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외전1. 악역에게 이곳이 소설인 걸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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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외전1. 악역에게 이곳이 소설인 걸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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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외전1. 악역에게 이곳이 소설인 걸 들켰다
2023.02.23.
시카르와 나는 벤치에 앉아 낮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땀을 살짝 흘린 덕분인지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있는 시카르가 낮게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다.”
시카르의 볼을 살짝이 비추는 햇살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유독 반짝였다.
서연과 레이독스는 둘 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나란히 앉아 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레이독스의 시선은 한사코 서연의 얼굴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봤으니 얼마나 기쁠까.
그러고 보니, 여기서 한사코 시선이 얼굴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시카르.
내 얼굴이 닳을 정도로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서연 님 말 들었지? 사라져도 다시 올 수 있다고 하잖아. 그렇게 쉽게 안 사라지니까 그만 쳐다봐.”
“하지만 다시 오는 게 쉽지 않다는 말도 들었지.”
내가 다시 가는 것도 쉽진 않을 것 같았다. 서연이 내게 했던 말들을 떠올려 보면 난 여전히 옷장에 갇히는 꿈을 종종 꾸곤 했다.
내겐 즐겁지 않은 꿈이지만, 나를 따라다니는 그 지긋지긋한 꿈 때문에 내가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왠지 그렇게나 떨쳐 내고 싶던 꿈도 이젠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시카르의 품속으로 깊게 빨려들 듯 그를 안았다.
“괜한 걱정이야.”
“소중한 게 있고, 그렇게 소중한 걸 지키고 싶으면 걱정도 하기 마련이지.”
우리는 레이독스와 서연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왕실이다 보니 부케를 던지는 그런 이벤트는 없었다.
대신 부케식을 따로 진행하고 왕실에서 전해주는 부케를 엄중한 자세로 받아야 하는 차례는 있었다.
게다가 신부가 들고 있는 부케는 신성한 것이라 하여 축복을 내리는 의미가 있기에 이 부케를 꼭 소중한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
이 부케를 누구에게 줘야 고민하던 찰나에, 서연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서 부케의 임자를 결정하지 않고 기다린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다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버렸다.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서연 님의 몸이 쇠약해지셔서 저희는 이만 후작저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 와서 길을 헤매기도 했고 비카가 인질범을 데려오듯 했으니 몸이 안 좋을 만할 텐데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럼 어서 가서 쉬어야죠.”
“공작 부인의 결혼식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먼저 가게 돼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서연 님이 많이 지치셨을 텐데 가서 쉬도록 하세요.”
“그럼 이만.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서연은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녀의 마른 입술을 보니 이제 막 긴장이 풀려서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 것처럼 보였다.
“서연 님이 가버렸으니 이 부케를 누굴 줘야 할 지 모르겠어.”
내 푸념에 시카르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 기회가 안 보이면 나 주던가.”
설마. 진심인가.
나는 그의 어깨를 팔꿈치로 살짝 밀며 물었다.
“농담이지?”
“이 부케를 받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돌아간다며?”
“응.”
“내게 지금 필요한 게 바로 그 축복이라는 것 같거든. 자기 아내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등지고 사는 사람은 나뿐일걸. 아마?”
진담이었구나. 역시 넌 언제나 내 예상을 빗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예측 불가구나.
어쨌든 나는 결혼식 날 자신의 신부에게 부케를 달라고 하는 이 황당한 신랑에게 부케의 신성함에 대해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 부케가 왜 신성한 건 줄 알아?”
당연히 내 기억부터 볼 줄 알았는데 기특하게도 시카르는 생각을 해보려고 하다가 잘 모르겠다는 듯 볼을 긁적거렸다.
“글쎄?”
“고대에는 결혼하는 신부를 신성하게 여겼어. 그래서 하객들이 신부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아우성들이었지. 신성한 신부의 옷깃이라도 만지면 신성한 축복이 자신들에게도 온다고 믿었거든.”
시카르는 놀라우면서도 인정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아내가 신성하다는 것은 인정 안 할 수가 없겠군.”
“그래서 언제부턴가 사람들에게 손에 들고 있던 부케를 던져주게 된 것이지. 그러니까, 넌 신성한 신부와 함께 있으니까 이미 축복이 함께한다는 거야.”
“그래서 내겐 이 부케가 필요 없다는 거군.”
대놓고 삐지진 않았지만, 왠지 섭섭하다는 말투였다. 나는 그런 시카르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왜 웃지. 나는 진지한데.”
“그래서 더 웃기다고.”
“그럼 나도 신성한 부인의 손을 잡게 해줘. 자꾸 내가 손잡으려고 할 때마다 피하는데,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이야.”
하지만 날 보는 시카르의 눈빛은 조금도 위축되어 있지 않았다. 되레 냉소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기에 전혀 와닿지 않는다랄까.
“시카르. 그런 말을 할 때는 조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는 거야.”
“불쌍한 표정?”
“그래.”
“그런 표정은 어떤 표정인데?”
“그런 표정은, 그러니까…….”
우리 중에 그런 표정을 잘 짓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았지만, 우리 중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시카르의 사람들은 악역답게 다들 너무 기가 셌으며, 키안 쪽의 선역들은 너무나 고귀했기에 모두들 기가 세거나 고고한 얼굴들뿐이었다.
그렇다면…… 흠…… 뭔가가 떠오르긴 하네.
“루이드가 수련의 방에서 데스나이트를 봤을 때의 표정이랄까?”
나는 시카르가 대번에 호응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반응은 완전히 뚱했다.
“나는 그런 방법으로 부인의 손을 잡지는 않을 거야.”
“그럼?”
시카르는 내게 성큼 얼굴을 내밀며 나를 궁지에 몰듯 다가왔다.
“부인이 내 손을 잡고 싶어서 안달나게 만들 생각이거든.”
“어, 어떻게?”
이 물음에는 무슨 수로 내게 그럴 수 있겠냐는 것도 있었다.
시카르는 일어서더니 내게 어서 일어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하려는 거지?’
어쨌든 나는 그에게 협조하기 위해 따라 일어섰다.
“자, 이젠 어떻게 내가 네 손을 잡게 할 생각이야?”
그러자 시카르는 비릿하게 씨익 웃었다.
저 웃음, 묘하게 불길한데.
아니나 다를까. 시카르는 웃음을 멈춘 후 검지로 내 이마를 살며시 밀었다. 그리고 나는 중심을 잃고 뒤로 휘청거리며 졸지에 새가 두 날개를 파닥거리듯 두 팔을 파닥이는 신세가 돼 버렸다.
“어어. 사카르! 너!”
시카르는 여유 있게 한 손을 내밀고는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어서 잡아. 부인. 여기서 넘어지면 드레스에 흙을 다 묻히고 말 거야. 헤르시아가 선물해준 귀한 드레스를 망치면 안 되잖아?”
이. 미친 노오오오……옴!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카르의 손을 잡았고 그는 씨익 웃으며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달 나서 내 손을 잡게 될 거라고 했지?”
“안달 나서 잡은 게 아니라 아찔해서 잡은 거야!”
시카르는 그것도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신성한 신부의 손을 잡게 해주어서 감사하오. 부인.”
날 밀어서 내가 강제로 제 손을 잡게 해놓고선 이렇게 능청스럽게 구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시카르가 변했다고는 해도 뼛속까지 시카르는 시카르였다.
하지만, 그런 악동 같은 시카르의 모습에 묘하게 끌리기도 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시카르를 보며 나도 그의 이마를 살짝 밀어 볼까 생각하던 차에 시카르의 뒤로 로엔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로엔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로엔은 상당히 흥미롭다는 듯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공작부인의 손을 잡는 방법이 매우 독특하시군요.”
“칭찬 고맙군. 로엔.”
저 말이 어떻게 칭찬으로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카르는 그 말이 거슬리지 않는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미소를 짓긴 지었다. 물론 떨떠름한 미소였지만.
“괴팍하다는 말을 독특하다는 말로 포장해줘서 고마워요. 로엔. 어서 오세요.”
“포장이라뇨. 성인식 축제가 생각나던걸요. 그만큼 로맨틱해 보였어요.”
하긴, 로엔도 상당히 독특한 성격이었지.
“공작님. 제르미 님에게도 그런 박력을 좀 가르쳐 주시면 좋겠어요.”
“박력이요?”
아무래도 로엔은 괴롭힘과 박력을 혼동하는 것 같은데.
“처음엔 분명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뒤부턴 허구한 날 저 로브를 입고 있거든요.”
제르미의 귀가 어두워 다행이었다.
시카르는 별 시덥지 않는 말을 다 듣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마법사가 제복같이 무거운 옷을 입고 다닌다면 어떻게 마법을 구사할 수가 있겠나.”
“그래도 제르미가 가끔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닌다면 더욱 멋있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허구한 날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기사보단 낫죠. 로엔.”
로엔은 무슨 그런 말을 다 하냐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아니, 아무렴. 그렇다고 늘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어요.”
늘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던 그런 미친놈이 여기 있답니다. 로엔 님.
그 미친놈, 아니 시카르는 뜨끔했는지 굳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관심 없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베로니아 공주님과 함께 신성초 원정을 떠나는 날짜는 정해졌나?”
“아, 아직 공주님께서 그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리고 공주님께서도 결혼식 축제를 조금 더 즐겨야 하지 않겠어요?”
시카르는 그 말에 호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건 그렇겠지.”
“참, 곧 있으면 부케식이 있다는데 부케는 누구를 주기로 정하셨어요?”
“아직 결정 못 했어요. 마땅히 누굴 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로엔은 잘 됐다는 듯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비카 님은 어때요?”
“비카 님이요?”
맙소사 비카가 부케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카르는 마음에 드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비카가 질색할 모습이 기대가 되는데?”
시카르는 사악한 웃음을 지었고 나는 동조할 수 없었다.
비카가 부케를 던지지만 않으면 다행일 거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시카르. 그건 힘들 거야. 난 비카 님께 드리지 않을 생각이거든.”
시카르는 왜 그러냐는 듯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차피 줄 사람이 비카 말고는 없잖아.”
“아니야. 한 명 있어.”
“누구?”
시카르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시카르가 방금 지었던 웃음처럼 악동을 흉내 내듯 웃었다.
“루시에게 줄 거야.”
시카르도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