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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외전10 (190/197)


190화. 외전10
2023.03.27.


듣고 보니 서연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레이독스와 쌍둥이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완벽할 것이다. 나는 이제야 서연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후작님 같은 분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완벽하니까요?”

서연은 내 말에 수긍하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제가 갑자기 현대로 갔다가 다시 이곳에 와서 막막한 시간을 보내봤잖아요. 진짜 중요한 것들은 사실 정말 평범한 것들인 거예요. 평소에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더 소중하게 된 거겠지.


“이제 일상에 더 충실해지시겠군요.”

“네. 루시의 왕후 수업에도 따라 다녀야 하고 행여나 구설에 오르면 안 되니까 곁에서 잘 지켜줘야겠죠.”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버렛 영애의 동생인 아멜리가 죽은 언니의 한을 갚기 위해 키안에게 접근했던 기억이 났다.

서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나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보며 동시에 고함을 쳤다.


“아멜리!”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땐 버렛 영애가 다이엔느에게 죽음을 당해서 그랬지만, 지금은 버렛 영애가 살아 있으니 괜찮겠죠?”

서연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고민하는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버렛 영애에 대한 아멜리 영애의 충성도가 남다르니 아마 괜찮을 듯하지만, 혹시 모르니 감시를 붙여볼까요?”

“왕의 약혼자가 있는 후작가에서 다른 영애를 감시하면 큰 구설이 일어날 것입니다. 차라리, 아멜리를 곁에 두는 게 어떨까요?”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곧 어린 영애들을 초대해서 티파티라도 열어야겠군요.”

“좋은 생각이에요.”

서연은 감탄했다는 듯 내게 팔짱을 끼며 머리를 기대왔다.


“공작부인이 안 계셨다면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티파티를 여실 생각이죠?”

“네.”

“제가 와서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바쁘신데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하긴 저까지 있으면 어린 영애들에게는 크게 부담될 거예요.”

서연은 기분 좋게 웃으며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 며칠 뒤에 블레이크 대모님을 뵈러 대신전에 가신다고요?”

“네. 겸사겸사 할머니를 뵈러 가려고요.”

“우리 루시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제가 아주 잘 모시고 갈게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연이 점점 예전처럼 생기를 찾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좀 더 웃으며 대화를 나누다 이제 집으로 가기 위해 복도로 나오는데 복도 끝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목소리는 제르미였다.


“레이독스! 그러지 말고 나 몸 만드는 법 좀 알려줘. 어? 로엔 님이 하루 종일 듀리온의 몸만 보고 있다고!”

요즘 로엔이 듀리온의 근육에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제르미가 알고 있었구나!

서연이 저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그렇게 됐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요.”

서연도 재미있었는지 나와 같이 입을 막고 킥킥거렸다.

우리는 좀 더 걸어 나가 제르미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제르미 님.”

“여기서 뵙네요. 제르미 님.”

제르미는 서연에게 간단하게 인사한 후 나를 보고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공작부인……! 여긴 왜…….”

“왜긴요. 서연 님을 만나 뵈러 왔죠.”

제르미는 진땀이라도 흘리려는 듯 내 눈치를 살폈다.


“호, 혹시 방금 제가 한 말을 드, 들으셨습니까?”

“네. 아주 정확하게 들었어요. 제르미 님.”

그의 표정은 매우 곤란해 보였다. 아마도 로엔에게는 비밀일 테니 곤란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제르미는 매우 곤란하다는 얼굴로 이마를 긁적거렸다.


“죄송하지만 공작 부인…….”

“로엔 님께는 비밀로 해달라는 말씀이시죠?”

제르미는 내가 가려운 데라도 긁어준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매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공작부인. 제발 로엔 님께는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제…… 발…….”

“네. 오늘 들은 건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그럼 나중에 공작저에서 다시 봬요.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들어가세요. 공작부인!”

제르미의 목소리는 매우 가벼워져 있었다.

나는 쌍둥이들에게도 간단히 인사를 하고 레이독스와 서연과도 작별인사를 나눈 후 공작저에 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

유라를 보내고 돌아온 레이독스는 피곤한 듯 벽에 머리를 기댔다.


“제발! 제발 나 말 근육 만들게 도와 달라고, 레이독스!”

“내가 요즘 밀린 업무를 보느라 얼마나 바쁜지는 알고 있어?”

“물론 알지. 그리고 네가 소중한 친구인 나를 위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줄 것도 알고 있지.”

제르미는 토끼 같은 눈망울로 간절하게 바라보았지만, 레이독스는 은근히 요지부동이었다.


“마법사가 말 근육이라니. 제르미. 그렇게 몸이 무거워지면 마법을 쓰기 곤란하다고.”

제르미는 발끈하듯 침까지 튀겨가며 말했다.


“너! 너! 서연 님이 자꾸 다른 남자를 넋 놓고 쳐다보고 있어도 그런 말이 나올 거 같아?! 어?! 어?!”

레이독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로엔 님이 너 이렇게 수다스러운 거 알아?”

“아니, 몰라 그러니까 너도 말하지 마. 말하면 너 죽고 나 죽고야. 레이독스.”

“아직도 로엔 님 앞에서는 과묵한 척하느라 제법 힘들겠군. 불쌍한 친구.”

“내가 과묵한 척을 하는 게 아니고, 로엔 님 앞에서는…….”

“로엔 님에게 기가 죽어서 할 말을 잃는 건가?”

“그래. 그런 셈이지. 어쨌든 말 근육 만드는 법이나 좀 알려줘.”

“그래. 좋아. 알려줄게.”

절대 마법사는 근육을 만들면 안 된다고 하던 레이독스가 마치 이제는 항복이라도 한 듯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르미는 레이독스를 항복시켰다는 기쁨 반, 자신도 이제 말 근육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 반으로 들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런 기대는 와장창 무너졌다.

레이독스가 제르미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쌍둥이가 있는 곳이었다.

쌍둥이를 본 제르미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여긴 왜…… 온 거야?”

“쌍둥이들 딱 반나절만 봐. 바로 근육이 붙을 테니까. 얘들아. 오늘은 제르미 삼촌이 놀아 준다고 하니까. 제르미와 놀도록 해.”

예전에 제르미가 쌍둥이들과 놀아 줄 때마다 쌍둥이들은 제르미의 양쪽 팔에 매달리곤 했다.

그때 일이 떠오르자 제르미는 사람이냐는 듯 레이독스를 쳐다보았다.


“레이독스, 너 언제부터 이런 몰상식한 인간이 된 거냐?”

레이독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쌍둥이들 아빠가 된 이후부터?”

제르미는 이제 곧 쌍둥이들이 달려와 제 팔에 매달릴 것이란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루시는 별로 관심 없는 투로 말했다.


“우리가 지금 놀 때야? 공부할 때지. 우리 다시 공부하게 방에서 좀 나가줄래?”

레이독스는 황망한 눈으로 방문을 닫고는 고개를 푹 숙였고 제르미는 놀리듯 말했다.


“레이독스. 애들은 이미 다 큰 거 같은데?”

“아이들이 벌써 저렇게 커버리다니…….”

자신을 골려 주려다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는 레이독스를 보자 제르미의 마음도 왠지 짠해졌다.


“너무 실망하지마. 루시는 곧 왕후가 될 몸이고, 루이드는 왕후의 오라비가 될 몸이니 더욱 잘 된 거지.”

“너무 훌쩍 커버렸어. 참, 신성초를 구하러 간다지? 후작가에서 뭐 좀 도와줄까?”

“아니 됐어. 공주님께서 사람들 도움을 받지 말라고 하셨거든. 블레이크 공작을 면책해주는 대신이라 사람들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저하다우신 말씀이시네.”

“넌 그냥 서연 님과 잘 지내기나 해. 저번처럼 서연 님 찾느라 울고불고하지 말고.”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울고 불고 했다는 말이죠?”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서연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레이독스는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복수라도 하듯 제르미의 옆구리를 치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서연은 사실 이미 들었지만 모른 척 한 번 미소만 짓고 말았다.


“헤르시아 님께서 보내주신 브라우니예요. 좀 드셔보세요.”

상자 안에는 브라우니가 작은 상자 안에 빼곡히 담겨 있었다.

서연이 상자 하나를 열어서 브라우니를 건네주자, 레이독스가 나중에 두고 보자고 하는 바람에 제르미는 정신이 나간 듯 브라우니를 집어 들어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말했다.


“하하. 역시 후작 부인께서는 요리 솜씨가 좋으십니다.”

“제가 만든 게 아니라, 헤르시아 님께서 보내주신 거예요.”

“그러니까요. 헤르시아 님께서 솜씨가 좋으시군요.”

“신성초를 구하러 가는 지역이 험준한 일대라죠? 가서 구할 식량이 없을 땐 애너지 바로 이용하기에도 좋을 거예요. 무겁지 않고 부피도 덜 차지하거든요.”

“애너지 바요?”

“당 떨어질 때 먹으면 힘이 솟는 그런 음식이요.”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아직은 후작 부인 소리를 듣기엔 이른걸요…….”

“누가 뭐래도 후작 부인이십니다. 그리고 곧 왕후 전하의 어머니가 되실 분이시고요.”

서연은 찡한 눈으로 레이독스를 쳐다보았다. 레이독스는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기에 서연의 코끝이 더욱 찡해졌다.

서연의 눈빛이 금방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 레이독스는 제르미를 떠밀듯 밀며 나갔다.


“자자, 이제 가봐야지. 제르미.”

“어어. 그래야지.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후작부인!”

서연은 툭 떨어지는 눈물을 훔쳐내며 제르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제르미 님. 로엔 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네! 건강하세요!”

서연은 그 자리에 서서 제르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이곳에 다시 온 것이 기쁘고 고마웠다.

루시와 루이드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눈물을 훔치는 서연을 보고 있었다.


“우시네…… 가서 눈물 닦아 드릴까?”

루이드가 울적해 하자, 루시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우리 어른이 되기로 했잖아. 루이드. 어른은 이럴 때 모른 척해주는 거라고.”

루이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이 좋은 것만은 아니네.”

“어린이는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린 계속 공부해야 하는데?”

루이드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생각해보니 어른이 더 좋은 거 같아.”

루시는 피식 웃으며 루이드를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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