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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화. 외전5 (185/197)


185화. 외전5
2023.03.09.


시카르는 갑자기 너무 피곤하다며 자는 척을 함으로써 악몽 이야기를 피해갔다.

이제 보니 시카르가 두 번째 첫날밤 얘기를 하며 떠든 것도 비카가 내게 악몽 얘기를 했다는 걸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수다를 떨었구나. 내 입을 막으려고.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리느라 시카르가 내 손을 잡아주자마자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악몽을 꾸는 이유가 뭐야?”

시카르는 또 선득한 표정을 짓더니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리듯 내 어깨를 잡고 저택으로 향했다.


“부인. 우린 지금 늦었어. 오늘부터 로엔과 제르미가 공작저로 들어오는 날이라는 건 잊지 않았겠지?”

“물론 잊지 않았어. 근데…….”

“그러니 어서 들어가자. 사람이 잘 지낼 수 있게 안내해 줘야지.”

내가 방금 들은 게 헛소리가 아니라면 시카르가 분명 ‘안내’를 한다고 말한 것 같은데?


“방금 안내를 하겠다고 한 거야?”

“물론이지.”

시카르는 다급한 듯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그러니 어서 들어가자. 손님들이 기다리잖아?”

“이유가 얼마나 충격적이길래 이러는 거야…….”

“충격은 무슨 별거 아니니 그런 거지.”

별거 아닌 게 아니면 말을 했겠지. 여튼 무슨 이유가 있긴 한 모양인데.

지금은 시카르의 말대로 앞으로 공작저에서 함께 지내게 될 로엔와 제르미의 방을 안내하는 게 먼저긴 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공작저였지만, 여전히 병용을 운영하고 있었고 관리를 잘한 덕분에 공작저는 변한 것이 없었다.

뒤뜰에는 시카르가 심어둔 장미꽃도 여전했다.


“우리가 없는 동안에도 이 장미꽃은 잘 크고 있어서 다행이야.”

“그 장미는 내가 부인에게 선물한 꽃이기도 하잖아? 사람을 시켜서 관리하게 만들었지.”

“날 위해 준 꽃이 아니고 나를 길들이려고 준 꽃이잖아.”

“하지만 결국 내가 길들여졌지.”

음. 그건 그렇지.

그동안 식탁에서 로엔은 듀리온처럼 털털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탁에 앉아 허겁지겁 식사를 하기로는 듀리온 뿐이었는데 로엔이 장단을 맞춰 같이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신전 밥만 먹다가 요즘 왕궁 밥에 공작저 밥까지 먹으니 입맛이 좋아져서 큰일이에요.”

원래도 식사는 잘했던 로엔이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두 사람이 식사를 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오직 제르미만이 평온했다.

제르미도 저렇게 평온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워낙 별난 듀리온과 로엔 탓에 상대적으로 침착해 보였다.


“비카가 없어도 듀리온이 심심할 일은 없겠다.”

“그러게. 두 분을 모셔온 건 정말 잘한 일 같아. 비카 님의 빈자리를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인걸.”

“부인도 비카가 많이 그리울 거 같아?”

“말이라고 해? 지금도 벌써부터 보고 싶은걸.”

“아이를 낳아 그럼 비카가 덜 그리울걸.”

시카르가 아이 얘기를 하자, 매일 밤마다 합궁을 하자던 말도 떠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누, 누가 안 낳겠대?!”

내가 흘겨보며 가자 시카르가 뒤를 졸졸 쫓아왔다.


“그럼 오늘부터 당장 아이 낳을 준비부터 하는 거지? 그렇지?”

“미쳤나 봐. 정말. 그만해!”

“부인, 어디가. 같이 가!”

어디 가긴. 너 피해 도망간다.

나는 실실 웃으며 나를 따라오는 시카르를 피해 로엔의 방으로 갔다.


“신관님께서 필요할 만한 것들을 챙겨 보았는데 마님이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옷장은 로엔이 입을 로브들과 잠옷으로 빼곡했다.


“로엔 님은 로브 말고 드레스도 좋아하니 다음엔 드레스도 좀 챙겨 넣어주지.”

“네. 마님.”

“커튼과 침대 시트가 부드럽고 좋구나.”

“모두 최상급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준비한다고 수고했어. 안드레아. 물론 내가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두 분이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조금 더 신경 써주시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님.”

안드레아와의 대화가 끝나기를 무섭게 로엔이 발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와! 여기가 정말 제 방이라고요?”

기뻐하는 로엔을 보니 나 또한 기분이 좋아서 미소가 절로 나왔다.


“네. 로엔 님.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게 될 거예요. 담당 하녀를 보내드릴 테니 이곳에서 편하게 묵도록 하세요.”

“작은 기숙사에서 지내다 이렇게 큰방을 보니 믿기지가 않아요. 정말 고마워요. 공작부인.”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마음에 들다마다요. 저 앞으로 평생 여기서 살래요!”

로엔이 평생 여기서 살아준다면 나야말로 정말 고맙고 영광스러울 일이었다.


“그래 주시면 저야 덧없는 영광이죠. 로엔 님.”

“어머. 저 진심인데.”

“저도 진심이에요.”

“어. 근데 제르미 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 제르미 님은 공작님과 함께 수련의 방으로 가셨어요.”

아. 하긴 제르미는 마법사다 보니 묵을 방보다는 수련의 방이 더 편하겠지.

조금 전만 해도 활짝 웃던 로엔의 표정이 금세 침울해졌다.


“그러고 보니 저도 곧 떠나야 하는군요.”

“네?”

“신성초를 찾기로 했으니까요.”

아. 신성초…….


“공주님께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아마 들어 주실 거예요. 공주님께서는 은근히 잘 들어주시잖아요.”

“하긴. 무뚝뚝하시지만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긴 해요. 그쵸?”

금세 밝아진 로엔을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근데 공작부인께서는 장미꽃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네?”

“궁에 계실 때도 장미꽃을 심어두셨잖아요. 여기도 정원이 온통 장미꽃밭이길래요.”

“아. 그건 제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때 시카르가 제르미와 함께 들어서며 말했다.


“내 부인이 가시 돋친 장미를 닮아서 내가 심은 거지.”

로엔은 매우 로맨틱한 얘기라도 들은 듯 입을 쩍 벌렸다.


“낭만적이에요.”

낭만은 무슨. 나를 길들이려고 심은 게 바로 장미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로엔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 대충 웃어주었다.

시카르가 저렇게 말한 것도 로엔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인 것 같았으니까.

얘기를 끝내고 보니 시카르의 뒤에서 눈이 휑해져 있는 제르미가 보였다.


“제르미 님, 표정이 왜 그래요. 지쳐 보여요.”

“지칠 만하지. 마법사 주제에 듀리온 같은 근육을 갖겠다고 운동을 하다가…….”

시카르가 말을 하던 중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더는 말을 못하고 있었다.


“이이…… 므이…….”

제르미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하하. 공작님도 간혹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아, 제르미가 말을 못하게 마법으로 잠시 막은 모양이구나.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어쨌든 시카르가 하려던 말은 로엔이 기사가 멋지다고 한 말을 듣고 운동을 했다는 말인 것 같은데.

제르미가 은근히 로엔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제르미에게 맡겨만 달라는 듯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였다.

그 사이에 마법이 풀린 시카르가 제르미에게 뭐라고 하려고 입을 또 벙긋거리려 해서 나는 손으로 시카르의 입을 막았다.


“저와 잠시 나가시죠. 공작님.”

“읍읍!”

“그럼, 제르미 님 로엔 님. 편히 쉬세요.”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후 복도로 나오자마자 시카르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치웠다. 그러자 시카르는 예상대로 화가난 듯 돌아서 제르미를 향해 돌진하려고 했다.


“제르미 이놈을…….”

그래서 나는 그를 말려야 했다.


“제르미 님께 화낼 일이 아니야. 그땐 모른 척해줬어야지.”

“그놈의 사랑이 뭔지. 사람을 아주 망쳐 놓는군. 마법사가 근육질이라니. 마법사는 몸이 가벼워야 마력을 다루기 수월한데 말이야.”

“혹시 알아? 최초의 근육질 마법사가 될지.”

“실력은 형편없이 근육만 남은 마법사가 되겠지.”

시카르는 제르미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나는 그가 왠지 멋져 보였다.

제르미라면 레카도르에서 가장 몸이 튼튼한 실력 좋은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

첫날밤 아닌, 첫날밤 같은 밤이었다. 공작저로 돌아와서의 첫날밤이니 첫날밤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시카르를 기다리고 있자니,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지엄한 공작저에서 누가 창문을 두드리는 것일까.’

하지만 창가로 나가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열자 커튼이 펄럭이며 내 몸을 빙글빙글 감싸고 돌았다. 그러곤 나는 아래로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누군가의 손에 떨어져 고개를 들어보니 시카르가 나를 끌어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카르?”

그러고 보니, 이 모습은 내가 공작저에 온 첫날. 공작저를 탈출하기 위해 커튼을 타고 내려오다 그에게 걸렸던 형국과 비슷했다.

시카르는 커튼으로 몸을 돌돌 감싸고 있는 나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껴안고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나를 벗어나려다 내 손에 붙잡힌 일 기억나?”

“기억나…….”

“앞으로도 내게서 도망치려 든다거나 내게서 사라질 것 같으면 지금처럼 너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거야. 설사 네가 나와 싸우고 집을 나가도 다시 이렇게 붙잡아 올 거라고.”

웃음기 하나 없이 말하는 그의 눈빛에서 진심 어린 간절함이 보였다.

반짝이는 그의 눈빛 때문인지 오늘 하루가 너무나 고단했음에도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뛰었다.

시카르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제 날 다시 많이 좋아 해줘도 괜찮아.”

“언제는 내가 사라질까 봐 걱정되니까 좋아하지 말라며.”

“서연이 돌아온 덕분에 사라지는 조건을 알게 됐으니, 이제 나를 마음껏 좋아해도 된다는 말이지.”

시카르는 커튼 속에 가려져 있는 내 잠옷의 어깨끈을 살짝 내렸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도 어서 아이를 가질까.”

나는 급하게 흘러내린 어깨끈을 손으로 붙들었다.


“여, 여기 밖이잖아…….”

“물론 안으로 들어가서.”

시카르는 나를 커튼으로 꽁꽁 감싸 안으며 보쌈하듯 저택으로 들어갔다.

목격자가 없길 바랐지만, 저 멀리서 우리를 보고 있는 로엔과 제르미가 보였다.

로엔은 나를 보자마자 제르미의 품으로 폴짝 다리를 들어 올렸다.

졸지에 로엔을 안아 든 제르미의 허리가 반으로 굽어졌다.

그 뒤로는 저택 안으로 들어서느라 두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보지 못했다.

시카르는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오늘 아주 멋진 밤이 될 거야. 그리고 내일도. 또,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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