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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외전8 (188/197)


188화. 외전8
2023.03.20.


분명히 거슬리는 놈이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 탓인지 이상하리만큼. 베로니아의 뇌리 속에서 발리제의 얼굴이 떠나질 않았다.

이를 앙다물고 저를 노려보고 있던 그 눈빛에 남아 있던 독기가 계속 아른거렸다.

며칠 후. 차기 근위대장을 선출하기 위한 시합이 열렸다.

베로니아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숨어 들어가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발리제가 근위대장이 된다면 온갖 고생을 다 시킬 계획으로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라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그리고 발리제의 시합이 시작되는 그 순간, 누군가 마물을 풀었다.

스크롤 속에서 와이번이 소환되었다.

와이번은 발리제를 보자마자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와이번은 이곳의 신출내기 기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도 발리제를 도와주지 않았다. 제 목숨을 걸고 경쟁하는 상대를 구하려 드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와이번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발리제의 뱃가죽을 할퀴었다. 발리제의 복부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쏟아졌다.

다시 한번 와이번의 발톱이 지나가려는 그 순간, 근위대가 몰려와 날카로운 창칼을 와이번을 향해 들이댔다.

와이번이 다시 스크롤로 사라지기 전까지 시합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베로니아는 그 사이에 발리제를 치료하고 있었다.


“커… 커헉……. 공주 저하…….”

“말하면 심박수가 더 뛰어서 출혈이 더 심해지니까 조용해. 입 다물고 있어.”

발리제는 더 말을 하고 싶어도 어차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장 기절하고 말았다.

베로니아는 묵묵히 발리제를 치료하다 겨우 출혈을 막고 벌어진 피부도 재생시켰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더 안정을 취해야 했다.

깨어난 발리제는 자신을 치료한 사람이 다름 아닌 공주 배로니아라는 것을 떠올렸다.

완전히 회복한 발리제가 의무실을 나올 때까지도 베로니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발리제는 차기 근위대장 지원을 포기하고 궁을 빠져나왔다.

그동안 베로니아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범인을 추적해 잡았다.

그리고 다시 발리제를 찾아갔다.

발리제는 한적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발리제가 평민처럼 소탈해지기 시작한 건 이쯤부터였다.

어깨에 수건을 두른 채 밀짚모자를 쓰고 땅을 갈고 있는 발리제의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발리제는 베로니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묵묵히 밭만 갈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모든 야욕을 버리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네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범인을 잡았다. 너와 경쟁하던 놈이었더군.”

“그놈임은 짐작은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괜한 일에 시간을 쏟으셨습니다. 저하.”

“행색을 보니 아주 촌놈이 다 되었구나. 돌아오진 않을 생각이냐?”

“한낱 필부로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언제든 돌아올 마음이 생기거든 고민 없이 궁으로 와라.”

“죄송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발리제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발리제는 돌아오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베로니아는 틈만 나면 발리제를 찾았다.


“또 무슨 일이십니까.”

“홀아비처럼 사는 게 구질구질해 보여서 왔다.”

“곧 약혼을 하신다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진심이냐.”

“네. 저하.”

“솔직히 말하라.”

“소신은 그저 저하께서 평안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 길로 떠나간 베로니아는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발리제가 다시는 베로니아를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때, 다시 베로니아가 찾아왔다.


“오랜만이구나.”

“또 어쩐 일이십니까. 저하. 이젠 소신을 그만 찾으시옵…….”

“난 폐위됐다.”

“네?”

“폐위당해서 궁에서 쫓겨났다는 말이 알아듣기 힘든 것이냐?”

발리제는 듣고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베로니아는 더 말하기 귀찮다는 얼굴로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그게 무슨…….”

“전하께서 정령사는 부마로 삼을 수 없다고 하시더군. 그래서 폐위됐다.”

발리제는 기가 막히다 못해 얼떨떨해서 멍한 눈으로 베로니아를 보며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이제 공주도 아니고 뭣도 아냐. 그러니 앞으로 네가 날 먹여 살리도록 해라.”

“네? 제, 제가 왜 저하를…….”

“그럼 넌 은혜를 입고도 입을 싹 닦겠다는 거냐? 내가 네 목숨도 구하고 널 해치려 한 놈도 붙잡았는데?”

“무, 물론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잘 지내보도록 하지.”

멍하니 베로니아의 말을 듣고 있던 발리제는 번뜩 드는 생각에 손에 든 농기구를 내려놓았다.


“잠깐. 폐위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러니 앞으로 네가 날 책임…….”

발리제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더는 공주가 아니지 않나? 베로니아?”

 

 

***

키안은 이야기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바마마는 예전에 정말 멋졌구나. 남자다워!”

베로니아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발리제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기분 좋은 듯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땐 네 어머니를 돌려보내려고 쓴 술책이었지. 태어나 그런 하대를 겪어 본 적이 없으니 못 견뎌 할 거 같았거든.”

“그랬구나. 아바마마 머리 좋다. 그런데 나를 낳은 걸 보면 뜻대로 안 된 모양입니다. 아바마마?”

“그러니까 보통이 아닌 공주님이었던 거지.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라니까.”

키안은 다시 방긋 웃으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



“그래. 난 이제 더는 공주가 아니다. 오갈 데라곤 없는 가난한 필부지. 그러니 네가 날 좀 거두어야겠다.”

“내가 왜 널 거둬야 하지?”

“널 좋아하는 가련한 여인이니까?”

베로니아는 마치 ‘죽을래?’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릴 것처럼 전혀 가련해 보이지 않는 당돌한 얼굴로 물었지만, 발리제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네가 주는 밥과 잠자리. 간단히 말해서 숙식 제공.”

발리제가 당황해서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 동안 베로니아는 기지개를 켜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배고파. 밥 가져와.”

발리제는 이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에서는 그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되레 당황한 얼굴로 베로니아의 뒤를 쫓으며 물었다.


“호, 혹시 닭고기 수프 좋아해?”

 

***

키안은 놀랍다는 듯 발리제를 쳐다보았다.


“그때부터 닭고기 수프를 잘 만들었구나.”

“맞아.”

옛날 이야기에 빠져든 덕분인지 어느새 발리제와 키안은 옛날 설산에 있을 때처럼 격 없이 대화하고 있었다.


“근데, 왜 정령사는 안 된다는 거야?”

“정령사는 시타르 족에게 정신을 지배받으니까 열성종족이라고 생각한 거지.”

키안은 곰곰이 생각하다 공감하지 못한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공작 아버지는 내가 정신을 지배받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왕족의 혈통을 가진 자는 정신을 지배받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거지. 하지만, 폐왕은 왕족이 정령사와 결혼을 한다면 그 혈통이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네 어머니와 난 숨어다니며 살 수밖에 없었단다.”

“그랬구나…….”

발리제는 대견한 얼굴로 키안을 보며 어린 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우리 국왕은 더 강해지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대답은 발리제가 아닌 베로니아가 대신했다.


“루시가 민첩하더군. 몸이 아주 재빨라. 레카도르 혈통은 뛰어난 신성력을 갖고 있지만 민첩하진 않았지. 하지만 루시로 인해 후대의 왕은 민첩성까지 갖추게 될 것 같구나.”

낯부끄러운 듯 키안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모습이 발리제가 보기엔 한없이 귀여워 보였다. 발리제가 킥킥거리는 것을 본 키안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참, 신성초는 언제 구하러 가기로 하신 건가요.”

“그건 왜 묻는 겁니까.”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요.”

“그건 국왕께서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니 국무에나 전념하시오.”

“하지만 왕실에서 병사를 지원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속도만 늦어질 것이오. 그러니 국왕은 다른 데나 신경 쓰시오.”

“다른 데라 하시면…….”

“조만간 블레이크 공작 부부께서 대신전을 방문하러 갈 것이요.”

“네? 대신전을요?”

“블레이크 공작의 조모께서 대신전에 계시지 않습니까. 국왕도 할머니를 뵈러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가볼 참이었어요.”

“루시 영애와 함께 가도록 하세요.”

“네. 어마마마.”

베로니아는 키안에게 적당한 크기의 선물상자도 건네주었다.


“이것도 들고 가세요. 공작의 조모께서 뜨개질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준비한 거니 꼭 챙겨가시오.”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언제나 섬세하게 챙겨주는 베로니아의 모습에 키안은 감동했다.


“할머니께서 좋아하시겠어요.”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이만 다 드셨다면 일어나도록 하세요. 나도 그만 올라가 봐야겠으니까.”

발리제는 베로니아가 가는 것을 보며 키안의 팔을 쓰다듬었다.


“네 어머니께서는 저렇게 세심하다니까. 겉으로 내색을 잘 못 하는 성격이라 그래. 결혼식 때 사랑한다고 한 말 들었지? 그게 진심이야. 네가 강건한 군주가 되길 원해서 그런 거니까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알았지?”

발리제가 다정하게 설명해주는 것을 보며 키안은 미소지었다.


“알고 있어.”

“내 새끼. 정말 장하게 잘 컸구나. 그래도 넌 루시 영애에게 표현을 많이 하는 부군이 돼야 해. 알았어? 다른 사람들에겐 강건한 모습만 보여도 부인한테는 그러면 안 돼.”

“알고 있어. 그리고 루시 영애도…….”

“루시 영애도?”

“내가 무뚝뚝하면 나랑 말도 안 하려고 할걸.”

“하긴. 루시 영애가 보통은 아닌 거 같더라. 밉보이면 네 미래가 어두워지겠던데?”

키안은 피식 웃었다. 정말 그러고도 남을 영애였다.


“그래서 난 아버지들처럼 애처가로 살 거야.”

“그래. 다른 영애와는 말도 섞지 마. 그래야 사랑받는 남편으로 살 수 있는 거니까.”

키안은 어쩌면 팔불출 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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