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외전3 (183/197)


183화. 외전3
2023.03.02.



 


‘그럼 지금 정말 맹약을 파기하는 거란 말이야? 이렇게 갑자기?’

이상했다. 벌써부터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카가 정말 맹약을 파기하다니. 전에는 시카르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제 자리로 돌아왔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비카가 떠난다니 이상하게 마음이 찌릿했다.


“어서. 약속을 지켜. 이 공작 놈아.”

시카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모았다. 그러자 비카도 손을 모으며 시카르의 앞에 섰다.

지, 진짜 이렇게 맹약을 깨는 건가?

내가 정말이냐는 듯 듀리온을 쳐다보자 듀리온은 그럴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았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두 사람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모두 마차를 타고 먼저 떠나가고 있었기에 이곳엔 우리 넷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시카르는 뭐라고 중얼중얼거리고 있었고 비카는 얌전히 시카르의 앞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몇 번 더 중얼거리던 시카르는 모든 게 끝난 듯 고개를 들으며 비카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이로써 우리의 맹약은 끝이 났노라.”

비카는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피식 웃으며 허리에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이제 맹약이 끝났으니 널 죽여도 되겠지. 공작.”

시카르 역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리춤에서 길이가 짧은 검을 꺼내 들었다.


“마찬가지다. 비카.”

‘뭐, 뭐야. 이 사람들. 왜 작별을 이런 식으로 검을 겨누며 하는 거냐고!’

나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앞으로 뛰어나갔다.


“비, 비카 님? 시, 시카르? 두 분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검 내려놓고 진정해요. 이곳이 왕궁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죠?”

비카는 웃으며 시카르를 향한 검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마님께서…… 아니지. 이젠 마님이 아니지. 유라 님께서 참견할 일이 아니니 빠지세요. 그동안 저 공작 놈에게 당한 빚을 갚는 것뿐이니까.”

“부인. 내가 어디 가서 맞고 오는 거 봤어? 별일 없을 테니 안심하고 뒤로 물러나 있어.”

‘이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해!’

슬픈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작별인사는 정말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곧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서로들 웃고는 있었지만 싸움은 살벌했다.

나는 두 사람을 멀뚱멀뚱 보고 서 있는 듀리온에게 쫓아갔다.


“듀리온 님, 저 사람들 좀 말려봐요.”

듀리온은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비카가 오래전에부터 맺힌 게 많아서 그래요. 맹약이 풀리면 공작님을 죽이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거든요.”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왜 안 말리는 거예요?”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구요.”

“네?”

“원래 서로에게 맺힌 게 많으면 싸워야 풀리잖아요.”

“그, 그건 그렇죠?”

“비카도 쌓인 게 많아서 싸워야 풀릴 거예요. 공작님도 그걸 알고 계시고요. 그래서 이 싸움은 안 말리는 게 화해시키는 거예요. 마님.”

그런 건가?

저게 바로 검잡이들의 세계인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살벌하게 싸우는데?

나는 심장이 떨려서 도저히 두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듀리온, 저는 못 보겠어요. 싸움이 끝나면 말해주세요.”

그나마 졸도하지 않은 것은 듀리온이 하품까지 하며 느긋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좀 전까지 비카를 떠나보낼 생각에 감정이 복받쳐 오를 뻔했지만, 지금은 이제 막 슬퍼지려던 마음이 와장창 무너져 버렸다.

등 뒤로 챙챙!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등골이 오싹오싹할 뿐이었다.


“듀리온 님, 아직 멀었어요?”

“다 끝나가는 것 같습니다.”

휴, 다행이다. 하려는 찰나에 챙그랑 소리가 들리며 검이 날아가 듀리온의 옆으로 박혔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듀리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날아온 검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공작님 승!”

공작님 승?

그럼 시카르가 이겼다는 말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시카르가 비카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며 웃고 있었다.


“패배를 인정해라. 비카.”

비카는 제 목을 겨누고 있는 시카르의 검을 손으로 툭 쳐내며 콧방귀를 뀌었다.


“항상 넌 운이 좋았지. 이번에도 운발로 이긴 주제에 승자인 척 구는군.”

비카는 그렇게 말하며 침을 한 번 퉤 뱉고는 검을 받아가기 위해 듀리온을 향해 걸어왔다.

듀리온은 씨익 웃으며 비카에게 검과 부케를 내어주었다.


“이제 떠나는 거야?”

“그래. 이젠 떠날 시간이야.”

듀리온은 조금 아쉬운지 코를 긁적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가기 전에 악수나 한번 하고 가.”

비카는 별 해괴망측한 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음으로써 듀리온의 손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듀리온은 내밀었던 손을 다시 공손히 집어넣으며 말했다.


“잘 가.”

비카는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임으로써 작별인사를 마무리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이상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 한 켠이 쓰리는 것만 같았다.

이별이 이렇게 순식간에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더 가슴이 쓰렸다.

나는 비카의 뒤를 쫓았다.


“저, 비카 님!”

비카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죠.”

나는 가지고 있던 보석을. 그러니까, 시카르가 내게 준 보석들을 있는 대로 풀어서 비카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디든 가면 돈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가서 여비로 쓰시라고요. 그리고 그 부케는 절대 팔면 안 돼요. 비카 님께 축복을 안겨줄 부케니까요.”

뒤에서 시카르가 또 자신이 선물한 보석을 남한테 막 준다며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떠나는 비카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줄 수 있는 게 그게 전부였다.

다행히 비카는 거절하지 않고 내가 건넨 보석들을 잽싸게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역시 유라님은 현실적인 데가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부케는 안 팔 생각이에요. 꽃은 저도 좋아하니까요.”

잠깐. 좋다고? 그러니까, 지금 꽃도 꽃이지만, 지금 나더러 좋다고 한 거지?


“비카 님.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제게 좋다고…….”

비카는 주머니에 보석을 털어 넣다가 흠칫하더니 새침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 싫어한 적도 없었습니다만.”

그동안 비카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아주 눈곱만큼이라도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비카의 말이 파도처럼 내 심장을 따뜻하게 덮쳐오는 느낌이었다.

나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을 텐데…….


“절 싫어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비카 님.”

비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잘 지내세요.”

“저희.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비카는 생각하는 듯 싶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언젠가 또 볼 날이 있겠죠.”

“부인. 이만 비카는 보내줘. 우리도 가야지.”

시카르는 전혀 아쉽지 않은지 마차에 기대서 어서 타라는 듯 나를 향해 고개짓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비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만 했다.


“비카 님도 잘 지내세요, 그리고 제가 노인이 되기 전에 공작저에 한번 들러주세요. 꼭이요.”

비카는 나를 향해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물론 활짝 미소를 지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건 명백한 웃음이었다.


“비카 님, 지금 웃었…….”

“그러게요. 공작 놈이 마님 덕분에 처음으로 웃어봤다고 하던데, 저도 마님 덕분에 처음으로 웃는군요.”

“비카 님…….”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해서 나는 꾹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비카에게 우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이기 싫었으니까.


“마님이 제게 선물을 주셨으니 저도 마님께 하나를 알려드릴게요. 공작은 알고 있어요.”

시카르는 원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데. 또 뭘 알고 있다는 말이지?

내가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비카는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마님이 왜 악몽을 꾸는지 알고 있다고요. 저 엉큼한 놈이 알고 있으면서 말을 안 하는 거죠.”

시카르가 그걸 알고 있었다고?


“그럼 전 이만.”

비카는 야속하게도 곧장 돌아서 뒤도 안 보고 걸어갔다.

돌아서 가는 비카의 손에 부케 하나만이 덩그러니 들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비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혼자서 듣지 못할 작별인사를 하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비카. 꼭 다시 봐요. 꼭. 그동안 잘 지내요. 비카.’

비카가 떠나는 모습이 왜 이렇게 슬프게 느껴지는 건지.

괜시리 마음이 찡했다.

우리도 이제 마차에 오르려고 하니 저 멀리서 키안이 뛰어왔다.


“어머니!”

“국왕. 어찌 오셨어요.”

“어머니가 궁을 떠나신다는데 제가 배웅을 나와야죠.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키안이 배웅을 나오지 않았어도 전혀 서운해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막상 잊지 않고 우리를 배웅 나오니 마음이 뭉클했다.

하지만 키안이 효심이 깊은 국왕이 되기보단 원작처럼 국무와 정사에 더 몰두하는 국왕이 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베로니아도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 일정이 바쁜 와중에도 결혼식에 참석까지 하시었는데 배웅까지 하다뇨. 국왕에겐 국무가 우선이 돼야 해요.”

“그래도 부모님께서 궁을 떠난다는데 자식 된 도리로 배웅을 나와야죠. 어머니. 다음에도 저는 나올 거예요.”

“기특하군. 키운 보람이 있어.”

시카르는 장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서 나는 그만하라는 듯 그를 흘겼다.

그러자 시카르는 내 말이 맞다는 듯 키안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들으셨소? 다음엔 어머니 말씀을 잘 들으시게. 국왕.”

“공주 저하는 물론이고 백성들이 국왕께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아셔야 해요. 다음에는 국무를 뒤로 하고 배웅을 오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아셨죠?”

키안은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네. 어머니…….”

내가 감동할 줄 알았다가 괜한 소리나 들어서 서운한 눈치였지만 할 수 없지.

문득 키안은 시선을 돌리다 비카가 없는 것을 발견하곤 물었다.


“비카 님께서는 먼저 가셨나 봐요.”

“아. 비카 님께서는…….”

키안이 자라는 동안 비카가 늘 곁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면 놀라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래서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시카르는 거침없이 비카가 떠났다고 말했다.


“네? 비카 님이 떠났다고요?”

“완전히 떠났으니까 그렇게 아시오.”

키안은 짐짓 믿기지 않는 듯 멍하게 서 있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어, 언제 떠났어요? 어머니?”

“방금이요.”

“어, 어머니. 전 비카 님께 작별인사 좀 해야겠어요. 들어가세요. 어머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 가는 키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카르가 없는 동안 비카가 키안의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주었고 궁에 들어와서도 비카가 곁에서 보필해주었으니 키안의 성격상 정이 들어도 들지 않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괜한 말을 했어. 부인.”

“응?”

“비카가 방금 떠났어도 국왕의 속도로는 비카를 만날 수 없을 거야. 비카는 숲을 달려서 가니까. 인간이 따라잡기는 힘든 속도거든. 아마 지금 따라가도 허탕만 치겠지.”

“그럼 국왕이 많이 실망할 텐데…….”

“할 수 없지. 언젠가는 했어야할 작별인사일 뿐이야.”

시카르는 그동안 비카와 함께 지내면서도 항상 그녀와 헤어질 것을 염두에 두었던 걸까.


“시카르. 넌 괜찮아?”

“뭐가?”

“비카 님이 너무나 갑자기 떠났잖아. 가까운 걸로 치자면 비카 님과 네가 가장 가까웠으니까. 괜찮나 싶어서…….”

시카르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코를 긁적거렸다.


“당연히 아무렇지 않지. 내겐 부인이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시카르는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러니까 어서 우리도 이만 출발하자. 우리 오늘 두 번째 첫날밤을 보내야 하는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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