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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외전2 (182/197)


182화. 외전2
2023.02.27.


내가 루시에게 준다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시카르는 조금 실망스러운 듯 눈꼬리를 내렸다. 비카가 경악할 모습을 그리다 실패하게 되자 실망한 눈치였다.


“왜 루시에게 주려고 하는 거야?”

“서연 님이 없으니까. 마땅히 줄 사람도 없고. 또, 생각해 봐. 루시에게 축복을 주는 의미도 있으니까 나쁘지 않잖아.”

물론 루시가 부끄러움을 좀 타긴 하겠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울지 상상하니 흐뭇했다.

하지만 시카르는 싱겁다는 얼굴로 코를 긁적거리기만 했다.


“비카가 경악할 모습은 못 보겠군.”

“대신 루시의 귀여운 모습을 보게 될 거야.”

“글쎄. 루시가 은근히 영악한 데가 있어서 그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능청스럽게 받아 줄 것 같은데.”

“그건 루시가 영악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영리해서 그런 거야. 그리고 뭐, 루시가 별로 놀라지 않는다면 키안이 놀랄 테니까 키안이 귀엽게 놀라는 모습을 봐도 나쁘지 않잖아?”

시카르는 그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럼 차라리 부케를 키안에게 주는 게 어때. 부케를 꼭 여자에게 주라는 법은 없잖아?”

“키안은 이미 축복받은 왕이잖아. 앞으로 황후가 될 루시에게 축복을 내리는 의미니까 루시에게 주고 싶어.”

시카르는 또다시 재미없다는 듯 싱거운 표정을 지었다.


“부인 마음대로 하시오.”

낯빛이 시무룩해진 걸 보니 실망한 눈치가 역력했다.

그런 시카르의 표정이 왠지 귀여워서 보여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시카르가 가끔 저렇게 툴툴거리는 게 귀여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인 모양인데.

***

곧 부케 증여식이 열렸다.

부케 증여식이라봤자 거창한 건 아니었지만 마치 상을 주듯 호명되는 사람에게 신성한 왕실 신부의 부케를 주는 것이었다.

하객 및 귀빈들은 삼삼오오 모여 부케를 누가 받을지 궁금해하는 눈치들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결혼식은 부케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니 더욱더 흥미로운 듯했다.

나는 부케를 넘겨주는 입장이기도 했지만, 하객들의 호기심에 공감했다.

베로니아가 누구에게 부케를 넘겨줄지 궁금한 입장이기도 했으니까.


“베로니아는 누구에게 줄까.”

시카르는 관심 없는 듯 서 있다가 마치 뭔가가 생각난 듯 나를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비카에게 주면 좋겠군.”

“그렇게 비카를 골려주고 싶어?”

“결혼식이 끝나면 비카가 맹약을 풀어달라고 엄포를 놓겠지. 그래서 그 전에 비카에게 기가 막힌 선물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아. 그렇지. 서연을 찾으면 비카와의 맹약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이제 그녀도 떠나겠구나.

그 생각을 하니 못내 아쉬웠다.


“그럼 비카 님께 드릴까. 부케는 축복을 의미하는 거니까 앞으로 비카 님의 앞길에 축복이 내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드린다고 하면 받으실지도 모르잖아.”

시카르는 기특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기특한 생각을 하셨군. 부인.”

물론 시카르는 비카의 앞날에 대한 축복보단 비카가 경악하며 부케를 들고 몸서리치는 모습을 더 기대하며 웃는 거겠지만, 그래도 시카르의 마음속 어느 한구석에는 비카를 축복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아까 부케에 대해 좋은 말을 한 걸 비카가 엿들었다면 좋을 텐데. 그럼 두 번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근처에 비카는 보이지 않았다.


“비카가 안 보이는데 내가 호명해도 안 나타나는 거 아니야?”

“또 어디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겠지. 귀가 밝으니 부르면 나타날 테니 걱정 마.”

시카르의 말대로 걱정을 내려놓기로 했다.

곧이어 사람들이 어느 한 곳을 보며 차례로 인사로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베로니아가 우아한 자태를 빛내며 걸어왔다.

손에는 부케를 들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걸어오는 베로니아의 모습은 정말…… 보고 또 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아름다운 위압감이 있었다.

베로니아가 두 손에 부케를 들고 서 있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조아렸다.

자유로운 결혼식과는 사뭇 다르게 엄중한 결혼식이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장엄한 분위기가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과연 베로니아가 누구를 호명할지 기대하며 보고 있는데, 베로니아가 호명한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베로니아가 호명한 사람은 바로 루시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잖아?’

“루시 유카나다르 나오거라.”

루시도 놀랐겠지만 나도 깜짝 놀라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시카르는 잘 놀라지 않는 성격 덕분인지 아주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루시는 조금 놀란 듯하더니 시카르의 말대로 고고한 얼굴로 걸어 나와 베로니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예. 저하.”

베로니아는 루시를 향해 부케를 건네며 말했다.


“신성한 신의 축복이 영원히 너와 함께할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저하.”

예상대로 루시는 괜찮았지만, 키안이 얼굴이 벌게져서는 먼 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키안의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왜 네가 부끄러워하냐고 묻을 싶을 정도였다.

이젠 내가 부케를 받을 사람을 호명할 차례였다.

제발 비카가 도망가지 말고 와줘야 할 텐데.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비카를 불렀다.


“비카 램버스트.”

하지만, 비카는 금세 대답하지 않았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시카르를 슬쩍 노려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뭐야 없잖아.”

시카르는 전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서 있었다.


“일부러 안달 나길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비카. 듀리온이 내 명령이라면 목숨 걸고 뭐든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당장 안 나오면 듀리온에게 너와 결혼하라고 명령할 거야. 듀리온이 목숨 걸고 널 쫓아다니며 결혼하자고 조르게 만들 거라고.”

시카르의 말이 효과가 있었던지 갑자기 우리 뒤쪽에서 비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정말 꿈에 나올까 무서운 소리군.”

시카르가 비카를 불러내는 방법이 상당히 독특했지만, 어쨌든 비카는 유유히 걸어 나와 내 앞으로 와서 섰다.


“찾으셨습니까.”

나는 손에 들고 있는 부케를 비카를 향해 건네주었다.


“신성한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길.”

비카는 능숙하게 인간의 법도를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비카 램버스트는 공작부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부케식이 끝나고 나니 완전히 결혼식이 끝나는 게 실감이 났다.

결혼식은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하나씩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는 공작저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먼저 베로니아에게 공작저로 돌아간다는 보고를 올렸다.

베로니아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결국, 내가 이 궁을 차지하게 만들고 가는군. 조용히 목적을 이룬 것을 축하하지.”

나는 왠지 그 말이 내가 떠나서 아쉽다는 말로 들려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저하.”

베로니아는 당연한 얘길 한다는 듯 나른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 정도 염치는 있어야겠지.”

한편, 발리제의 반응은 베로니아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시카르가 부담스러워할 만큼 그를 부둥켜 끌어안았다.


“보고 싶을 겁니다. 자주 오십시오. 공작님. 키안, 아니, 국왕에게 듣자니 공작님께서 닭고기 수프를 좋아하신다더군요. 오시면 제가 아주 근사하게 대접하겠습니다.”

시카르의 표정은 거의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지만 그는 꾹 참으며 발리제의 포옹을 견뎌(?)내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레카도르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진정하십시오.”

발리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이내 시카르는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해야 했다.

블레이크가 레카도르에서 멀지 않다는 말을 들은 발리제가 두 눈을 더욱 희번덕거렸으니까.


“그럼 자주 오셔야 합니다.”

빈말을 못 하는 성격 탓에 시카르는 대답 대신 호탕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하하하. 저희는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시카르 대신 내가 발리제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부마님. 공주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자주 찾아뵐 생각이에요.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발리제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눈꼬리를 내렸다.


“이렇게 헤어지게 돼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릅니다. 자주 오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공작부인.”

근위대장의 아들로 태어나 답답한 규율에 얽매여 살았던 탓에 발리제는 격식에 숨 막혀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발리제는 정말 격이 없었다.

시카르는 키안의 친부이자 부마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발리제의 손을 떼어내며 엄중히 말했다.


“뜻이 좋아도 행동이 잘못되면 전달은 왜곡되고 의미는 퇴색됩니다.”

좋아. 아주 예의 있게 화내고 있군.

발리제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제가 오랫동안 설산에서 지내며 평범한 산지기로 살다 보니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 그렇겠구나. 숨어 지내다가 거의 평민처럼 살았으니 사람을 볼 일이 별로 없었지.

거기다 다시 살아났을 때도 설산에서 베로니아와 함께 지냈으니까.

나는 되도록 발리제가 덜 미안해할 수 있게 활짝 미소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부마님.”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베로니아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다시 궁을 찾았을 땐 발리제가 다시 법도를 익힌 상태겠지.

오늘은 모두들 공작저로 돌아가는 날이었기에 마차가 많이 대기해 있었다.

막상 공작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했다.

헌데 마차에 오르려고 보니 비카가 우리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어? 비카 님. 마차를 잘못 타신 것 같아요.”

비카는 기다렸다는 듯 여유 있는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가기 전에, 맹약을 풀고 가지.”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서 있는 시카르에게 한 말이었다.


“공작저에 가서 해도 되잖아.”

“아니. 난 바로 떠날 작정이야.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해.”

비카의 눈빛에 장난이라고는 없었다. 마차에 올라타려던 듀리온도 멈칫하고 비카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드디어 가는 거야? 비카?”

“그래 이젠 떠날 시간이야.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지.”

시카르는 잠시 생각을 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네놈을 더는 써먹을 데가 없을 것 같으니 보내주는 게 맞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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