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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외전12 (192/197)


192화. 외전12
2023.04.03.


아침에 할머니를 발견한 사람은 시카르였다.

시카르는 대신관을 불러 어떻게든 할머니를 살려달라고 했지만, 대신관은 할머니가 노화로 인한 자연사이기에 순리를 거스를 순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우아하고 아름다우셨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창가 의자에 앉아 미소를 짓고 마치 잠든 듯 그렇게 앉아계셨다고 한다.

시카르는 대신전에서 장례를 치러줄 수 있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할머니의 시신을 블레이크로 옮겼다.

급히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받은 사람들이 블레이크에 모였고, 엄숙한 장례가 치러졌다.

시카르는 할머니의 시신을 가문의 조상들이 묻혀 있는 선묘에 묻었다.

신성초를 구하기 위해 이제 막 레카도르를 벗어나던 베로니아와 발리제도 부고 소식을 듣고 조문을 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할머니를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여러모로 힘이 돼주셨던 할머니…….

처음으로 할머니의 따스함을 가르쳐주었기에 벌써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할머니의 묘 앞에서 시카르는 내 손을 꼭 잡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유일하게 의지하셨던 분이니 얼마나 슬플까.

묵직하게 꾹꾹 눌러 참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신성초 원정대는 길을 떠났다.

어두운 낯으로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지만 반드시 일을 잘 마무리 짓겠다고 우리를 위로하며 떠났다.

그리고 시카르는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 조금 이상해졌다.


“내게 가족이라곤 이제 정말 너밖에 없어.”

그리고 그는 결심한 듯 보였다.


“한인 마을을 만들어야겠어.”

“으응?”

시카르의 말에 의하면 서연 같은 사람들이 계속 생겨날 것이고, 나도 무슨 일로 증발해 버릴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서로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게 이곳에 오는 한인들이 살 수 있는 곳. 즉, 한인촌을 만들 것이라 했다.


“내 능력을 알고 있으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한인촌을 만들어서 내가 직접 관리를 해야겠다.”

시카르가 살벌한 눈으로 저런 얘기를 하니, 마치 한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시카르. 네 말은 그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주겠다는 거지?”

“그런 셈이지. 이곳에 오면 갈 데가 없으니 내 정보를 팔고 다닐 수도 있겠지. 여러모로 붙잡아 두는 게 좋겠어.”

붙잡아 두는 게 아니라 포획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잘 보호하겠다는 말이지?”

“뭐, 그런 셈이지.”

시카르의 행동은 빨랐다. 그는 블레이크 내에 한인촌을 설계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농장도 있고 우물 대신 수도 시설도 함께 만들 계획이었다.


“어때? 이 정도면? 네가 살았던 곳에 비해 열악하진 않겠지?”

“뭐, 온수가 팡팡 쏟아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안 그래도 온수 시스템을 만들 계획이다.”

“전기도 없이 어떻게?”

“여긴 마법이라는 게 있으니까.”

“마정석이 많이 들잖아.”

“마법사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서 연구하게 할 셈이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간 만들어 주겠다는 것만으로도 세심한 배려였다.


“그럼 농지가 있으니까 근처에 저수지도 만들어야겠네?”

“그걸 빼먹을 뻔했군. 똑똑한 부인을 둬서 마을을 설계하는데 어려움이 없는데? 또 뭐가 필요할까.”

“마을회관이나 정자?”

시카르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설계해 나갔다.

그리고 설계가 완성된 대로 건설은 즉각 들어갔다.

시카르는 그곳의 이름을 블랙스완이라 지었다.


“그건 경제용어인데……. 왜 그렇게 지은 거야?”

“블랙스완. 부인이 있던 세계의 말로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라던데? 지금 이 상황과 딱 들어맞잖아?”

“음. 틀린 말은 아니네.”

“전 틀린 말은 하지 않는답니다. 부인.”

시카르는 뒤에서 나를 꼭 끌어안고 블랙스완을 건설할 드넓은 대지를 보며 말했다.


“자. 부인. 이곳에는 이제 부인을 닮은, 아니 부인과 같은 세계를 살았던 사람들이 올 거야. 잘 봐둬. 앞으로 내가 부인을 어떻게 지키는지.”

노을이 지고 있어서일까. 드넓은 대지가 너무나 광활했기 때문일까.

시카르가 가리키고 있는 저 땅이, 그렇게 아름답게 반짝일 수가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드넓은 대지는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내 볼을 스쳤고 풀들이 인사하듯 몸을 흔들어댔다.

시카르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대지를 가르쳤다.


“이제 이곳에서 아름다운 기적이 일어날 거야. 부인.”

 

***

블랙스완의 건설이 시작되면서 내 배도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뱃속 아이는 마치 할머니가 가기 전 내게 주신 선물 같았다.

할머니의 태몽이 피닉스였기 때문에 시카르는 아이의 태명을 피닉스라고 불렀다.


“우리 피닉스가 커가는 동안 블랙스완도 점점 완공되어 가고 있어. 나중에 피닉스가 나올 때쯤엔 블랙스완이 완성될 거야. 그럼 가장 먼저 우리 아이에게 마을을 보여주고 싶어.”

“우리 피닉스는 좋겠다. 아빠가 끔찍이도 생각해줘서.”

“블랙스완이 완공되는 대로 사람들을 찾을 생각이야.”

그리고 블랙스완이 완공되는 날.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피닉스가 태어났다.

아이는 할머니의 예견처럼 딸아이였고, 시카르의 붉은 눈과 나의 검은 머리카락을 닮고 태어났다.

날 때부터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씩씩한지 공작저가 떠나갈 것처럼 우렁찼다.

시카르는 기분 좋은 듯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번쩍 들어 안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부인! 우리 피닉스 목소리 큰 것 봐! 세상을 호령하고도 남을 목소리잖아! 장차 공작저를 이끌어 나가기 손색이 없겠어!”

 

 
내가 출산했다는 소식에 키안은 국사를 보다 말고 공작저로 뛰어왔다.

정말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어머니! 동생을 낳으셨다고요?!”

시카르는 키안을 보자마자 안고 있는 아이를 건네주었다.

아직 열 한 살 밖에 안 된 키안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너무 예뻐요. 어머니! 이름은 뭐예요?”

“글쎄. 이름은 아직 안 지었는데.”

시카르는 생각하는 듯 하더니 키안을 보며 씨익 웃었다.


“국왕, 아드님께서 지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요?”

키안은 정말 그래도 되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국왕께서 지어주신다면 그보다 큰 영광은 없겠죠.”

키안은 행복한 고민을 하듯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이거다! 싶은 게 떠올랐다는 듯 활짝 미소지었다.


“로미! 로미 어때요?!”

“로미요?!”

“왕실 도서관 고서에서 봤는데 로미라는 말이 창시자를 뜻한다고 해요. 검은 머리의 붉은 눈을 가진 아이는 여태 들어본 적도 없어요. 어머니.”

시카르는 키안의 품에 안겨 있는 로미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로미라…… 넌 어때? 이름에 마음에 드니?”

로미는 웃지는 않았지만, 울지도 않았다. 그저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시카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예뻐 보였는지 시카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울지 않는 것을 보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키안 역시도 기분이 좋은 듯 로미를 번쩍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로미야. 앞으로 네 이름은 로미야! 로미!”

이 사랑스러운 부자들 사이에서 로미는 전혀 울지도 않고 똘망똘망한 눈을 뜨고 있었다.

곁에서 보고 서 있던 듀리온은 로미를 향해 허리를 살짝 굽히고 한 손을 올리며 인사했다.


“저 듀리온 아이반디카는 앞으로 블레이크 가의 대를 이으실 로미 블레이크 소공녀님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키안은 웃으며 듀리온이 내민 손 위에, 로미의 손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내 그대의 충정을 믿어 의심치 않겠노라. 라고 로미가 말하는군요. 듀리온 경.”

듀리온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시 내렸다.


“망극합니다. 전하.”

로미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고 다들 로미를 너무 보고 싶어했지만, 아직 너무 갓난 아기라 볼 수가 없었다.

시카르는 로미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다녔다.


“아이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좋다지?”

시카르가 하도 로미를 업고 다니는 바람에 나는 로미를 안을 기회도 없었다. 좋은 게 있다면 로미가 울기만 하면 아빠를 찾는 덕분에 나는 여유 있게 산후조리에 임할 수 있었다.


“부인. 로미는 내게 맡기고 부인은 산후조리에만 신경 써. 내가 다 할게.”

정말 알아서 다할 사람이라 믿음직하긴 했다.

시카르는 100일이 지나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로미를 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했다.

하지만, 헤르시아도 출산이 임박한 만삭이었고, 서연은 이제 막 임신초기라 공작저에 올 수가 없었다.

서신으로나마 로미의 출산과 탄생을 축하해주었고, 로미를 위한 선물을 보내왔다.

작고 앙증맞은 손싸개 발싸개였다.

그리고 시카르는 기다렸다는 듯 동양인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블랙스완은 조금씩 한인촌을 이루고 있었다.

레이독스가 힘을 보태준 덕분에 로미가 돌이 되었을 때쯤, 그리고 서연이 이제 막 출산을 했을 때쯤에는 완전한 마을 하나가 생겨났다.

결국 시카르는 마음먹은 것을 해내었다.


“이들은 모두 블랙스완이라는 성을 쓰고 있지.”

사람들은 시카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카르를 조심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시카르가 악수를 청해도 결코,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카르가 보금자리를 제공해준 것에는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갈 사람은 다시 갔고, 남아 있을 사람들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남아 있었다.

시카르는 자신이 좋은 영주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나도 어느 부분은 인정하는 바였다.

그리고 그쯤, 로미는 꽤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로미가 말을 하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로미는 공작저 초상화에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함무니. 함무니.”

“그래. 저분이 바로 로미의 할머니야.”

“힌니스 함무니. 함무니.”

처음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다가, 이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힐리스 할머니? 로미가 할머니의 성함을 어떻게 알아?”

“설마……?”

로미도 시카르를 능력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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