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외전15
(195/197)
195화. 외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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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외전15
2023.04.13.
두 부자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는 성인이 돼 청년에 가까운 키안과 시카르가 나란히 앉아 낚시를 하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꼭 친구처럼 보일 만큼 정다운 모습이었다.
“고기는 잡히냐.”
“안 잡혀.”
또다시 침묵. 그리고 시카르가 입을 열었다.
“둘이 있으니 참…….”
그다음은 키안이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재미없다.”
하지만 재미는 없어도 편안한 휴식 같은 낚시였다.
“근데 정말 낚시는 왜 하자고 한 거야?”
“나중에 크면 장가가기 전에 아버지와 낚시하러 오고 싶었어.”
“그때가 생각나는군. 커다란 고기를 다 같이 잡던 때가.”
“가끔 그 생각이 들면 웃음이 나. 그때 정말 즐거웠거든.”
“나쁘지 않군.”
키안은 문득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또 왜.”
“키워줘서 고마워.”
시카르는 문득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울컥 튀어나올 것 같았다. 로미가 생기고 눈물이 많아진 것도 아닌데…….
시카르는 처음 키안이 제게 아버지라고 말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키안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지만, 이제는 성인이 된 키안이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되레 시카르는 그런 키안에게 더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로미의 말이 떠올랐다.
‘전하 오빠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지금이 바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할 그 순간이라는 것이.
“……국왕.”
“응.”
“사……. 사…….”
“빨리 말해. 초봄이라 추워.”
시카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꽉 쥐며 말했다.
“사랑한다.”
잠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시카르를 보던 키안은 머쓱한 마음에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 컸는데 사랑한단 소리를 듣고, 별일이네.”
“……사실 로미가 시켰다.”
“뭐,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우리 이제 일어날까.”
“아버지.”
“오늘 나를 참 많이도 부르네. 왜 이놈아.”
키안은 방금 시카르가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나도 사랑해.”
그 순간 시카르는 또 가슴이 뭉클거리며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시카르는 들킬세라 얼른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너도 로미가 시켰냐.”
물론 아니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 꼭 키워줘서 고맙단 말과 사랑한단 말을 전해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키안은 괜히 그런 척했다.
“……그래.”
“춥다. 어서 들어가자.”
“물고기도 안 잡았는데?”
시카르가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어차피 여기 물고기 없어.”
키안은 황망한 얼굴로 시카르를 따라 일어섰다.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왜긴. 낚시하러 왔지.”
“물고기도 없는데?”
“하지만 더 중요한 걸 낚았지.”
키안은, 먼저 걸어가는 시카르를 보며 씨익 웃고는 따라 걸었다.
***
키안이 직접 잡은 건 아니었지만, 공작저 식탁 위로 생선요리가 올라왔다.
로미는 생선요리를 두 눈을 깜빡이며 보다가 새우를 보곤 깜짝 놀라서 말했다.
“여기 새우 있잖아! 전하 오빠는 이런 거 먹으면 안 돼!”
키안은 그런 로미가 너무 귀여워서 주머니에 넣고 싶을 정도였다.
“똑똑한 우리 로미. 로미는 먹어도 되니까 우리 로미 먹으라고 내가 손질해줄게.”
“아냐. 이런 건 아빠가 잘해. 아빠, 새우 까줘.”
시카르가 로미의 음식 손질 담당이긴 했지만, 왠지 지금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제 오빠를 아끼려고 나에게 시키다니.
하지만 시카르는 로미가 먹을 새우에 다리 한 짝이라도 붙어 있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고 있었다.
로미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듀리온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 말했다.
“아빠. 듀리온은?”
“듀리온은 요즘 블랙스완에서 업무를 보느라 바쁘지. 그런데 듀라온은 왜 찾아?”
“로미가 뭐 먹을 때마다 듀리온 님을 찾아요.”
“그렇군요.”
키안은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듀리온 경이 보고 싶군요.”
“모두 내일 뵙게 될 거예요. 국왕. 로엔 님도 제르미 님도 국왕의 결혼식에 무사히 참석하기 위해 회복에만 집중 중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모두들 정말 보고 싶습니다.”
시카르는 뭔 소리냐는 듯 물을 마시며 말했다.
“그래봤자, 내일 신부가 될 루시가 가장 보고 싶겠죠.”
민망함에 얼굴이 벌게진 키안을 두고 로미가 인상 팍 썼다.
“아니야! 전하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보고 싶어 할 거야!”
키안은 우리 꼬맹이 잘했다는 듯 로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맞아. 나는 우리 로미가 세상에서 제일 보고 싶어.”
시카르는 왠지 이들 사이에 장난을 좀 치고 싶어졌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가장 보고 싶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마음이 변하셨습니다. 국왕?”
유라가 ‘나?’라고 하듯이 시카르를 쳐다보다가 시카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책이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와 동시에 키안도 손사래를 쳤다.
“오해십니다. 전 어머니도 항상 보고 싶습니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키안은 여전히 듬직한 아들이었다.
유라는 미소 지으며 키안의 손을 잡았다.
“저도 그렇습니다. 국왕. 그리고 결혼 축하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니.”
“네. 국왕.”
“아직 제 방이 그대로 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 결혼 전에 오랜만에 제 방에서 자고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어릴 때 제가 쓰던 방을 찾는 키안 때문에 유라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행여나 어릴 때 지내던 방을 궁금해할까 봐, 간혹 떠오르는 추억을 찾게 될까 봐 키안의 방은 먼지만 닦고 있을 뿐 하나도 치운 것이 없었다. 어릴 때 키안이 쓰던 물건 그대로 모든 것을 보관 중이었다.
어릴 때 추억을 되새긴다는 건 그때가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키안의 방을 아직 잘 보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릴 적을 떠올려주니 너무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해요. 오늘은 집에서 자고 가요.”
“감사해요. 어머니.”
“로미도 같이 잘래!”
시카르는 키안에 또 달라붙는 로미를 붙잡으며 말했다.
“로미는 안 돼. 아빠랑 자야지.”
로미는 입술이 또 비죽 튀어나왔다.
“나는 전하 오빠랑 자고 싶은데.”
유라는 시카르에게 어서 로미를 데려가라는 듯 눈짓을 했고, 시카르는 재빨리 눈치를 채고 로미를 들춰 안았다.
“아이고. 졸리다. 자 우리는 자러 가자.”
시카르의 품에 안겨나가는 로미의 앙탈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내일 아침에 인사는 못 드리고 갈 거 같아요. 새벽 일찍 입궁해야 해서요.”
“괜찮아요. 어차피 결혼식 때 볼 텐데요. 뭘.”
키안은 뻘쭘한 얼굴로 유라에게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다.
이제는 유라의 얼굴이 키안의 가슴팍에 파묻힐 만큼, 키안은 그렇게 커버렸다.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니. 정말…… 사랑해요…….”
유라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울음이 쏟아졌다.
“흑흑……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국왕.”
“평생을 말해도 모자란걸요. 키워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날 밤, 시카르는 오빠와 자고 싶다고 우는 로미와, 아들 때문에 감동해서 우는 유라를 달래다 겨우겨우 잠에들 수가 있었다.
한편, 키안은 오랜만에 찾은 제 방을 보며 추억에 빠졌다.
길가에 버려져 짐승처럼 클 뻔했던 아이가 보살핌을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매일 밤 유라의 품에 안겨 잠들던 기억까지.
상처와 외로움으로 가득할 뻔했던 시절을 사랑과 보살핌으로 행복하게 자랐던 기억에 빠져 어릴 때 잠들었던 그 침대 속으로 파고 들어가 몸을 뉘었다.
키안은, 이제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또 언제 찾게 될지 모르는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과 작별하는 중이었다.
***
새벽에 키안이 공작저를 빠져나간 것을 체크할 시간도 없이 아침부터 공작저는 전쟁 그 자체였다.
기운을 차린 로엔이 로미를 보고 너무 귀엽다고 수선 떠는 통해 정신이 없었고, 그다음으로는 로엔의 기억을 읽은 로미가 로엔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엄마. 로엔 아줌마가 맨날 제르미 삼촌 엉덩이 만져.”
로엔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는 듯 경악했고, 물론 나도 경악했다.
“로엔. 로미가 어른만 보면 하는 소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제야 로엔은 안심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군요.”
시카르는 이미 다 알고 있는지 별 감흥 없다는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늦겠으니 서두르지. 듀리온, 어서 마차를 준비하도록.”
“네. 공작님.”
“제르미와 로엔은 따로 타고 오지.”
늘 제의와 로브만 입다가 오랜만에 드레스와 예복을 갖춰 입은 로엔과 제르미는 옷이 불편한지 자꾸만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로엔은 자꾸 끼는 코르셋을 앞으로 당겼고 제르미는 재킷 단추를 계속 풀었다. 그럴 때면 안드레아가 다시 재킷을 잠가 주곤 했다.
“이 옷 너무 불편한데, 저희는 옷을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오늘 국왕의 결혼식이니 그냥 그렇게 입지. 지금 갈아입으면 늦을 텐데.”
“이 옷이 입는 게 불편하지 벗는 건 빠르던걸요. 저희는 신관이고 법사이니 국왕 전하께서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로엔과 제르미는 저럴 땐 정말 죽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은 얼른 올라갔고 시카르는 늦겠다며 우리를 데리고 나갔다.
***
국왕의 결혼식이라 그런지, 왕궁은 입구 다리에서부터 화려한 깃발이 펄럭펄럭거렸다.
왕궁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공작부인! 오랜만이에요!”
돌아보니, 헤르시아네 부부와 서연네 부부가 각자 아이를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헤론이 벌써 이렇게 자란 거예요?”
헤론은 헤르시아와 아론의 아들로 헤르시아와 아론을 반반 닮아 잘생겼고 헤르시아를 닮아 점잖았다.
헤론은 나를 보며 깍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부인.”
“오. 그래 오랜만이구나. 헤론. 아주 점잖게 잘 자랐구나.”
우리가 인사를 끝내는 동안 서연의 아들 리카온이 점잖게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부인.”
리카온은 서연의 검은 눈동자와 레이독스의 분홍색 머리를 갖고 있었다.
점잖기는 또 어찌나 점잖은지.
그러고 보니 우리 로미를 제외하곤 하나같이들 점잖았다.
“안녕. 리카온. 여전히 멋지고 점잖구나.”
로미는……. 그새 아이들의 기억을 엿보고 내게 속닥거렸다.
“엄마. 헤론 오줌싸개야. 어제 바지에 또 오줌쌌어.”
“응. 알았어, 로미야. 하지만 남의 기억 막 그렇게 보면 안 돼. 알았지?”
“엄마. 엄마. 리카온은 로미 좋아해. 어제 로미 보겠다고 예쁜 옷 입혀 달라고 했어.”
“그래? 아니, 아니. 로미. 친구들의 기억을 막 그렇게 읽으면 안 돼요.”
로미가 아이들의 기억을 막 보고 다녀서 골치긴 했지만, 리카온이 로미를 좋아한다는 건 좋은 소식처럼 들렸다.
사윗감을 미리 점 찍는다면, 아무렴 레이독스를 닮아 리카온처럼 점잖은 영식이 좋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