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외전11
(191/197)
191화. 외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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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화. 외전11
2023.03.30.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자리였기에 나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듀리온 님. 저 어때요? 단정해 보여요?”
“당연히 아름다우십니다. 마님.”
“듀리온 님. 칭찬은 감사하지만, 제가 단정해 보이시나요?”
듀리온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주아주 아름다우십니다. 마님.”
마치, 프로그램된 로봇 같은 대답에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시카르가 콧방귀를 뀌며 걸어 나왔다.
“물어볼 사람에게 물어야지. 설마, 듀리온 녀석이 단정한 게 뭔지,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안드레아나 메이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알겠다고 할 것 같아서 물어본 것이었다.
비카라면 냉정하게 잘 대답해 줬을 텐데.
그녀의 빈자리가 사뭇 크게 느껴지며 불쑥 그녀가 그리웠다.
“비카 님은 잘 지내고 있겠지?”
“물론이지. 우리는 생각도 안 하고 잘 지내고 있을걸.”
당연히 잘 지내고 있을 텐데. 내가 또 괜한 걸 물은 것 같았다.
단정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 몰라도 듀리온이 눈치는 빨랐다. 듀리온은 재빨리 나를 보며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마님. 마차를 대기해 놓았으니 어서 마차에 오르시죠. 대신전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감사해요. 듀리온 님.”
***
대신전에 도착하자, 키안과 루시가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키안과 루시는 우리를 보며 반가운 듯 미소지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니, 아버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왜 들어가 계시지 않고 여기 나와 계세요?.”
“자식이 부모를 마중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혹시 대신관이 이들의 출입을 금지시킨 건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 물은 것이었지만 다행이 그건 아니어서 안심이었다.
하긴, 아무리 대신관이라 해도 레카도르 국왕의 출입을 막을 수는 없겠지.
“어서 들어가요. 대신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시카르는 예감이 좋지 않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좋은 일로 기다리는 건 아닌 것 같군.”
시카르의 짐작대로 대신관이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은 이거였다.
“이번엔 또 뭘 훔치러 왔습니까?”
키안과 루시는 이미 대신관에게 인사를 올렸다고 하였기에 알현실에는 시카르와 나 둘만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카르는 크게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시카르는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며 대신관을 노려보며 시비를 걸듯 말했다.
“제 부인 앞에서는 언사를 가려 하시죠.”
내가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려 하자, 시카르는 내 손을 붙잡았다.
“부인은 죄가 없소. 그러니 나 때문에 부인까지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할 필요 없습니다.”
대신관이 우리를 쫓아내 버리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다행히 그는 대인배였다.
“공작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니군요. 공작부인께서는 죄가 없으시니까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작부인.”
“아니에요. 무례라니요. 신세를 크게 지고 있어서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신관님.”
대신관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공작부인께서 국왕 전하가 바른 정사를 볼 수 있게 항상 구설에 대비해 언행을 조심하신다고 들었는데, 정말 공작님께 아까울 만큼 현명하시군요.”
대신관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되레 더 긴장되는데.
“과찬이십니다.”
시카르는 어쨌든 대신관이 자신을 비하한 건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칭찬해서 기분이 조금 풀렸다는 듯 대신관을 노려보던 눈총을 거두었다.
“제 부인에 대한 칭찬은 고맙게 듣죠. 그리고 제 부인의 말씀대로 저희 할머니를 돌봐주고 계신 점에 대해서는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공작님의 할머님 일은 공작님이 대신전에 위해를 가한 것과는 별개로 보고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하실 거 없습니다.”
대신관이 할머니와 시카르가 잘못한 일을 결부시키진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물론 시카르도 그 점을 믿었을 것이다.
“저, 대신관님. 그런데 저희 할머님께서는 좀 어떠신가요. 좀 많이 좋아지셨나요? 이젠 공작저로 갈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언제까지고 할머니를 이곳에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대신관이 한 말은 우리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병이란 것은, 특히나 노환이 더 좋아지긴 힘듭니다.”
“물론 그렇겠죠.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공작님의 조모님께서는 요즘 대산전 안에서도 기억이 온전하지 않으십니다.”
대신관은 이런 충격적인 얘기를 뜸 한 번 안 들이고 했기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론 그것은 시카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놀란 듯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럼 더 나빠지고 계시다는 건가요?”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 갑자기 어떻게…….”
“갑자기가 아닙니다. 조금씩 나빠지고 계셨죠. 제가 드릴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시카르는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관께서 제게 이렇게 복수하는군요. 그것도 비열하게 제 할머니를 두고요!”
시카르는 더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어나시지요. 부인. 도저히 거북해서 더는 이 자리에 못 앉아 있겠으니 말입니다.”
시카르는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나는 시카르를 따라 일어서 나가려다 아무래도 할머니의 상태를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졌다.
“대신관님. 그럼 지금 할머니의 건강이 많이 나빠져 있을까요?”
대신관은 마치 이 질문을 기다리고 준비했다는 듯 대답했다.
“이미 수명은 다하셨습니다. 이곳에 있으면서 버티고 계셨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는 그 순간 반사적으로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이 방을 나서는 순간, 내 기억을 통해 이 얘기를 듣게 될 시카르가 떠오르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 할머니이니까.
“대신관님께서 허튼소리를 하시진 않을 테니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그동안 할머님을 위해 공간을 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원하신다면 이곳에서 장례를 치러드릴 수도 있으니 공작님께 말씀해 보십시오.”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나는 눈물 자국을 지우며 알현실을 나왔다. 시카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알현실 앞에 서 있다가 내가 피할 새도 없이 내 손을 잡았다.
“바로 나왔어야지…….”
시카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기억을 봤구나.
그래서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시카르는 씁쓸하게 웃으며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서 할머니를 보러 가자. 우릴 보면 금방 기운을 차리실 거야.”
“그래. 그러자.”
***
이미 할머니의 방에는 키안과 루시가 담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우리가 들어오자 할머니는 매우 반갑다는 얼굴로 활짝 웃으셨다.
하지만, 대신관의 말처럼 할머니의 혈색은 이전처럼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게 얼마 만이냐.”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할머니?”
“그래.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지? 비록 내가 여기 신전 안에 있어도 들을 건 다 듣고 산단다.”
“정말이요? 할머님께 제가 다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미 알고 계셔서 제가 알려드릴 말이 없겠는걸요.”
할머니는 웃으며 ‘그러니?’라고 했다가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참, 이제 와 고백하는 건데, 일전에 시카르가 죽은 척을 했을 때 말이다.”
그렇지. 그때 죽은 척을 했었지.
시카르는 그거 말하지 말라는 듯 할머니에게 제스처를 보내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가볍게 무시하듯 나를 보며 말했다.
“사실 시카르가 내게 다녀갔었단다.”
“대신전의 부활서가 사라진 때를 말씀하시는 거죠?!”
“보서라고 들었는데, 그게 부활서였던 모양이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귓속말을 하며 소곤소곤거렸다.
“네. 사실은 그게 보서가 아니라 부활서였어요.”
할머니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셨다. 하지만 그 웃음에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관이 한 말이 떠오르며 눈가에 또 눈물이 고이려 했다.
“저 그때 정말 공작님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신 줄 알았거든요.”
“그래. 시카르가 아주 못된 장난을 쳤더구나.”
키안과 루시도 듣기가 재미있는지 낮게 미소지었고, 나는 할머니에게 맞장구를 치며 시카르를 흘겨 보아았다.
“그러게요. 할머니.”
시카르는 다 그만한 사정이 있다는 듯 우리를 슬쩍 흘겼다.
“황새가 하는 일을 뱁새가 모른다는 속담이 있더군.”
우리는 또다시 킥킥거리고 웃었고 시카르는 또다시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때, 크게 웃으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할머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그래 나는 괜찮다.”
그리고 키안과 루시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국왕께서는 잠시 나가 계셔 주시겠습니까. 루시도 잠시만 나가 있거라.”
키안과 루시는 의연하게 알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를 떠났다. 키안은 자리를 떠나며 내 손을 잡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키안이 사람의 기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도.
대신관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이미 수명이 다했다고 했으니 키안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그 생각에 나는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키안과 루시가 나가자, 할머니는 내 손을 맞잡으셨다.
“지난밤에 말이다. 내가 꿈을 꾸었단다.”
“꿈이요?”
“그런데 그 꿈이 정말 신기하더구나.”
“어떤 꿈이었어요? 할머니?”
“글쎄. 내가 드래곤의 둥지로 떨어지는 꿈을 꾸었지 뭐니. 근데 거기엔 사나운 드래곤은 없고, 붉은 눈을 한 아기새가 있더구나. 헌데, 아주 예뻤단다.”
“아기 새요?”
“그래. 아기 새. 드래곤 둥지에 아기 새라니. 신기하지? 너무 작고 귀여워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기 새가 검은 피닉스가 되어서 블레이크가 있는 남쪽으로 날아가더구나.”
“그, 그래요?”
“유라야. 넌 이 꿈을 어떻게 생각하니?”
검은 새라고 하니 나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가 영원히 떠나는 꿈인 것일까.
나와는 달리 가만히 듣고 있던 시카르는 뭔지 알겠다는 듯 핑거 스냅을 튕겼다.
“태몽이군요.”
“그래 맞아.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건 태몽이었다. 난 그 피닉스가 딸이라고 생각한단다.”
딸…….
“시카르 넌 어떻게 생각하니?”
“예쁘다고 하셨으니 저도 딸이라고 생각해요. 할머니.”
“곧 유라 너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구나.”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다.
“할머니. 꼭 공작님을 닮은 예쁜 딸을 낳도록 할게요. 그러니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해요.”
“그럼, 그럼. 우리 시카르가 애 아빠가 되는 걸 봐야지. 이제 우리 시카르에게 정말 가족이 생긴 것 같아서 너무 안심이 되는구나.”
할머니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대신관이 말한 것처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나는 안심했다.
그런데.
다음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