란히 빛날 수 있음을 알려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