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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외전6 (186/197)


186화. 외전6
2023.03.13.



“이것 봐. 너를 닮아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아이야.”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아이의 눈동자는 짙푸른 바다를 품은 듯 선명하고 푸르렀다.

발리제는 자신의 아이를 무감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베로니아가 걱정스러웠다.

아이에게 젖을 물려주고 있긴 하지만 베로니아는 지금껏 아이를 품에 안고도 한 번도 웃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쫓기고 있는 탓에 아이의 안위가 걱정돼서 그런 거겠지.

발리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지어준 이름도 없었다.


“생각해둔 이름은 있어?”

“글쎄.”

그동안 몸을 숨기느라 한가하게 아이의 이름을 짓고 있을 시간이 없었긴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발리제는 뭔가가 떠오른 듯 손을 마주쳤다.


“그래. 키안. 이름을 키안으로 짓자. 어때?”

“키안? 키안은 숲지기의 이름이잖아?”

“미숙아로 태어난 숲지기 키안은 몸이 약해서 얼마 못산다고 했잖아? 그래서 숲에 버렸는데 숲지기가 된 키안은 오래오래 잘 살았잖아. 이 아이가 어떻게든 오래오래 잘 살라는 의미로 키안 어때?”

“듣고 보니 이 아이의 신세가 숲지기 키안의 신세와 다르지 않으니 나쁘지 않네. 이 아이도 숲지기 키안처럼 아마 평생을 숲에서 숨어 살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폐왕에 이어 길리언의 추적까지 받으며 아들을 숲지기로 살게 해야 한다는 사실에 베로니아는 침울해졌다.

하지만 무기력감을 느끼자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발리제. 우리 이 아이를 약하게 키우지 말도록 해. 언젠간 이 아이가 자라서 왕좌를 빼앗아 길리언을 처단할 수 있게, 그렇게 키우자.”

그동안 넋이 나간 듯 기운 없어 보이기만 하던 베로니아의 눈빛에 약간의 독기가 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발리제는 베로니아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아 안도했다.


“아들은 엄마 닮으면 잘 산다잖아. 키안이 당신을 빼닮았으니 우리 아들은 잘살 거야.”

그때, 시끄럽게 트랩이 울리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앙!”

베로니아는 다급하게 발리제에게 키안을 넘겨주었다.


“국왕의 근위대야! 어서 이 아이를 데리고 피해!”

“같이 가야지!”

“길리언의 목적은 이 아이야! 내가 시간을 끌 동안 어서 아기를 숨겨!”

발리제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는 이런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고 평화롭기만 하다는 듯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이 어린 아기에게서 엄마를 떼어놓으려니 발리제의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발리제가 망설이며 서 있는 동안 왕의 근위대는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베로니아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뭐해! 어서 가란 말이야! 이 아이를 죽일 셈이야?!”

발리제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간절한 눈으로 베로니아를 바라보았다.


“베로니아. 몸조심해. 꼭!”

“아이를 찾기 전까진 날 죽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키안을 잘 부탁해.”

“베로니아. 우리 아이는 내가 잘 키우고 있을 테니까.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알았지?”

발리제는 차마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베로니아의 눈에서 멀어져 갔다.

그렇게 멀어지던 발리제는 품에 안은 아이와 함께 왕의 근위대의 화살에 맞아 시뻘건 선혈을 흘리며 쓰러졌다.


“발리제!”

지독한 악몽.

또, 그 지독한 악몽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베로니아는 숨을 헐떡이며 곁을 살폈다.

곁에 잠들어 있어야 할 발리제가 보이지 않았다.


“발리제?!”

설마, 발리제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 꿈이었을까?

꿈이 너무 생생해서 어떤 것이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 전 꾸었던 꿈이 그저 꿈이길 바라며, 살아 돌아온 발리제를 본 것이 헛것을 본 것이 아니길 기도하며 그를 찾아 뛰쳐나갔다.

궁정의 메인 홀로 내려가자 다행스럽게도 그토록 사랑하는 발리제의 뒷모습이 보였다.


“발리제?”

발리제는 여상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베로니아?”

살아 있는 발리제였다. 조금 전 일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발리제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베로니아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발리제!”

그녀는 당장에 발리제의 품에 안겼다. 베로니아를 다시 만난 발리제는 그녀가 종종 두 사람이 헤어졌던 때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리제는 아이를 토닥여주듯 베로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베로니아. 나 여기 있어. 나 살아 있어. 안 죽었어. 아니, 죽었지만 살아 있어.”

그 강인하던 베로니아 조차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했다.

발리제의 죽음을 목격했던 까닭에 설산에 홀로 지내는 동안 상실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나 없어도 잘 살 거라고 큰소리치더니. 나 없으면 안 되겠는데?”

베로니아는 그제야 정신이 들며 민망해졌다. 그녀는 발리제의 품에서 벗어나며 시치미를 떼듯 헛기침했다.


“자다 깼는데 배가 너무 고프길래.”

태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조금 전 베로니아의 표정은 누가 보아도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혹시나 내가 곁에 없나 불안했던 게 아니라?”

“아니야. 그냥 네가 뭐하나 싶어서 내려온 거야.”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확인하러 온 거 아니고?”

발리제는 베로니아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듯 입술을 실룩이며 다가왔다.

베로니아는 이상하리만큼 발리제 앞에서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헛기침만 하며 딴청을 피웠다.


“아. 배고프네. 발리제, 식사는 준비했어?”

“여긴 궁이라 내가 준비 안 하는데, 베로니아.”

아무것도 없는 숲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계속 숲에서 살다 보니 늘 식사는 발리제의 몫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산에 있는 동안 늘 발리제가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베로니아는 버릇처럼 그 말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렇지. 이젠 우리 궁에 왔지.”

그 생각이 들자 키안이 보고 싶었다. 베로니아는 처음 키안을 품었던 기억을 지운 적이 없었다.

몇 번 젖을 물려보지도 못하고 이별을 해야 했으니까.

발리제는 그런 베로니아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했다.


“베로니아. 키안이 요즘 휘낭시에를 잘 먹던데, 식사 후에 같이 디저트 먹자고 하는 게 어때?”

키안은 유라가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베로니아와 발리제가 궁에 들어온 이후에도 이들과 아침 식사는 늘 같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로니아는 여태 한 번도 키안과 디저트까지 먹은 적이 없었다.


“국정에 신경 쓰기도 바쁜데, 한가하게 디저트는 무슨.”

“왕도 쉬어야지. 둘이 디저트 먹으며 담화를 나눈 적도 없잖아.”

“할 말이 있어야 하지.”

“왜 없어. 태몽 얘기도 있고 우리 처음 만난 일도 얘기해주면 되잖아.”

그런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키안에게 들려준다는 게 베로니아는 어색하게 느껴졌다.


“태몽?”

“그래 태몽.”

“그런 얘기들은 네가 이미 다 한 게 아니었어?”

“난 그때 언젠가는 우리 가족이 모두 모일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미리 다 말해버리면 키안이 네게서 들을 얘기가 없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나중에 널 만나면 얘기해준다고 했지.”

발리제가 그런 마음으로 저를 기다렸다는 생각에 베로니아는 찡해졌다.

하지만 베로니아는 마음과는 다르게 또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생각은 해보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생각 말고 실천을 해보는 건 어떨까, 공주 마마.”

행여나 베로니아가 불편해할까 봐 일부러 농담하듯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이내 베로니아가 눈을 흘겨보자 금세 눈치를 보듯 시선을 피했다.


 

***

발리제는 키안이 도착할 시간쯤마다 미리 마중을 나가서 ‘내 새끼, 내 새끼’ 노래를 부르다 막상 키안을 보면 어색한 말투로 ‘오셨습니까. 즈은하.’라고 장난치곤 했다.

키안의 주위에 누가 있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장난이었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왕궁 안이라 아침에는 키안이 혼자 데이지궁을 찾았기에 그런 장난이 가능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키안을 보자마자 발리제는 함박웃음으로 달려가서는 허리를 굽신 숙이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즈은하.”

키안도 재미있는지 발리제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간밤 잘 주무셨습니까. 아바마마.”

“오냐. 잘 잤느니라.”

발리제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고 키안도 키득키득거렸다.

그러다 발리제는 이내 곧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우리 둘이 있을 때야 격식을 뺀다고 해도 네 어머니 앞에서는 말조심하도록 해. 알았지?”

“나도 알고 있어. 어마마마는 오늘 좀 어떠셔?”

“오늘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걱정하지마.”

“정말?”

“그렇다니까.”

늘 표정이 어둡고 무거웠던 베로니아였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안은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며 저택으로 향했다.

***



“잘 주무셨습니까, 어마마마.”

분명히 오늘은 어마마마의 기분이 좋다고 들었는데.

베로니아의 표정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그냥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건조했다. 그래서 키안은 발리제가 또 그냥 한 소리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키안은 괜시리 발리제에게 ‘오늘 어마마마 기분이 좋다더니 아니잖아?’라고 툴툴거렸고 발리제는 제 말이 맞다는 듯 턱을 들어 올렸다.


‘아빠 말 못 믿어?’

‘응. 아빠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조용히 속삭이던 두 사람은 베로니아가 고개를 들자,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발리제는 이때다 싶어서 베로니아를 채근했다.


“저하께서 오늘 국왕께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베로니아가 그 얘길 왜 하냐는 듯 눈을 흘겼지만 발리제는 어서 말하라는 듯 꿋꿋하게 턱을 쳐들었다.

베로니아는 머쓱한 듯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난 후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키안과 눈을 맞추었다.

키안은 잔뜩 궁금하다는 얼굴로 베로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흠…… 식사가 끝나는 대로 디저트를 같이할까 합니다만. 시간 괜찮겠습니까. 국왕.”

키안은 망설임 없이 곧장 대답했다.


“네! 어마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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