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화 (1/333)

1. 조금 진지한 이야기(1)

#1

전투가 끝난 것은 사흘째의 저녁이었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피부를 후려치는 빗줄기는 물보다는 채찍에 가까웠다.

“커허억···허억···.”

가까스로 숨을 고른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잠잠해진 전장에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한곳에 쏠려 있던 시야가 넓어지자 지옥 일부를 옮겨 놓은 것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평선까지 뻗은 황무지는 전체적으로 불그죽죽한 색을 띠었다. 핏물과 버무려진 진흙의 색이었다.

질퍽해진 땅 위로는 한때 인간을 구성하던 파편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곳곳에 생긴 웅덩이에는 불어 터진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를 제외하고 움직이는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옷깃으로 칼날을 문질러 닦던 와중,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강하다. 인간이 이토록 강할 수 있다니.】

거센 폭우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용암이 흐르는 동굴처럼 깊은 목소리였다. 로난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너 아직 안 죽었냐?”

【아하유테의 명백한 불찰이로다.】

다섯 발자국 정도 앞에는 거대한 인간이 대자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 참상을 만들어낸 원흉이었다. 거인은 스스로를 아하유테라 칭했다.

신장이 족히 4m는 되어 보이는 거인의 등에는 두 쌍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종교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천사라는 존재와 비슷한 외형이었다.

머리는 달걀처럼 맨질했고 이목구비는 뚜렷했다. 백색을 띠는 근육질의 육신에는 깊고 기다란 자상이 수십 줄기 새겨져 있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피가 거인을 중심으로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 아직은.】

칼자루를 쥔 로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만 같아서는 만 갈래로 찢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저놈 하나가 제국의 군단 열 개를 증발시켰다.

네 장의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폭풍이 몰아치고, 빛으로 만든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전을 벌이기 전에 사라진 무고한 생명은 셀 수도 없었다.

【허나 머지않았다. 아하유테는 패배했고, 곧 그분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행이네. 가는 길에 개똥이나 밟아라. 좆나게 질퍽한 걸로.”

로난은 그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방귀를 뻑 뀌었다. 그래도 안 일어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치명상을 입은 것 같았다.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에이, 개새끼."

비싼 돈을 주고 산 담뱃대는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그는 부러진 담뱃대를 거인의 얼굴에 집어 던지고는 몸을 일으켰다.

“참, 네 친구들도 뒈진 건 알고 있냐?”

【친구?】

“그래, 너랑 같이 내려온 새끼들.”

【니르바나와 두아루를 말하는 것인가.】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아무튼 뒈졌어.”

스무 날 전, 세 명의 거인이 지상에 강림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정도의 파괴 행위를 일삼았다. 아하유테는 마지막 남은 거인이었다.

“하나는 성질 더러운 용이 태워 버렸고, 다른 하나는 로르혼이라는 요술쟁이 영감이 영원히 봉인했지. 너희가 뭐 하는 새끼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다 끝났어.”

로난은 거인의 표정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레드 드래곤 나바르도제와 그녀의 일족이 공멸(共滅)에 준하는 피해를 보았다던가, 대마법사 로르혼이 봉인 술식의 매개체로 자신의 영혼을 사용했다는 것 같은 지엽적인 정보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로난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다행이군.】

“뭐?”

【그대와 같은 강자들이 더는 없다는 사실이. 그대들은 이제 우리를 막을 수 없다.】

로난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번득이는 검끝이 거인의 목젖을 겨냥했다.

“···알고 있었냐?”

【별의 아이들은 서로 감각을 공유한다.】

“진짜···마지막까지 마음에 안 드는 새끼일세. 강자들이 없다는 건 뭔 소리야?”

아직 내가 있는데.

로난은 그 말을 구태여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는 실제로 이 덩어리와 다시 싸운다면 하루 만에 결판을 낼 자신이 있었다. 허나 아하유테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허.”

【강한 자여. 얕은 속임수로 진실을 가리지 말지어다.】

검이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로난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검끝을 거인의 목에 밀어 넣었다.

질긴 가죽이 찢어지며 푸른 피가 울걱울걱 솟구쳤다. 아하유테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대는 진창 속에서 재능을 썩혔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갈고닦았다면 우리의 숙원을 가로막는 거대한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잡담은 이쯤 하자. 지겹다.”

【그대는 대단한 인간이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하늘을 박차고 별을 베어낸 사내의 이야기는 실로 내일의 지평선 너머로 전해질 만하다. 허나】

그는 쐐기를 박듯 내뱉었다.

【그대들의 세상은, 결국 별빛에 매몰되어 사라지리라.】

서걱!

로난의 검이 호를 그렸다.

****

“살아 있으면 대답해! 아무도 없냐!”

로난은 손을 말아 입에 가져다 댄 채 외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하유테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죽었다. 푸른 피는 토사에 스며들지 않고 강물처럼 흘러갔다. 로난은 거인의 시체에 오줌을 갈기고는 자리를 떴다.

그는 전장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죽음이 존재했다. 짓이겨진 주검들을 피해서 걷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으득.

창백한 면면들을 훑어보던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대부분이 낯익은 얼굴이었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징벌 부대의 전우들. 로난이 쓰게 읊조렸다.

“미련한 새끼들.”

징벌 부대는 범죄자들로 구성된 특수부대였다. 순국을 의무로 삼는 군대의 밑바닥. 기강조차 제대로 안 잡히는 오합지졸의 극치.

그는 평소에는 적당히 껄렁대다 도망치는 놈들이 왜 그런 괴물에게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좀 세다고 니들도 세진 줄 알았냐? 엉?”

아하유테는 강했다. 하늘을 가리는 화살 세례도, 내로라하는 기사들의 오러 스피어도, 심지어는 제국제일검이라 불리는 검성(劍聖) 슐리펜의 비기조차 결정타를 입히지 못했다.

오직 로난의 검만이 거인의 살을 가르고 피를 뽑아낼 수 있었다. 오러를 사용하기는커녕 마나도 느끼지 못하는 징벌병의 칼이 거인에게 먹혀드는 이유는 아무도, 심지어 로난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제국의 명운이 걸린 전투 속에서 신분은 무의미했다. 대장군은 기존의 계획을 모조리 파기하고 로난을 중심으로 한 전략을 다시 수립했다.

졸지에 징벌 부대는 10개 군단의 엄호를 받는 최중요 전력이 되었다. 허파에 바람이 찬 망나니들은 동료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찢기고 부서지며 로난의 길을 텄고, 결국에는 대장군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이 병신들아···.”

로난은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죽은 동료들의 눈을 하나하나 감겨 주었다. 굳어 버린 눈꺼풀은 고목의 피륙처럼 질기고 딱딱했다. 그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어?”

로난은 불현듯, 스산한 현기증이 관자놀이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철퍼덕.

느닷없이 일어선 지면이 뺨을 후려쳤다. 술을 마신 것처럼 눈앞이 핑핑 돌았다. 로난은 엎어진 채 투덜거렸다.

“에라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채찍 같은 빗줄기가 진창에 처박히지 않은 쪽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시간에 대해 지껄이던 아하유테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격전을 마친 몸뚱어리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였다.

이 현상은 몸이 하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더는 너 같은 놈팡이의 허세에 어울려주지 않겠다는.

“커헉!”

난데없이 기침이 뿜어져 나왔다. 검붉은 핏덩이가 잔뜩 섞인 기침이었다. 로난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정체되어 있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선두를 달리는 기수는 고통이었다.

“니···미···.”

기왕 죽는다면 하늘을 보며 죽고 싶었다. 로난은 사력을 다해 몸을 뒤집었다. 똥기저귀처럼 구리구리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도,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으르렁거리는 먹구름 사이로 희푸른 뇌광(雷光)만이 언뜻언뜻 번득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이 지랄이네.”

어째 기분만 더 잡치는 것 같아 로난은 눈을 감았다. 이제 그냥 빨리 죽고 싶었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살아온 나날들이 어둠 속에서 몽실몽실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대는 진창 속에서 재능을 썩혔다.]

다시금 그 대머리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주마등처럼 흐르는 기억은 대부분 머저리 짓을 하거나 머저리처럼 시간을 허비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빛나는 재능을 썩혀 버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로난 자신이었다.

“아카데미라도···다닐 걸 그랬나.”

재능 자체는 금방 깨달았다. 비범함이란 가난이나 기침처럼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유일한 가족인 누이는 제대로 교육을 받을 것을 누누이 종용했다. 너는 분명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며 사랑과 정성으로 그를 길렀다.

로난은 그게 싫어서 집을 나왔다. 귀찮고, 부담스러웠다.

이후로는 삼 년간 들개처럼 대륙을 방랑했다. 범죄 대부분이 그렇듯, 로난 역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한 죄로 징벌 부대에 끌려갔다. 정확히는 본인이 자수한 것이었지만.

군대는 의외로 지낼만했다. 삼 년을 살아남으면 전역 처리를 해 주는 부대에서 로난은 칠 년을 눌러앉아 있었다.

칼질만 하면 먹여주고 재워 주는데 딱히 나갈 이유가 없었다. 곳곳에서 등용 제의가 들어왔지만 모조리 거절했다.

그 결과가 이 꼴이었다.

거인들의 침공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칠 년을 함께 구른 얼간이들도, 다정한 누이도, 방랑길에 신세를 졌던 나라나 마을도 재로 돌아갔다.

만약 제대로 검을 배우고 수련에 매진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지킬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의미 없는 고민이다.

로난은 눈을 감은 채 몸의 힘을 풀었다. 영혼이 서서히 몸을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죽음은 깊은 잠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 게 누구였더라···

정신이···

몽롱해지는···

차였다···.

[아무도······없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다!”

로난은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짝과 뒤통수에서 진흙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는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였다.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상을 입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아무도 없나.]

“이런 빌어먹을, 여기 있다고! 내가 여기 있다!!”

여자 목소리.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 바로 울려 퍼지는 걸로 봐서는 전음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계속 말해! 지금 간다!”

얼추 방향을 잡은 로난이 달려나갔다. 다리가 풀려서 몇 번이고 진창에 얼굴을 처박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직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여기는···.]

목소리는 갈수록 희미해졌다. 이유가 뭐든 간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로난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후회로 얼룩진 상념 따위는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머지않아 어느 바위 앞에 도착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바위 두 개가 서로 지붕처럼 마주 보고 있어서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구조였다.

“허억···허어억···!”

숨을 내뱉을 때마다 역류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로난은 소매로 입가를 닦은 뒤 바위틈으로 들어섰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 안에 누워 있었다.

“당신은···.”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로난은 턱밑까지 차오른 탄식을 삼켜야 했다.

“장군님.”

아는 얼굴이었다.

“······귀관은.”

힘겹게 머리를 들어올린 여인이 입을 열었다. 메마르다 못해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이전의 위엄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장정보다 큰 키, 피와 진흙이 덕지덕지 눌러붙은 묵빛 머리칼. 그와 대비되는,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로난은 무언가에 홀린 듯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데샨 대장군님.”

모든 제국군의 우상을 목도했음에도 로난은 경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경례를 받아 줄 팔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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