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외전4
(184/197)
184화. 외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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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외전4
2023.03.06.
두 번째 첫날밤…….
시카르는 마차에 타고서도 두 번째 첫날밤 얘기였다.
“두 번째 첫날밤이어도 첫날밤은 설레는 법이지.”
어쩌면 그 두 번째 첫날밤을 생각하느라 비카와의 작별을 덜 아쉬워한 게 아닐까.
“두 번째 결혼식이라 두 번째 첫날밤이지만, 실상 나에게는 결혼식 첫날밤과도 같은 밤이지. 물론 첫날밤은 이미 치루었지만.”
시카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았던가.
어쨌든 그는 첫날밤 생각에 매우 설레 보였고 계속 첫날밤 얘기를 하고 있어서 민망해진 나는 그를 조금 진정시키고 싶었다.
무슨 말로 진정시키는 게 좋을지 생각하던 차에, 문득 비카가 떠올랐다.
“근데 시카르. 비카 님은 어떻게 만난 거야?”
시카르의 생각을 환기시키고 싶은 목적도 있었지만, 소설엔 그 이야기가 안 나오니까 궁금하긴 했었다.
시카르는 신나게 떠들다 그때 일을 회상하듯 멈추었다.
“비카는…….”
그러고는 그때 일을 회상하듯 나직이 비카의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비카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다크엘프 마을에서 추방되었다.
그렇다고 비참하게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 비카의 친부가 사망하고 난 후에 재판을 한다고 하자 비카 스스로 마을을 빠져나왔다.
백년을 넘게 다크엘프 마을에서 살았지만 혼혈이라는 이유로 친구 한 명 사귀지 못했기 때문에 비카는 마을을 나오면서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 비카는 진작 마을을 나오고 싶었지만, 제 아비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친부가 사망하자마자 비카 스스로 먼저 마을을 벗어나려던 차에 재판이 열린 것뿐이었다.
지긋지긋한 심정으로 마을을 벗어나긴 했지만, 밖은 비카의 생각보다도 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인간에게 사기를 당한 비카는 잘못된 지도를 들고 용의 협곡을 찾았다.
그곳이 옹골리안트(거대거미) 둥지라고는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한참을 길을 잘못 들어선 비카가 다시 발길을 돌렸을 땐 이미 사방이 거미줄로 가득한 뒤였다.
꼼짝없이 먹이 신세가 된 비카는 어떻게든 옹골리안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둥지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옹골리안트의 거미줄을 베어가며 나가도 둥지 안은 완전히 미로였다.
이곳이 미로인지도 모르고 저도 모르게 지도만 보며 걸어온 것이었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무던히 앞으로 나아가던 비카가 미로 끝에 다다랐을 땐 막다른 길이었다.
통로라고는 머리 위로 보이는 까마득한 구멍이 전부였다.
그때, 머리 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도 아니잖아. 고대 부활서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무언가 불만에 가득 쌓인 듯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그때부터 비카는 그 목소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고대의 부활서는 내가 들고 있다!”
그러자 목소리는 비카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물었다.
“거기 누구야?!”
“나를 이곳에서 꺼내주면 고대의 부활서를 네게 주겠다!”
그러자 구멍 위로 횃불과 함께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시카르였다.
시카르는 옹골리안트 둥지 안에 들어가 있는 인간을 어이없게 바라보고 있었다.
“옹골리안트 둥지에 제 발로 걸어가 있는 바보에게 고대의 부활서가 있다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란 소리야?”
물론 비카에게 고대 부활서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목숨줄이 경각에 달려있는 마당에 시카르가 눈치 좀 챘다고 당황할 비카가 아니었다.
“그래! 내가 갖고 있다! 이곳에 있는 걸 내가 주웠어!”
“그럼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봐!”
비카는 손에 있는 양피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냥 이렇게 생겼다!”
사실 그건 인간에게 사기당한 지도였지만, 비카는 능청스럽게 그것이 마치 고대의 부활서인 것처럼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시카르가 비카의 기억을 본다면 그것이 정말 고대의 부활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을 테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비카의 기억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카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할 수는 있었다.
“그래? 그게 정말 고대의 부활서가 맞다고 확신한단 말이지?”
“그래! 그러니까 날 구해라! 그럼 이걸 네게 주겠다!”
“좋아. 대신 그전에 나와 맹약을 하도록 하지.”
지금까지 당당하던 비카가 당황으로 말을 더듬었다.
“매, 맹약?”
“나와 맹약을 하면 내가 널 구해주도록 하지. 그리고 지도를 내게 준다면 당장 맹약을 파기해주겠지만, 만약 네 말이 거짓이라면 넌 나와의 맹약에 의해 영원히 내게 종속될 것이다.”
비카는 이를 으드득 갈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망할 놈.”
하지만 그 소리는 매우 작았기에 시카르가 듣기에는 그저 중얼거리는 어떤 소리로만 들렸을 뿐이었다.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리는데?!”
“너는 몰라도 되는 소리다. 그런데, 나와 맹약을 하게 된다면 우린 운명을 같이하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나?”
“상관없어. 운명을 같이할 테니 적어도 네가 날 죽이진 못할 거 아니야?”
비카는 또다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젠장할.”
“뭐라고?”
“좋아! 너와 맹약을 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어서 날 구해라!”
“무슨 소리. 구하는 건 맹약을 하고 난 뒤에나 가능한 것이지.”
시카르는 비카를 향해 맹약서를 던졌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 맹약서가 빛을 내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맹약에 종속된 자.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운명을 함께하리니. 둘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이 맹약은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
“맹약서는 어떻게 들고 있었던 거야?”
“고대 부활서를 찾다가 얻어 걸린 거지.”
시카르는 더 들려줄 게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한창 얘기에 빠져 있던 나는 조금 아쉬웠다.
“이야기는 이게 다야?”
“다야. 구하고 보니 비카에겐 부활서가 없었고, 나를 속인 게 분하기도 해서 지금까지 맹약을 파기해주지 않은 거니까.”
“한마디로 비카 님이 사기 친 거구나.”
“그렇지. 완전히 나를 갖고 사기 쳤지.”
“하지만 결국 비카 님이 고대의 부활서를 찾는 데 도움을 줬으니 결과적으로 비카 님이 약속을 지킨 거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흘러간 거지만, 그땐 그냥 사기꾼일 뿐이었지.”
“그런데 비카 님은 어딜 가려고 했길래 지도를 사기당하신 거야?”
“아. 비카가 찾은 건. 혼혈종족들이 사는 마을이야.”
“혼혈종족들이 사는 마을?”
“인간이 될 수도 없고 엘프가 될 수도 없고, 또는 뱀파이어가 될 수도 없는 그런 종족들이 사는 마을.”
그런 마을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비카 님은 그럼 지금 그곳을 찾아간 거야?”
“그렇겠지. 계속 그곳을 가고 싶어했으니까.”
비카가 왜 그렇게 시카르를 떠나려 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갈 곳이. 가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이방인이지만 자신을 이방인으로 봐주지 않을 사람들. 나와 비슷한 이들을 향해 비카가 발길을 재촉했던 것이었어.
늘 이방인 취급을 받던 비카가 자신과 비슷한 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가는 마음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설렘과 기대로 가득하겠지.
아까는 비카가 떠난 것이 그저 아쉽기만 했지만, 지금은 비카가 무사히 잘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왠지 그 생각을 하니 나도 조금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지만, 이내 시카르 때문에 뭉클한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이제 비카 님이 행복해지셨으면 좋겠다.”
“비카도 가보면 알겠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곳은 살 곳이 못 된다는 걸.”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비카가 자기처럼 재미없고 성질 더러운 사람들과 같이 지낸다는 걸 상상만 해도 그림이 나오잖아? 그건 파국이지.”
이미 비카는 자기처럼 재미없고 성질 더러운 시카르와 같이 지낸 적이 있어서 거기서도 잘 지낼 것 같은데.
어쩌면 비카는 그곳에서 더 잘 지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일 테니까.
그 생각이 들자 나도 비카의 공간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비카 님 보러 가자!”
“어딜?”
“어디긴. 비카 님이 있는 곳으로 가잔 거지. 비카 님이 늘 우리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비카 님의 공간으로 들어 가는 거야.”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말했지만 시카르의 반응은 건조했다.
“우린 못 가. 거긴 혼혈들만 갈 수 있는 곳이라 들여 보내주지도 않아.”
나는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밖에서 그들을 배척했으니 똑같이 하는 거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별수 없지. 비카 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지.”
내가 실망한 표정을 보이자 시카르는 신경 쓰였는지 내 눈치를 몇 번을 더 보더니 말해다.
“비카가 있는 곳에 그렇게 가고 싶어?”
“응. 좀 궁금해.”
“그럼 가야지. 부인이 가고 싶다고 하니 내가 데려다줄 수밖에 없겠군.”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비카 님과 갑자기 작별해서 아쉬웠는데. 생각만 해도 설레.”
“대신 조건이 있어.”
그럼 그렇지. 웬일로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했다.
“조건 무슨 조건?”
“뭐 별 건 아니야.”
“별거 아니라면 다행…….”
“당장 아이를 갖는 조건.”
하여튼 사람을 당황시키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내가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자 시카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부가 아이를 갖는 건 당연한 일이야.”
“누가 뭐래. 당장 갖자고 하니까 그렇지. 우리가 당장 갖고 싶어 한다고 그렇게 당장 아이가 와주는 것도 아니고…….”
“다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마. 부인.”
“방……법?”
“매일 합궁하는 거지. 그럼 아이를 안 가지려고 해도 안 가질 수가 없겠지.”
나는 낯뜨거워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시카르가 나를 향해 뜨거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던 탓에 더욱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비카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참, 비카 님이 그러는데 내가 왜 악몽을 꾸는지 네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던데?”
내게 잔뜩 뜨거운 눈길을 보내던 시카르의 표정이 경직된 듯 멈추었다.
이번엔 시카르가 내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