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외전9
(189/197)
189화. 외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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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외전9
2023.03.23.
“엄…… 아니. 유모……!”
루시는 부정 탄다며 그날 이후로 엄마라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트라우마를 안겼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루이드는 예외였다.
“아휴, 저 겁쟁이.”
하지만, 루이드가 엄마라는 소리를 낼라치면 루시의 손이 루이드의 등 짝을 갈겼다.
“엄…… 악!”
루이드는 닿지 않는 등짝을 쓰다듬기 힘들어 벽에 등을 비비며 코를 실룩거렸다.
“장차 왕후가 될 사람이 죄 없는 백성을 막 이렇게 때려도 되냐?!”
“엄마라 부르면 부정 탄다고 했지?!”
“그건 네가 불렀을 때고. 내가 부르면 안 그래.”
루시는 고집을 부리는 루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시는 벽에 등을 비벼대고 있는 루이드의 앞으로 다가가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었다.
“나한테 장차 왕후가 될 사람이라고 했지? 그럼 넌 장차 왕후가 될 누이의 말을 들어야지?”
루시가 벽에 두 손을 짚으며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루이드는 기가 팍 죽은 얼굴로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약속한 거다?”
“글쎄. 알았다고.”
“그리고, 유모 앞에선 싸우지 마. 우리가 툭하면 싸우니까 어른들이 항상 우리 걱정이잖아.”
루이드는 루시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려다 멈칫했다.
“때리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럼 나도 안 싸울 테니까.”
“놀리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럼 나도 안 때릴 테니까.”
“네가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까 그렇잖아.”
“너 내가 나중에 변방으로 쫓아내 버린다?”
루이드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지만, 루시가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입을 다물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알았어…….”
툴툴거리는 말투에는 불만이 잔뜩 섞여 있었다.
***
잠에서 벌떡 깨어난 서연은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이곳에 오다니.
이곳에 온 뒤로 습관처럼 새벽이면 깨어나서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다시금 상기했다.
서연이 없는 동안 그녀를 수소문 하느라 자주 후작가를 비워야 했던 레이독스는 요즘 밀린 업무들을 보느라 새벽 일찍 깨어나는 일이 잦았다.
오늘도 일찍 일어난 레이독스는 저보다 먼저 깨어나 있는 서연을 보자 안쓰러워하며 다가섰다.
“좀 더 잠을 청하지 않고요…….”
서연은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레이독스의 품에 덥석 안겨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이곳이 어딘지 자꾸만 확인하게 돼요.”
“이미 이유를 알고 있으니 또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서연은 가련한 얼굴로 레이독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따뜻하고 자상하기만 했다.
그래…… 다신 그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야…….
“하녀를 시켜서 차를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차를 마시면 잠이 좀 올 겁니다. 제가 다시 올 때까지 좀 더 잠을 청하도록 하십시오.”
레이독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서연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후작님. 생각해보니까 제가 하지 못한 말이 있었어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십시오. 모두 들어드리겠습니다.”
레이독스는 진심으로 뭐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서연이 갑자기 떠나자 자신에게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서연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서연 님. 무슨 말입니까.”
“……미안했다는 말이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놓고 미안하단 말을 못 한 거 같아서요……. 이제라도 말해주고 싶어요. 미안했어요. 후작님.”
제 자식들을 선뜻 품어주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려준 것만도 이미 레이독스는 서연에게 큰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서연이 갑자기 떠났다고 해서 그녀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레이독스는 결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서연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런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다시 와주셨으니 된 겁니다. 만약 서연 님이 돌아오지 못했더라고 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좋은 사람…….’
서연은 레이독스를 품에 안겨 다시는 그를 떠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아니, 이젠 떠날 일이 없을 것이다.
레이독스가 침실을 비운 후 하녀가 건네준 차를 마시고 나자 조금 졸음이 밀려왔다. 다시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으니 금세 잠에 들 것처럼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다시 잠에든 서연은 점심이 다 되도록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난 지도 모르게 잠에 빠져 있던 서연은 하녀의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공작부인께서 오셨어요.”
서연은 이곳에 와서 비카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꽤나 고생을 많이 해야 했다.
일단 이곳의 교통수단은 돈이 없다면 결코 이용할 수가 없었기에 두 다리 말고는 움직일 수단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갖은 고생이란 고생뿐 아니라 배고픔과도 싸워야 했다.
유라가 결혼식을 올린 지 며칠 되지 않았기에 서연까지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연을 찾은 것은 시카르의 기억을 통해서 그간 서연의 고초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연도 그 사실을 눈치챘기에 공작부인이 자신을 찾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걱정돼서 오셨구나…….’
서연은 급히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내려갔다.
***
응접실에는 자신과 같은 검은 눈동자를 한 유라가 앉아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유라는 노심초사한 얼굴로 서연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연 님, 고생이 많으셨죠…….”
서연은 제게 손을 내밀어준 유라의 손을 맞잡았다.
“낯선 곳에 가면 누구나 다 고생이죠. 이젠 괜찮아요.”
“밤새 잘 주무시지 못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네. 그런 건 아니지만, 다시 이곳에 온 게 믿기지도 않고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자다가 종종 잠에서 깨거든요.”
유라는 안쓰러운 얼굴로 잡은 서연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서연 님은 이제 완전히 이곳에 계세요. 이곳이 서연 님이 있을 곳이고, 그 어디서도 서연 님을 데려가지 못할 거예요.”
“제가 사라지고 나서 공작부인께서도 굉장히 놀라셨죠. 그러셨을 거 같아요.”
“네. 서연 님이 사라져서 놀란 것도 있고 저도 사라질까 봐 두렵기도 했죠.”
서연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웃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에 활짝 웃었다.
“공작님이 더 놀라셨을 거 같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침착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물론 후작님께서도 침착하지 못하셨어요. 그 침착하시던 분이 얼마나 놀라시던지…….”
서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자 유라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주책을 부렸군요. 안 그래도 서연 님께서 후작님을 보는 마음이 무거우실 텐데…….”
“네. 미안했어요. 그런데 후작님은 괜찮다고 하시니까 더 미안한 거 있죠.”
“그 마음 이해해요.”
“그래도 이곳엔 제 마음을 이해해주는 공작부인이 계셔서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몰라요.”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이렇게 달려왔죠. 서연 님이 잠을 못 주무셨다고 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혈색은 좋아 보여서 너무 다행이에요. 그런데, 후작님은 어디 가셨어요?”
“요즘 일 때문에 바쁘셔서 자주 후작저를 비우세요.”
유라는 곰곰이 생각해보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작님께서 서연 님을 찾느라 저택을 자주 비우셨거든요. 그래서 업무가 많이 밀렸나 봐요.”
서연은 유라가 자신을 위로하느라 해주는 말인 것을 알았기에 그 마음이 고마웠다.
“네. 맞아요. 그래서 바쁘시죠.”
세련된 찻잔에 담겨나온 히비스커스로 목을 축인 유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서연 님이 계셨다면 같이 결혼식을 올렸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아니에요. 두 분의 합동결혼식은 제가 낄 게 아니었어요.”
“못하고 간 결혼식을 올려야죠. 결혼식은 언제 할 생각이에요?”
“결혼식은 안 할 예정이에요.”
“네? …… 왜요?”
“제가 다시 안 가려면 결혼식을 하지 않아야 해서요.”
“아…….”
“공작부인의 합동결혼식을 보며 부럽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저도 결혼식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죠. 결혼식을 하지 않기로요.”
어쩌면 간단히 해결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생 한 번 있는 결혼식을 못 하게 된 서연이 속상하진 않을지 염려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식인데…… 다른 걸 원하지 그러셨어요.”
“공작부인께서 리마인드 웨딩까지 하셨잖아요. 그럼 됐어요. 제 몫까지 한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래도 웨딩드레스라도 한번 입고 그림이라도 남겨두는 건 어때요?”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데요?”
유라의 눈에는 그새 서연이 완전히 성숙해진 것만 같았다.
이전에 풋풋했던 서연이 그녀가 어른이 돼서 돌아온 느낌이었다.
유라는 괜시리 제 자신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흔쾌히 응하는 서연이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저희 가족 초상화를 그려준 분이 계신데 정말 빨리 잘 그려요. 공작님께 말해서 그분을 섭외해드릴게요.”
“언제나 공작부인께서는 과분할 만큼 섬세하게 절 챙겨주시는군요.”
“이곳엔 사진도 없으니까 초상화라도 남겨야지. 아니면 너무 아쉬운 거 있죠. 그래도 서연 님, 비록 결혼식은 못 한다고 해도 서연 님이 후작 부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요.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구요.”
후작 부인이라는 말이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싫지 않은 말이었다.
“후작 부인이라고 하시니 아직은 낯선데요?”
“이제 곧 혼인신고만 끝내면 정식으로 후작 부인이 되시는걸요.”
“그러게요. 결국, 다 잘 됐어요.”
서연은 많은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혹은 모든 것을 해탈한 사람처럼 보였다.
유라는 그 모습을 보며 서연이 꽤 많이 성숙해졌다고 느꼈다.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근데, 보기 좋아요.”
서연은 깊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유라는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저도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로 미련이 남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이곳을 떠나고 보니, 그제야 보였어요. 누구나 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요. 내가 정말 원하는 거 한두 개는 갖지 못해도 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걸요.”
유라는 서연의 말을 감탄하듯 새겨들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얼마든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네.”
서연이 정말 많이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