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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외전17 (197/197)


197화. 외전17
2023.04.20.


비카는 이를 으드득 갈더니 더운지 제 마빡을 향해 바람을 불었다.


“선물 아니고, 적선이라고 하는 거다. 꼬마야.”

“선물 맞는데.”

아무래도 비카에게 미안해진 나는 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비카 님 힘드시죠? 로미 이리로 주세요.”

하지만, 로미는 비카가 정말 마음에 드는지 비카의 옆구리에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싫어. 안 가. 나 비카 할머니 기억 읽는 거 재미있단 말이야.”

“할머니라니. 꼬마야. 난 아직 한창때의 젊은 다크엘프이다.”

“150살 맞잖아.”

저럴 때보면 정말 로미는 시카르의 핏줄이 틀림없었다. 말을 돌려 하는 법이 없었다.


“산수가 미숙하군. 아직 150살은 안 됐다.”

비카가 임자 만난 기분인데. 시카르는 관심 없다는 듯 비카를 흘겨보며 물었다.


“그래서 선물이 뭐야.”

“선물이 아니라. 적선. 내가 너 따위에게 선물을 줄 리가 없잖아?”

예전 같으면 덥석 비카의 기억부터 읽었을 시카르였지만, 이제는 로미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남의 기억을 마구 훑어보진 않았다.


“어쨌든 적선의 내용물이 뭐냐고.”

“비료 없이 물만 줘도 잘 자라는 작물 씨앗이야. 많이는 못 구했지만 이 정도면 공작저에서 키울 만할걸.”

“이건 그럼 블랙스완에 가져가야겠군.”

그 순간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비카 님도 블랙스완으로 가요!”

시카르도 그거 괜찮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 일손도 딸리는데 잘 됐군. 와서 좀 도와.”

“싫어. 바빠.”

“백수 주제에 뭐가 바빠.”

“내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기에 바쁘단 말이었다. 공작.”

그때, 뒤늦게 로엔과 제르미가 나타났다. 나는 어서 오라는 듯 로엔에게 손짓했다.


“로엔 님! 제르미 님! 여기 누가 왔는지 좀 봐요!”

로엔은 너무너무 반가워 죽겠다는 얼굴로 사람들을 해치며 뛰어왔다.


“세상에! 비카 님!”

비카는 로엔을 향해 고개만 까딱거렸지만 로엔은 물개처럼 박수를 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로엔이 신기해하는 것은 비카 그 자체보다 비카의 피부였다.


“어떻게 하나도 안 늙었어요? 아니, 안 본 사이에 피부가 더 탱글탱글해졌잖아요?”

비카는 시카르에게 들으라는 듯 로미를 보며 말했다.


“그야. 공작과 있을 때는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요. 편하게 쉬다 보니 저절로 피부 탄력이 돌아오더군요.”

로엔은 비결이 그거냐는 듯 제 볼을 부여잡았다.


“그래서 제가 원정 간 사이에 폭삭 늙어버린 거였군요!”

그제야 결혼식 주례가 끝나고 있었다.

키안은 레이독스가 주례를 해주길 바랐지만, 신부의 아버지이자 왕국의 재상이었기에 대신관이 주례를 맡았다.


“이제 또다시 행진이 시작되겠군.”

홀에서 결혼식이 끝난 후, 키안과 루시는 시민들 앞에서 또, 한 번의 행진을 해야 했다.

두 사람은 소형 마차 위에 올라 시민들이 있는 야외를 한 바퀴 돌았다.

그동안 우리는 야외에 준비된 카페테리어에서 음식을 담아 온 후 자리에 앉아 식사를 즐겼다.

얼른 키안이 와서 비카를 봐야 할 텐데. 초조했다.

다행히 행진을 마친 키안이 멀리서부터 비카를 알아보고 헛웃음을 치며 걸어왔다.


“세상에! 비카 님?!”

루시도 비카를 보고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비카 님!”

비카는 키안과 루시를 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랐다.


“인간들은 정말 빨리 크는군. 이젠 어른이 다 되었군.”

“정말 잘 오셨습니다. 비카 님.”

“그저, 의리는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이런 게 의리라지?”

키안은 활짝 웃었고, 루시도 감동한 듯 활짝 웃었다.

나는 일어서 키안와 루시의 결혼을 축하했다.


“결혼 축하합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로엔과 제르미는 키안과 루시를 보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결혼을 감축드립니다. 국왕 전하. 왕후 전하.”

헤르시아네와 서연네도 오다가 키안과 루시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결혼을 감축드립니다. 국왕 전하. 왕후 전하.”

키안과 루시는 품격있고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식사들 즐기세요.”

모두들 키안과 루시가 자리를 뜰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이제는 정말 루시가 왕후가 됐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 귀여운 말괄량이가 저렇게 우아한 왕후가…….

그 순간 로미에게도 희망이 보였다.

우리 로미도 크면 저렇게 우아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로미. 왕후님께서 아주 우아하시지?”

“응. 하지만, 무서워. 화나면 막! 검을 들고! 허수아비를 베어 버렷!”

내가 잠시 로미가 기억을 본다는 걸 망각했군.

아무래도 우리 로미에게는 해당이 안 될 것 같았다.

그저 애들 괴롭히지 말고 착하게만 살기를 바라야 할 것 같았다.


 

***

결혼식이 끝난 후 비카는 로미의 협박에 마지못해 공작저에 오게 되었다.

다시 비카가 돌아온 공작저는 왠지 허전해진 빈 곳을 완전히 채운 것처럼 꽉 차 있는 느낌이었다.

비카의 방도 그대로였기에 우리는 비카를 방으로 안내하고 로미를 재우기 위해 침실로 돌아왔다.

오늘 로미의 관심은 온통 결혼식에 있었기에 시카르는 로미에게 우리가 결혼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네 엄마한테 말했지. 나와 결혼해주시오. 그대에게 첫눈에 반하였소.”

“거짓말. 나와 결혼할래, 죽을래. 라고 했잖아.”

그러자 시카르는 빈정 상한 듯 시선을 내렸다.


“난 얘기 안 할 것이다. 어차피 얘기를 해줘도 이미 내 기억을 모두 다 보고 있는데 얘기해서 무엇해.”

“없는 말 하니까 그렇지. 알겠어. 모르는 척할 테니까 얘기해줘. 아빠. 아는 얘기라도 아빠가 해주는 게 재밌어.”

부녀가 어쩜 저리 똑같은지.

시카르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 엄마는 결혼을 곧장 허락했지. 네 어머니도 알았던 거야. 이런 로맨틱한 남자를 놓치면 안 되겠구나, 하고 말이지.”

그 당사자가 앞에서 기막히다는 얼굴로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문득, 로미는 나를 보고 물었다.


“엄마 아직도 악몽 꿔?”

로미의 질문에 시카르는 깜짝 놀라 갑자기 로미를 재우기 시작했다.


“우리 로미 자야지. 자장자장.”

“로미 잠 안 오는데?”

시카르는 벌떡 일어나며 로미에게 말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엄마한테 얘기하면 안 돼!”

비카에게 로미를 재워 달라고 부탁하려고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로미를 껴안으며 말했다.


“아니. 이제는 안 꿔.”

로미는 다행이라는 듯 내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다행이다.”

조용히 안겨 있던 로미는 금세 새근새근 잠들었다.

로미가 잠들고 나서야 시카르는 침실로 들어왔다.


“잠들었지?”

“비카님에게 로미를 재워 달라고 부탁했구나?”

시카르는 별수가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로미가 태어나고 보니 비카의 능력이 이보다 더 간절할 수가 없군.”

시카르는 한숨 놓았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 뒤로 와서 나를 껴안았다.


“오늘 하루가 참 고단하지만, 가족이 있어 편안합니다. 부인.”

시카르는 매일 밤 이렇게 내 등에 찰싹 달라붙어서 잠을 청했다.

나의 악몽.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던 그 악몽의 비밀.

나는 사실 내 악몽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시카르는 옷장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밖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고 있는 부모님이 보였다. 동생과 나를 비교하며 싸우는 부모님들.

나는 옷장 문을 여는 시카르의 손을 붙잡았다.

나 때문에 싸우는 부모님들이 보기 싫어서.

처음 시카르는 내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 옷장에 갇힌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옷장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부모님들이 나 때문에 싸울 때마다 숨어 있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꿈에서나마, 옷장 안에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옷장 안에 갇혀 있는 악몽을 꾸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현대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던 키였는지도 모른다.

다신 그런 악몽을 꾸지 않는 것을 내 마음 한편에서 간절히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은, 다시 현대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다.

난 사랑보다는 비교와 구박을 더 많이 받았던 유년기를 보냈고, 그런 기억 때문에 광장공포증도 생겼고, 때때로 악몽을 꾸기도 했었다.

그리고 난 그것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편한 일일 뿐. 내가 불행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게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을 만큼 지금의 난 행복하니까.

서연의 말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아도 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새근새근 잠은 로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삶이 나에게 이렇게 큰 행복을 줄지 알았다면, 덜 외로워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라도 나는 내 행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카르는 어서 자라는 듯 나를 꼭 끌어안았다.

앞에서는 로미의 숨소리가. 목덜미에서는 시카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다는 것.

삶은 그 자체로도 이미 완벽하고 더없이 행복한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한.

에필로그

우리는 결국 비카와 함께 블랙스완으로 갔다.

그곳은 로미도 처음 가는 곳이었기에 로미는 한껏 들떠서 블랙스완을 구경했다.


“이곳은 모두 비카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에요. 비카 님, 여기서 인기투표 1등이었거든요.”

내 말에 듀리온도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모두 비카 너를 좋아할 거야. 너 인기 많더라고.”

“인기투표라니. 그건 뭐죠?”

“잘 보세요. 비카 님.”

나는 걸어가는 사람 중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를 잡고 물었다.


“블러드 킹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있어요?”

그러자 그 여자는 내게 말해서 뭐하냐는 듯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당연히 비카죠!!”

“설문 응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리고 여자는 다시 가던 길을 지나갔다. 비카는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님과 같은 종족의 사람들인 것 같은데, 저 사람은 어떻게 나를 알죠? 그리고 블러드 킹은 또 뭐죠?”

“일종의 인기투표를 지칭하는 거라고 해두죠.”

“아무튼 블레이크 소속 마을답게 주변 환경이 깔끔하군요.”

“비카 님. 여기 온수도 펑펑 나오고, 수도 시설도 잘 돼 있어서 살기 좋아요. 아마 비카 님이 찾은 곳보다 더 살기 좋을걸요?”

관심 없는 듯 보던 비카는 그제야 솔깃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온수시설이요?”

“네. 보세요. 하수도 잘 돼 있어서 아주 동네가 깨끗해요. 공작저가 싫으시면 여기서 살아보는 건 어때요?”

비카는 선뜻 대답하진 않았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도도하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말했다.


“생각 좀 해보죠.”

그러자 시카르는 콧방귀를 끼며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블랙스완 영지민들에게 알린다. 여기 비카 램버스트가 왔다!”

비카가 인기투표에서 1등을 할 때, (그때, 시카르는 순위에도 없었다) 기분 나쁘게 영지민들을 노려보던 시카르는 나중에 반드시 비카를 데려오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시카르는 지금 그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영지민들을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카가 당황스러울 만큼 환호했고, 비카는 얼떨떨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비카가 이제 이곳을 벗어나긴 힘들걸.”

“비카 님이 다시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다니 너무 잘 됐어.”

비카가 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 로미를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 여기가 소설 속이야?”

시카르와 나는 깜짝 놀라 로미를 쳐다보았다.


“응? 로미?”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데? 블러드 킹! 엄마 기억에서 봤어!”

큰일이다. 지금은 로미가 어려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고 해도, 로미가 크면 뭐라고 해명을 해야 하지?

내가 난처한 눈으로 시카르를 쳐다보자 시카르도 난처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난 이내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때 되면 또, 해결 방법이 생기겠지?”

시카르는 방긋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래. 맞아. 부인. 미리 걱정할 건 없어.”

로미를 가졌을 때 보았던 그 광활하던 대지는 이제 완전히 하나의 마을이 되어 있었다.


“로미야. 여기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곳에 집을 짓고 논밭을 만들었더니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이 된 거야. 놀랍지?”

“나도 다 알아. 다 봤어.”

“아. 그래…….”

우리가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자 로미가 앞을 보며 말했다.


“나도 나중에 이렇게 살기 좋은 영지를 만드는 공작이 될 거야.”

로미에게 들은 말 중 모처럼 기특하고도 대견한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카르는 어김없이 딸 바보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럼 그럼! 우리 로미는 블레이크 가에서 가장 훌륭한 영주가 될 거야. 우리 로미, 누구 딸?”

“아빠 딸!”

“아이고, 예뻐!”

더없이 행복해하는 이 부녀를 보고 있자니, 내가 더 행복했다.

시카르는 로미를 안고 건물들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이쪽으로 도망치듯 오고 있는 비카가 보였다.

극성 팬들을 피해 도망 오는 것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음에 덧없이 감사한 오늘을 나는 살고 있다.

그리고 내일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이대로 곁에 머물러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삶이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완벽하게 행복한 것이니까.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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