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외전16
(196/197)
196화. 외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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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외전16
2023.04.17.
“헤르시아. 후작부인. 우리 아이들이 조금만 더 크면 그땐 좀 더 자주 뵙도록 해요. 지금은 아이들이 어려서 뵙기도 힘들군요.”
사실 로미가 기억을 보고 떠드는 바람에 나는 이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서연은 그런 내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른 척해주고 있었다.
“저 그런데, 아론 경과 후작님은 어디 가셨죠?”
“아. 결혼식 준비 때문에 안에 계세요.”
아, 그렇지. 레이독스가 재상임을 깜빡할 뻔했네.
“그럼 우리도 이만 들어갈까요.”
“네. 먼저 들어가세요. 저희는 듀리온이 도착하는 대로 뒤따를게요.”
“네. 그러세요.”
헤르시아와 서연이 가고 나서 우리는 왕궁을 구경하며 듀리온을 기다렸다.
왕궁 안은 결혼식이 아니라 축제 분위기였다.
국왕의 결혼식을 보러온 건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왕궁의 문을 활짝 열고 시민들도 원한다면 국왕의 결혼식을 보게 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로미는 신난 듯 사람들의 기억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시카르는 로미를 꽉 붙들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리고 있으니, 듀리온이 마차를 마구간에 맡기고 오고 있었다.
시카르는 듀리온을 보자마자 곧장 로미를 맡겼다.
“아내와 얘기 좀 하고 가게 로미 좀 데리고 먼저 가.”
“네. 공작님.”
“고마워요. 듀리온.”
가끔 이렇게 우리는 듀리온에게 로미를 맡기고 한숨을 돌리곤 했다.
로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까 시카르도 아이들의 기억을 읽었는지. 내게 말했다.
“글쎄 인. 헤론은 로미와 나이도 같은데 아직 오줌을 못 가리더군.”
부녀가 똑같다.
“로미한테 들었어. 그리고 로미도 아직 종종 그래.”
“레이독스의 아들놈은 감히 우리 로미를 넘보고 있고 말이지.”
“넘보다니. 나는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리카온 같은 사위면 더 바랄 게 없겠어.”
“전 연하남은 반대입니다. 부인.”
“우리도 당신이 연하입니다만.”
“맹세컨데, 단 한 번도 부인이 연상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게 부인은 항상 애기 같기만 하거든.”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어서 나는 피식 웃었다.
***
결혼식은 메인 홀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우리 자리는 앞에서 하객들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귀빈석에 도착하자 베로니아 부부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블레이크 공작부인.”
자그마치 7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동안 회복을 잘한 모양인지 다행히 베로니아와 발리제의 혈색이 좋아서 안심이 되었다.
“저하 이게 얼마만입니까. 오늘에서야 뵙는군요.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 뵙게 돼 영광입니다.”
시카르와도 인사를 주고받은 후, 베로니아의 시선은 로미를 향했다.
이 아이가 누구냐고 묻는 눈빛은 아니었고, 이 아이가 바로 딸아이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그 별난 로미도 베로니아의 카리스마에 눌렸는지 왠일로 얌전해졌다. 로미는 요조숙녀처럼 베로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로미 블레이크가 공주 저하를 뵙사옵니다.”
베로니아는 로미를 향해 자상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똘똘해 보이는군, 로미.”
방긋 웃던 로미는 베로니아가 내민 손을 잡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시 차분하게 뒤로 물러섰다.
“저하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로미는 늘 그렇듯 내게 다시 도도도 걸어와 속닥거렸다.
“엄마. 공주님이 전하 오빠 같아. 아무것도 안 보여.”
그래서 나도 귓속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왕족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단다. 로미.”
“왜?”
“아주아주. 고귀한 존재니까.”
“그럼 로미는 안 고귀해?”
“물론 로미도 고귀하지. 하지만 고귀함이 다른 색이어서 그래.”
로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고귀함은 어떤 색일지 확인이라도 하듯이.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수선을 떨었다.
“어? 엄마! 엄마! 비카야! 비카!”
“어허. 로미, 비카라니. 비카 님이라고 해야지. 아니, 잠깐 누구라고?”
로미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외쳤다.
“아이참, 비카라고! 비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카라고?
나는 로미가 고함을 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비카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아니다. 내가 혹시 잘못 보는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시카르를 콕콕 찔렀다.
반응은 같았다. 시카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하필 듀리온은 보안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시카르! 어서 듀리온 데려와, 어서!”
시카르는 재빨리 내게 로미를 건네며 자리를 떠났다.
“알았어. 부인.”
듀리온이 얼마나 기뻐할까. 로미의 말로는 듀리온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비카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했었다.
오랜만에 보는 비카는 여전히 검은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고 여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마님.”
“그러니까요, 비카 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정말 눈물이 절로 흘렀다.
“결혼식이 아직 진행되지 않은 걸 보니, 제가 늦지 않게 도착한 것 같군요.”
“잘 오셨어요. 비카 님. 평생 못 볼 줄 알고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정말…….”
“인간들 결혼식은 평생 한 번이라는데…… 아, 물론 두 번 하는 사람도 있죠. 공작과 마님은 두 번 했으니까. 어쨌건, 그래서 왔을 뿐이에요.”
무뚝뚝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비카가 왔다는 건 정말 키안을 위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너무나 감격이었다.
그리고 내게 여전히 마님이라고 불러주는 그 호칭까지도. 나는 눈물겨웠다.
비카에게 로미를 소개해주려는 찰나, 시카르와 듀리온이 도착했다.
정신없이 뛰어왔는지 헉헉거리며 도착한 듀리온 역시도 비카를 보고 눈을 비볐다.
“세상에, 비카?”
“여전히 촐싹이는군. 시끄러운 놈.”
듀리온은 비카를 보자마자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 녀석!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비카는 기분 나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으드득 갈듯이 말했다.
“떨어져. 불결해.”
시카르와 비카는 언제나처럼 서로에 대한 인사는 생략했다.
시카르는 마치 불청객이라도 보는 눈으로 물었다.
“국왕의 결혼식은 어떻게 알고 왔어?”
“레카도르 국왕이 결혼한다는 소문은 이미 쫙 퍼졌어.”
“비카. 넌 여전하군.”
“공작 너도 여전한 것 같군. 아니, 넌 좀 늙었군.”
“자식을 키우면 누구나 다 늙지.”
시카르는 도착하자마자 내게서 로미를 받아 안아 들고 있었기에 비카는 시카르의 옆구리에 붙어 있는 로미를 보며 말했다.
“이 아이가 네 자식이냐? 참 말 안 듣게 생겼군.”
그러자 로미는 비카의 팔을 덥석 잡았다.
비카는 당황해서 팔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로미는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이 꼬맹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로미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비카를 쳐다보았다.
“비카. 우리가 보고 싶었구나?”
“전혀. 그런 적 없는데?”
로미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얼굴로 비카를 흘겨보았다.
“거짓말은 나쁘다 그랬어.”
당황한 비카는 공작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공작. 이 맹랑한 애 좀 처리해 주지 그래?”
되레 시카르는 웃으며 로미를 비카의 품으로 넘겼다.
“널 맘에 들어 하는 거 같은데. 식이 끝날 때까지 로미 좀 보고 있어라.”
“싫어. 내가 왜?”
비카는 싫다고 말하면서도 로미가 두 손을 뻗으며 안겨들자 거부하지 못하고 로미를 안아 들고 있었다.
로미가 저렇게 낯을 가리지 않고 사람에게 덥석덥석 안기는 건 사람의 기억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억만 보고 관심을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저렇게 이미 기억을 본 대상에게 더욱 관심을 갖고 안긴다는 것은 그 대상을 마음에 들어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로미는 비카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카는 로미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밀크티 좋아하는구나.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건데.”
비카는 로미를 제게 안기도록 허락한 걸 후회했다.
“얘도. 기억을 보는구나. 이 망할 공작 놈의 핏줄!”
비카가 로미를 떼어내려 하자 로미는 비카의 몸에 찰싹 붙으며 말했다.
“비카. 우리 엄마가 보고 싶었지?”
로미는 사람을 협박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카는 로미를 시카르에게 넘겨주려다 다시 끌어안았다.
“알았어. 알았어. 놀아 줄 테니까 조용해. 공작 놈은 여러모로 피곤하군.”
우리는 웃으며 비카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식이 시작이니 자리에 앉지.”
왕궁의 드넓은 메인 홀에서 드디어 키안과 루시의 결혼식이 열렸다.
루시는 눈이 부시다는 말조차 부족할 만큼 아름다운 신부였다. 레이독스의 허락하에 루이드가 루시와 함께 행진하며 신부를 키안에게 넘겼다.
우리는 식이 시작하자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앞으로 걸어나갔다.
루이드는 키안에게 신부를 넘기기 전, 아쉬운지 루시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루시는 루이드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너무나 훈훈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물론, 비카가 없었다면 분명 따뜻한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은 그런 장면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비카가 말하기를, 루시는 루이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정한 남매처럼 굴어. 아니면 변방으로 쫓아내 버린다?”
루이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게 저런 이유 때문이었군.
어쨌든 겉으로 볼 땐 아주 다정해 보였다.
루시와 키안은 누가 봐도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 같았다.
“이제 드디어 이 이야기의 끝이 나겠군.”
시카르는 미소 지으며 내 등 뒤에서 나를 꼭 끌어안았다.
“둘이 정말 잘 어울려, 그치?”
“그래. 우리만큼 잘 어울리는군.”
시카르와 내가 키안의 결혼식을 보며 감회에 젖어 있는 동안, 비카는 안고 있는 로미가 처치 곤란이라는 듯 말했다.
“그런데 난 언제까지 이 꼬맹이를 안고 있어야 하는 거지?”
“우리가 강제로 떠맡겼나? 네가 자발적으로 내 딸을 안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이 꼬맹이가 협박을 하니까 그랬지!”
열심히 비카에게 붙어 기억을 읽고 있던 그 꼬맹이 로미는 마치 무언가 봤다는 듯 비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 비카 님, 선물! 선물 줘!”
우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비카를 쳐다보았다.
“선물?”
“응. 비카 님이 우리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