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외전13
(193/197)
193화. 외전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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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외전13
2023.04.06.
푸른 하늘 아래 잔디밭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떨어져 내렸다.
“아빠!!!”
블레이크가의 정원에 서서 장미를 가꾸던 시카르는 어린 딸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로미! 깼어? 우리 딸?!”
시카르는 제게 달려오는 딸을 안아주기 위해 두 팔을 벌리려다 멈칫했다.
오늘만은 딸을 안을 수가 없었다.
시카르가 달려오는 로미를 피해 슬쩍 몸을 피하자, 로미는 그대로 멈추며 고개를 획 돌렸다.
“아빠 나 안아줘!”
“오늘은 안 돼.”
하지만, 순순히 수긍하지 못하는 로미는 두 손을 뒤로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왜 안돼?”
“오늘 중요한 일이 있거든.”
“알겠어. 아빠 기억 안 읽을 테니까. 안아줘.”
로미는 다시 애교를 피우고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들어 올렸고 시카르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 믿어.”
“그럼. 아빠도 내 기억 읽으면 되잖아!”
시카르는 피곤한 얼굴로 제 이마를 만졌다. 그 기억 읽어봤자 남는 게 없었으니까.
“로미. 네 기억이라 봤자, 먹고, 뛰고, 잠자고, 간혹 코딱지 파서 먹고……. 후……. 그런 기억을 어디 써.”
시카르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말을 한다고 해서 로미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이 되는 나이에 하는 생각은 한계가 있었다.
“진짜 말 안 할게. 아빠. 아아.”
늘 이런 식이다. 애교를 피우다가 안 되면 이렇게 몸을 비틀어 대며 조르기 시작한다.
이러다 안 되면 바닥을 뒹굴며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린 딸에게 꼼짝도 못 하는 시카르는 대부분 로미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조르기 전에 부탁을 들어주곤 했다.
‘어쩌다 그런 몹쓸 능력을 닮아버렸는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시카르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다짐을 받듯 말했다.
“그럼 정말 엄마한테 말하기 없기다?”
“좋아. 약속.”
하지만 어린 딸이 약속을 지키는 법은 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미는 새끼손가락을 걸자마자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 다다다다다다 공작저를 향해 달려갔다.
“와아! 엄마! 베로니아 공주님이 오신대!!!”
시카르는 허망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하. 어떻게 매번 속냐. 시카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택을 향해 도도도 뛰어가는 딸이 행여나 넘어질까 걱정돼 그 뒤를 졸졸졸 쫓아갔다.
“로미! 그러다 또 넘어지겠다! 아빠한테 업혀!”
로미는 이미 시카르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로미는 숨을 헐떡거리며 공작저로 들어왔다.
다과를 준비하던 유라는 헐떡이는 로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로미. 방금 갈아입은 옷인데 또 흙이 묻었잖니. 하루에 몇 벌을 갈아입는지 모르겠구나.”
유라가 속 터진다는 얼굴로 로미 치마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동안 로미는 방금 얻게 된 정보를 얘기하기 위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숨이 차서 헐떡이느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엄마! 엄마! 엄…….”
“왜 그래. 로미. 무슨 일 있었어?”
“엄마가 말했던 공…….”
뒤늦게 따라온 시카르의 로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우리 딸 잡았다!”
“여보. 로미 옷 좀 갈아 입혀요.”
시카르는 원하는 바였다.
“네. 부인 제가 옷을 갈아 입힐 테니. 하던 거 마저 하시지요.”
그제야 헐떡임을 멈춘 로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카르는 부리나케 로미를 들춰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로미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시카르는 로미를 소파에 앉히고 누가 들을 세랴 문을 닫고는 지친 듯 소파에 앉았다.
로미가 태어나고는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었다.
매일 스펙타클한 하루가 시카르를 맞이했다.
“이건 뭐, 폐왕을 몰아내던 시기보다 더 험난한 하루하루군.”
“아빠, 빨리 옷 줘. 옷 갈아입고 엄마한테 갈래.”
“어. 알았어. 아빠가 옷 갈아 입혀줄게.”
하지만, 옷 하나 갈아 입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옷을 하나 꺼내려고 하면.
“아빠 그 옷 말고. 겨울 왕국 옷! 그게 예쁘단 말이야.”
“그 옷은 이미 로미가 다 입고 흙투성이로 만들어서 아직 세탁된 게 없어요.”
“그럼 불의 왕국 옷 줘.”
“그래. 그걸로 줄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카르는 로미의 입맛에 맞는 옷을 꺼내 옷을 갈아 입혀주며 말했다.
“로미. 우리 딸, 착하지?!”
“응. 나 착하지.”
옳지. 이거다.
“우리 딸 착하니까 아빠와 한 약속 지킬 거지?”
“무슨 약속?”
“베로니아 공주님이 오는 건 엄마한테 비밀로 하기로 한 약속.”
“왜 말하면 안 되는데?”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나도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단 말이야.”
“로미가 미리 말하는 것보다 공주님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더 놀라지 않을까?”
제발 넘어오라는 심정으로 시카르가 살살 달랜 보람이라도 있듯 로미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전하 오빠 불러줘.”
“국왕은 요즘 결혼식 준비 때문에 바빠. 때마침 공주님께서 결혼식 오기 전에 오시니까 그때 같이 보자. 어때?”
로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이제 옷도 다 갈아입었으니 엄마랑 같이 다과 먹으러 갈까?”
“아니. 난 수련의 방에 갈래.”
“거긴 로미가 가기에는 위험한 곳이야.”
“전하 오빠가 어릴 때는 같이 갔잖아!”
시카르는 또다시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아야 했다.
“알았다. 가자. 가.”
***
시카르와 유라는 로미의 바람대로 수련의 방을 꽃동산으로 바꾸고 귀에는 로즈마리 꽃잎을 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로미는 바닥에 열심히 낙서를 했다.
“이제 곧 국왕의 결혼식이 열리는데 공주님은 아직 소식 없어요?”
공주님 소리에 로미가 미어캣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시카르가 ‘제발’이라고 말하듯 울상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아 빌자 로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유라는 별로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제 곧 국왕의 결혼식이 있으니 그전까지는 오실 거라 생각합니다. 부인.”
“그렇겠죠?”
“맞아. 곧 올 거야. 엄마.”
로미가 무의식의 흐름으로 던진 말이었다. 시카르가 깜짝 놀라 언성을 높였다.
“로미! 제발!”
그러자, 데시벨이 높으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데스나이트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 데스나이트의 모습에 유라는 옛 기억이 새록새록 돋았다.
그러다 곧, 어린 로미가 놀라진 않을까 걱정돼서 금세 로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로미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우와, 데스나이트다. 실제로 처음 봐!”
“로미. 안 무서워?”
“안 무서운데? 내가 이겨, 엄마.”
“우리 로미 겁이 없네. 씩씩해서 다행이다.”
“엄마. 엄마.”
“응?”
“데스나이트가 나타나면 사랑해 하는 거지?”
로미가 데스나이트를 겁먹지 않아 하는 이유가 이미 기억을 통해 봤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맞아. 우리 로미, 똑똑하기도 해라.”
유라가 로미의 볼에 입을 맞추자, 로미도 유라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엄마 사랑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카르는 강아지처럼 사랑을 갈구하듯 볼을 내밀었다.
“아빠는?”
로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꾸했다.
“아빠는 생각해볼게.”
“왜? 왜! 나는 생각해보는 거야?”
“아빠는 전하 오빠한테 사랑해 잘 안 했잖아.”
시카르는 당황한 나머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딸에게 찍히기는 싫었다.
“원래 남자끼리는 쑥스러워서 잘 안 하는 거야. 국왕도 나한테 잘 안 하는 거 못 봤어?”
“못 봤어.”
시카르는 정말 자식 키워도 소용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았다. 도대체가 제 말을 듣는 자식이 없었다.
키안은 머리가 커서 그렇다지만, 로미는 저를 똑 닮은 능력 덕분에 케케묵은 과거일까지 들먹이며 이렇게 야단이었다.
“알았어. 내가 국왕을 만나면 꼭 사랑한다고 할게.”
“약속.”
“그래. 약속.”
“내가 확인한다?”
“그, 그래.”
겉으로만 땀을 흘리지 않았지 시카르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그리고 유라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풉.”
“왜 웃습니까, 부인?”
“제 고충을 좀 느끼셨나 해서요.”
시카르는 말이 되냐는 듯 유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부인. 사실 로미에 비하면 저는 약과입니다.”
“어차피 귓속말로 해봤자, 나중에 로미가 다 볼 텐데요?”
“아차.”
시카르와 유라가 이렇게 서로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쓰게 된 것도 모두 로미 때문이었다.
로미가 있을 때는 깍듯이 서로에게 존칭을 쓰고, 로미가 없을 때는 서로 편하게 대했다가 모두 다 들켜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서로에게 존칭을 쓰는 습관이 완전히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말괄량이도 울고 갈 로미의 교육을 위해서 두 사람이 내린 결정이었다.
로미는 다시 펜을 들고 저 앞으로 가서 바닥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엎드려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로미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은 그런 로미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죠?”
“부인을 꼭 닮아서 그런 겁니다.”
시카르는 로미가 안 보는 틈을 타 유라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여보. 애정행각은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나 해라고 했잖아요.”
“뽀뽀까지도 그렇게 해야 한다면 전 병이 날 겁니다. 부인.”
“그럼 하루에 한 번만 하세…….”
시카르는 유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하루에 한 번만 하시라고욧!”
“언성 높이면 또, 땅이 울릴 겁니다. 그리고 뽀뽀를 하루에 한 번만 하는 부부가 어디 있습니까. 자꾸 그러면, 제가 뽀뽀하게 만들어 버리는 수밖에 없겠죠.”
“뭐, 또 절 넘어트리기라도 하시려고요?”
“물론.”
시카르는 가만히 앉아 있는 유라를 뒤로 눕혔다. 시카르가 유라의 목을 받쳐 들고는 있었지만,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흙바닥에 머리카락과 드레스를 모두 버릴 판국이었다.
“이거 놓죠?”
“제발 뽀뽀해 달라고 애원한다면 생각해보죠.”
시카르가 매우 오랜만에 치는 장난이었지만, 로미의 교육을 위해서 유라는 이제 그런 장난을 받아주지 않고 있었다.
한마디로, 유라는 정색했다.
“빨리 원위치 안 시키면 오늘 각방이야. 시카르.”
그리하야. 시카르는 더는 장난을 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주 공손한 자세로 유라를 원위치로 만들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부인.”
“알면 됐으니, 로미 목마나 좀 태워주세요.”
“네. 부인.”
시카르는 고분고분 로미에게 걸어갔다.
“로미! 목마 태워줄까?!”
“응! 아빠!”
시카르는 곧장 로미를 들어 안아 목마를 태웠다. 그런 부녀의 모습을 보고 있는 유라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아이가 주는 행복. 그것은 세상에 태어나 다시는 느껴보질 못할 벅찬 감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